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70년대 '소울의 여왕'으로 불렸던 아레사 프랭클린이 췌장암 투병 끝에 지난달 16일 삶을 마감했습니다. 아레사가 평론가들이 팝역사상 가장 사랑했던 여가수라면, 전세계 대중들이 가장 사랑한 '팝의 여왕'은 6년 전 세상을 떠난 휘트니 휴스턴입니다.

영화 '휘트니'는 48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 휘트니 휴스턴의 삶과 음악을 조명합니다. 백인 감독 캐빈 맥도널드가 메가폰을 잡았고 휘트니의 올케 팻 휴스턴이 제작자로 나섰습니다.

휘트니는 1992년 영화 '보디가드'의 세계적인 흥행과 주제곡 '아이 윌 올웨이즈 러브 유(I will always love you)'의 빌보드 14주간 차트 1위 석권으로 한국에서도 당시 절정의 인기를 누렸습니다. 여성 아티스트가 노래한 최장기 넘버원 싱글 히트곡이었고 무려 1300만장이 팔려나갔습니다.

음악 팬들은 휘트니가 남긴 노래는 잘 알지만 사실 그동안 숨겨진 삶은 잘 몰랐습니다. 2012년 2월11일(현지시간) 들려온 휘트니 사망 소식은 그의 음악을 좋아한 팬들에게는 충격이었습니다. 휘트니는 캘리포니아 베버리힐튼 호텔의 욕조에 익사한 변사채로 발견됐습니다. 경찰이 밝힌 사인은 코카인 과다 복용에 따른 심장발작이었습니다.

사망하기 전 휘트니는 서울에서 첫 공연을 갖기도 했습니다. 2010년 2월 내한 콘서트를 보러 갔던 팬들은 큰 충격을 받았지요. '90년대 팝 디바'로 지구촌 수억만 명에게 감동을 줬던 천상의 목소리는 온데간데 없었고 목 상태는 엉망이었습니다. 왜 그랬을까. 영화 '휘트니'를 보면 우리는 이제서야 뒤늦게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1963년 뉴저지주 뉴어크에서 태어난 휘트니는 흑인 중산층의 음악가 집안에서 자랐습니다. 어머니 씨시 휴스턴은 엘비스 프레슬리 백업 보컬로 활동했고 1970년대 들어 솔로 활동을 할 만큼 나름 가스펠 싱어로 이름을 알린 인물이었습니다.

어릴 적 '니피'라는 애칭으로 불렸던 휘트니는 어머니를 따라다니면서 교회에서 가스펠을 익혔고 일찌감치 타고난 노래 실력을 뽐냈습니다. 가끔씩은 무대에서 씨시와 듀엣을 하기도 했지요. 17세가 되던 해 휘트니는 프로 가수가 되는 결정적 기회를 잡았습니다. 어머니가 공연하기로 했던 한 무대에서 휘트니가 대신 무대에 올랐던 것. 그곳에서 휘트니는 훌륭한 무대를 소화하며 음악 관계자들의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휘트니의 노래 소식을 들었던 두 레코드사가 경쟁하던 장면도 스크린에 나옵니다. 아리스타 레이블 사장이었던 클라이브 데이비스와 일렉트라 레이블의 대표 브루스 룬드발이 관심을 보였고 휘트니와 음반 계약을 따내려고 서로 좋은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결국 상업적인 수반이 더 뛰어났고 훗날 '스타제조기'로 명성을 떨친 클라이브가 휘트니의 데뷔 앨범을 제작하게 됐습니다.

클라이브는 '그레이티스트 러브 오브 올(Greatest love of all)'을 부르던 휘트니의 목소리에 반해 제작자로 나섰고 "난생 처음 들어보는 환상적인 음색이었다"며 다큐 제작 당시 인터뷰했습니다.

1983년 첫 TV 쇼에 출연한 휘트니는 1985년 스물 한살에 1집 앨범을 발표합니다. 앨범은 나오자마자 MTV에서 주목받았고 '세이빙 올 마이 러브 포유(Saving All My Love For You)' 등 무려 4곡의 싱글이 빌보드 차트 1위에 올랐습니다. 2년 뒤 내놓은 2집 앨범도 상업적인 성공을 거뒀으나 흑인사회에선 백인 취향의 컨템포러리 팝을 부른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2집 히트곡 '아이 워너 댄스 위드 섬바디(I Wanna Dance With Somebod)'로 1989년 소울트레인 어워드(흑인음악 시상식)에서 상을 받지만 무대에선 상업적인 백인 색깔이 강했던 휘트니 노래를 향해 야유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아이돌 보이그룹(뉴에디션) 출신인 전 남편 바비 브라운은 그곳에서 만났습니다. 휘트니는 당시 솔로 가수로 인기를 끌던 바비 브라운과 금세 사랑에 빠졌고 1992년 결혼으로 사랑을 맹세합니다. 영화는 휘트니 인생의 전환기는 바비 브라운을 만나면서였다고 언급합니다.

이후 영화 '보디가드'의 여주인공을 맡아 캐빈 코스트너와 연기 호흡을 맞춘 휘트니는 영화의 성공으로 세계적인 스타가 됐습니다. 영화 주제곡은 우리나라 FM라디오에서도 매일 같이 흘러나왔고, 심지어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선거운동 때 아랍어로 번안해 이 곡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휘트니는 영화 '보디가드' 촬영 이후 바비와의 관계가 악화됐고 마약에도 손을 댔습니다.

휘트니의 음악 전성기는 1998년 4집 음반이 마지막이었습니다. 1억6000만장이 넘는 음반 판매고의 대부분은 1~4집 결과물입니다. 전성시절엔 가수뿐 아니라 영화배우로서의 커리어도 성공가도를 달렸습니다. '보디가드' 이후에도 '사랑을 기다리며'(1995) '프리쳐스 와이프(1996)' '스파크'(2002) 등 여러 편의 영화에 출연했습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팝가수 휘트니의 모습은 좀처럼 만나보기 어려웠습니다. 그가 마약에 빠지고 아버지에게 거액의 소송을 당하는 사이 팝음악계는 알리샤 키스, 비욘세, 크리스티나 아길레라 등 후배 흑인 여가수들이 차트를 휩쓸었습니다. 2007년에는 바비와 이혼하고 파산 신청을 하는 등 사생활은 빠져나갈 수 없는 그물망처럼 얽혀버렸습니다. 안타깝게도 딸 바비 크리스티나 휴스턴마저도 휘트니의 죽음 이후 3년 뒤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지요.

말년의 휘트니의 모습은 애처로울 정도로 망가져 있었습니다. 돈이 없어 어쩔 수 없어 영화를 찍어야 했고 목소리가 정상이 아닌 상황에서도 공연을 해야 했습니다. 유럽 투어에선 실망한 수백명의 관객들이 공연 도중 자리를 떴고 한국에서도 비슷한 컨디션으로 노래를 해 망신살을 샀지요. 그 무렵 휘트니는 재활 치료를 받으면서 가수로서 재기를 위해 몸부림을 치던 때였습니다.

휘트니의 살아 생전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영화 말미에 나옵니다. 휘트니는 1994년 11월 아파르트헤이트가 철폐된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 등 3곳에서 남아공 초대 흑인 대통령이 된 넬슨 만델라를 축하하는 공연을 가졌습니다. 평소 만델라를 존경하던 휘트니는 인종차별이 철폐되던 날 흑인으로서 처음으로 남아공에서 노래했고, 남아공에서 공연한 역사상 최초의 메이저 가수라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김정훈 lennon@hankyung.com

ⓒ 한경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