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의 죽음을 기다리는 독수리.


아프리카의 아픔을 취재하기 위해 카터라는 기자가 수단에 들어가 우연히 마주친 것은 식량 배급을 받으러 가던 한 소녀가 영양실조로 더 이상 걷지 못하고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던 현실이었다고 한다. 소녀와는 대조적으로 살찐 독수리가 소녀의 뒤에서 소녀가 빨리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이 한 장의 사진은 전세계에 아프리카의 실상을 알리는 큰 계기가 되었고, 이 사진은 퓰리처상을 수상했다고 한다. 아프리카의 암울한 현실을 알리던 이 기자는 1994년에 33세의 젊은 나이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사람은 누구나 유한한 시간을 태어나서 살다가 죽기 때문에 한편으로 보면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고, 다른 한편으로 보면 죽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인생을 충실하게 살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라는 의미로 죽어가는 사람이 되지 말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되라는 표현을 쓴다.

 

그런데, 얼마 전 <아직 죽지 않은 사람으로 살지 말라>는 표현을 들었다. 나에게 하는 말을 직접 들은 것도 아닌데, <아직 죽지 않은 사람>이란 표현은 나를 왠지 모르게 한참을 멍한 상태로 만들었다. 언제가 우연히 보았던 퓰리처상 수상작인 앞의 사진과 <만약 지구가 100명의 마을이라면>이란 책의 내용이 복잡하게 엉킨 실 타래처럼 내 머리 속에 떠올랐다. 지구가 100명의 마을이라면 20명은 영양실조에 빠져있고 1명은 지금 먹지 못해서 죽어가고 있다.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하루 3끼를 먹고, 추울 때와 더울 때를 가려서 입을 옷이 있고, 비 바람이나 들짐승의 공격을 막아줄 집이 있다는 것을 지구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누리는 것은 아니다. 내 생각을 가지고 내 인생을 고민하고 더 나은 미래를 계획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삶을 계획할 수 있는 것 또한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 행복이 아니다. 아주 소수의 사람들에게 내려진 아주 특별한 혜택인 거다.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우리는 매우 큰 축복을 받고 태어난 사람들임에 틀림이 없다. 신의 존재를 부정한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어딘 가로부터 많은 축복을 받았고 지금도 받고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취업문제로 고민하는 사람도 하루 3끼를 먹으면서 생활을 걱정하고 있고, 빚으로 앞이 막막한 사람도 표범이나 호랑이의 공격과 같은 생존을 위협 받고 있지는 않다. 지구가 100명의 마을이라면 우리는 적어도 상위 10명 안에 들어가는 사람들일 거다. 100명 중 20명만이 집에 TV를 소유하고 있고, 7명의 집에만 자동차가 있으며, 대학을 나온 사람은 1명 밖에 안 된다고 하니 말이다.


우리가 이렇게 신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라면 우리는 자기 삶의 의무를 가끔씩 생각해야 한다. 꼭 불쌍한 사람들 돕는 걸 말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하고 그것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다른 사람의 삶에 기여하는 것이 특권을 입고 사는 사람들의 의무일 거다. 어떤 사람은 축구를 열심히 하는 것을 통해서 또 어떤 사람은 연구를 열심히 하는 것을 통해서 자기 삶의 의무를 다할 거다. 우리는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방법으로 자기 삶의 의무를 다하며 살아야 한다.

 

자신에게 스스로 물어보라. 내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나는 삶의 의무를 다하고 있나?

 

우리는 사진 속의 소녀와 비교하면 너무나 많은 걸 대가 없이 받고 살고 있다. 우리는 특별한 행복을 받으며 살고 있는 거다. 그래서, 적어도 그냥 <아직 죽지 않은 상태>로는 살지 말아야 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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