가평요에 가면 아직도 옛날에 옹기 굽던 옛 도요지가 폐허가 된 채 있단다.
거기에 가면 다 부서져버린 옹기 조각들이 지천이란다.
어느 사람이 거기서 이런 깨진 독 하나를 주워
근사하게 풀꽃들을 심어 놓았다
옛날 같으면 아무 쓸모가 없을 깨진 독이
새로운 용도로 새로 탄생한 것이다

쓸모라는 것은 상황이 바뀌면 달라지는 것이다
시간이 바뀌고 공간이 바뀌고 인간이 바뀌고 세상이 바뀌면
쓸모 있던 것들은 쓸모 없어지고
쓸모 없던 것들도 쓸모가 있게 된다

지금 나의 쓸모는 지금 현재 내 주위의 상황이 판단하는것일 뿐이다
지금 나를 판단하는 사람들은 세 가지 기준에 따를 것이다
1. 자기자신의 판단 : 독선이나 아집에 근거할 경우 하잘 것 없는 판단이다
2. 흔히 남들이나 세상의 기준인 유행을 따르는 경우: 부평초처럼 떠돌 뿐이다
3. 조직이나 단체의 규정이나 생리에 따르는 경우:얼핏 오류의 위험성은 적어 보인다   

무엇에 근거하든지 세상의 기준에 따르면
세상 입맛에 맞추려면
너를 버려야 한다
네가 너를버리기 아깝든지 버리지 못한다면
세상의 기준에서 마음을 버려야 한다

두어라
지금은 쓸모없다고 왕따시키고 토사구팽하고 백안시하던 너를
또 한세월 지나가면 어느 누가 저 깨어진 독처럼 고이 주워다가
잘 꾸미고 귀하게 여길 줄 알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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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모두 유용(有用)의 용(用)만을 알고 무용(無用)의 용을 모른다”
라고 한 《장자(莊子)》 〈인간세편(人間世篇)〉의 말에서 유래한다.
외물편(外物篇)에도, 오히려 무용을 앎으로써 비로소 유용을 함께 논할 수 있다 하였다.
예컨데 사람이 광대한 길을 걸을 때 걷는 부분은 지면의 일부이다.
지면에서 발로 밟을 자리(유용)만을 남기고
그 밖의 부분(무용)을 모두 한없이 깊게 파내 버렸다고 치면,
과연 사람은 보행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이와 같은 예를 보아도 무용의 용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이 밖에 〈소요유편(逍遙遊篇)〉에서도 무용의 용을 설명하고 있다.

 큰 목수인 장석(匠石)이 제자들을 거느리고 제(齊)나라로 가다가 곡원(曲轅) 땅에서 사당에 서 있는 거목을 만났다.
많은 사람들이 그 나무의 엄청난 크기에 놀라서 나무를 구경하고 있었고,
장석의 제자들도 그 나무를 보자 경탄을 했다.
그러나 장석은 그 나무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지나치면서
그 나무의 거대한 위용에 감탄하는 제자들에게 핀잔을 주었다.



그건 쓸모 없는 나무야. 그것으로 배를 만들면 가라앉고,

널을 짜면 곧 썩으며, 기물을 만들면 곧 망가지고 문을 만들면 진이 흐르며,

기둥을 만들면 좀이 생긴다. 그러니 저건 재목이 못되는 나무야.




그러나 낮에 본 거목이 꿈에 나타나서 장석을 꾸짖었다.

자신이 쓸모가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본질을 극한까지 실현시킬 수 있었음을 이야기해주자

장석도 거목의 무용지용의 뜻을 깨닫게 되었다.

  무용지용론에는 ‘무엇을 위해서 살 것인가?’ 하는 삶의 궁극적인 목적에 대한 장자의 생각이 담겨 있다.

‘무엇을 위해서 살 것인가?’ 하는 의문에 대해서, 장자는 두 가지 답이 있다고 보았다.

하나는 권력, 지위, 돈 등 자기 바깥에 있는 외물(外物)을 추구하고 성취하는 데 삶의 궁극적인 목적을 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에 내재해 있는 ‘참된 자기’를 깨닫고 실현하는 데 삶의 궁극적인 목적을 두는 것이다.

 

 장자가 살았던 춘추전국 시대의 말기는
서주(西周)의 윤리적 질서가 붕괴되고 육강식의 힘의 논리만이 팽배하여 있었다.
이런 혼란한 시대 상황에서, 사람들은 생존에 급급한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야 했다.
그래서 이 시대의 많은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교활하고 이기적인 존재로 변해갔으며, 외물을 추구하고 획득하는 것에 삶의 궁극적인 목적을 두었다.
장자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수많은 동시대인들이 선택한 이런 삶은 소외된 것이었다.
이런 삶을 소외된 것이라고 보는 까닭은 무엇일까?
모든 사람들에 내재하여 있는 ‘참된 자기’야말로 인간의 본질이라고 장자는 생각하였고,
외물을 추구하는 삶은 필연적으로 ‘참된 자기’를 황폐화시키기 때문이었다.

대체 유용(有用:소용이 닿는다는 것)은 중요한 일임에 틀림 없다.
천박한 인간의 지혜로 추측하는 유용이 참다운 유용일지 아닐지,
더 한층 높은 도(道)의 입장에서 본다면
범속(凡俗)들의 유용같은 것은 취할 바가 못되는,
아니 어리석음에 지나지 않으며,
오히려 무용한 것 가운데에 대용(大用:참다운 용(用))이 있다고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철학자 장자는 「무용지용」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장자」의 서중(書中)에서는 무용지용을 많이 쓰고 있는데, 그
가장 대표적인 예의 하나로「인간세편(人間世篇)」에 보이는
초국 은사(楚國 恩師) 광접여(狂接輿)가 공자에 대하여 말한 비평 가운데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무릇 산속의 나무는 유용하기에 벌채(伐採)되어 자신의 원수가 되고,
기름(膏)은 밝은 빛을 내기에 태워져 자신을 태우며,
육계(肉桂)는 식료(食料)가 되고 옷(漆)은 도료(塗料)가 되기에 베어진다.

유용의 용만 알고, 무용지물을 알려고도 하지 않으니 서글픈 일이로다.」
이와 같이 말하고 광접여는 인의도덕(仁義道德)으로써
난세(亂世)를 다스리려는 공자의 태도를 풍자하였다.
조그마한 유용은 오히려 자신을 망치는 유해 무익한 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용지용이란 어떠한 것이냐?
장자는 교묘한 비유를 써서 밝히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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