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가 모터보트로 자마미 포로수용소에 도착하자 톰프슨 기관단총과 수류탄으로 무장한 미군 3명이 이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사 1명과 상병 2명이었다. 모두 어제 저녁 스템 대위가 소개해준 병사들. 이수는 미군 3명과 함께 우타가 근무하는 의무반을 찾아갔다. 우타는 아침에 출근한 이수가 갑자기 다시 나타나니 화들짝 놀랐다.

“어? 이수씨, 무슨 일 있어요?”

“우타, 연락 못 받았어? 자기가 자마미 주민 설득에 동원된다는 거...?”

“아니, 그 얘기를 듣고 기다리는 중이긴 한데...당신이 함께 올 줄은 몰랐어요.”

“그래?...우타....이분은 뉴욕 출신인 존 테일러 하사, 이분은 켄터키 실버 그로브 출신 잭 어시지 상병, 이쪽은 미시건 포트휴런 출신 로렌스 베닛 상병이야”

이수는 3명의 병사를 우타에게 소개했다.

“그리고...이 사람은 치넨우타입니다. 수용인들을 간호하는 간호사이자, 제 아내입니다. 여기 자마미 출신이어서 이곳 지리에 밝습니다.”

5명으로 구성된 자마미 주민 구조팀은 302중대 막사로 가서 작전회의를 열었다. 베닛상병의 제안으로 이 구조팀의 이름을 ‘생명을 구출한다.’는 뜻에서 ‘세이버(Saver)’라고 이름 지었고, 암호는 자마미의 상징인 ‘시(Sea)와 선(Sun)'으로 정했다.   미군 3명은 이미 1년 이상 태평양전투에서 실전을 치렀기 때문에 전투경험이 전혀 없는 자마미주둔 일본군과는 다르다고 스템 대위가 귀띔해주었다. 3명의 미군특수대원은 일본군 1개 소대와 접전을 해도 충분히 대처할 수 있을 수준이니까 마음 놓고 따라가도 된다고 덧붙였다.

세이버팀은 이수가 앞장서서 길을 안내하고, 전투상황이 발생하면 존 테일러 하사가 지휘를 맡기로 했다. 출발에 앞서 이수는 지도 속의 지점들을 가리키며 오늘 가야 할 코스를 설명했다.

“우리가 현재 있는 곳이 여기 자마미 마을입니다. 첫 번째는 보트를 타고 동쪽 해안인 후루자마미로 가서 이 해안 위에 있는 해상정진대의 2중대 참호와 3중대 참호에 잔존하는 일본군 병사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들을 투항시켜서 수용소로 이동하게 합시다.

두 번째로는 자마미 마을 뒤에 있는 산업조합 참호에 아직 살아남은 주민이 있는지 확인합시다. 세 번째는 일본군 진지가 있던 해발 135m의 반도쿠루산 참호에 남아있는 일본군과 부상병을 설득한 뒤 구출해서 복귀합시다.”

이수가 이렇게 설명하자, 우타가 이견이 있다며 손을 들었다.

“반도쿠루산에 가서 일본군 부상병을 구하는 것보다 더 시급한 게 있습니다. 죄 없이 죽어가는 사람들을 먼저 구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세 번째엔 산업조합 호에서 반도쿠루산으로 가지 말고, 한국인 위안부들이 숨어있는 라쿠스이 참호로 먼저 갑시다.”

이수는 미군 3명에게 우타의 의견을 통역해주었다. 그러자 테일러 하사가 먼저 우타의 편을 들었고, 이어 어시지 상병과 베닛 상병도 우타의 의견에 찬성했다. 각자 투항자에게 나눠줄 물과 초콜릿, 비스킷을 휴대가방에 챙겨 넣은 뒤 어깨에 메자, 이수가 소리쳤다.

“좋습니다. 자, 지금부터 우리 5명의 세이버는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을 살리기 위해 출발합니다!”

5명을 태운 보트가 후루자마미에 도착하자 이수는 감회가 새로웠다. 이수가 석 달간 걸어 다니던 해안가와 천매암 바위 인근엔 미군의 폭격으로 부서진 배의 베니어판 잔해들이 파도에 밀려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고, 천매암 봉우리 아래엔 미군의 소해   작전으로 인해 파괴된 산호골격들이 모래처럼 무수히 밀려와 있었다.

“우타, 저 엄청난 산호골격들 좀 봐. 미군이 당신의 ‘바다 정원’을 완전히 파괴해버린 것 같은데...”

우타는 잠시 슬픈 표정을 지었지만, 지금은 ‘산호’보다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게 더 급하다며 보트에서 뛰어내려 앞서갔다. 이수도 지금은 사람을 먼저 구해야 하겠지만 나중엔 어김없이 산호도 구하겠다고 다짐하며 우타 뒤를 따랐다.

이수는 후루자마미 해안에 올라서자 저기 앞에 보이는 작은 동굴들이 특공정을 숨기기 위해 파놓은 은닉호라고 3명의 미군에게 설명했다. 그리고 일본 특공정 부대원들은 산속으로 대부분 도망을 쳤는데 3중대 병사들만 아직 미군이 뒤쪽을 점령해버려 후퇴하지 못한 채 아직 동굴 안에 숨어 있을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그러니까 첫 번째로 임시 전대분부였던 ‘오쿠노야마 벙커’를 먼저 접수하자고 제안했다. 테일러 하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해안에서 후루자마미에서 다카쓰키산을 쳐다봤을 때 중앙에 약 30m 높이의 산기슭에 있는 오쿠노야마 벙커 앞에 도착하자 이수가 먼저 동굴 안을 살펴보겠다며, 네 사람은 기다리라고 했다. 이수는 호 바로 앞에서 고함을 질렀다.

“호 안에 누가 있습니까? 누가 계시면 빨리 밖으로 나오세요. 밖은 안전합니다. 미군은 포로를 절대 죽이지 않습니다. 음식과 옷을 주고, 편안하게 살 수 있게 해줍니다. 걱정 마시고 나오세요.”

그러나 동굴 안에선 아무런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이번에는 한국말로 고함쳤다.

“저 서이수입니다. 안에 우리 동지들 계시면 빨리 밖으로 나오세요. 미군에 항복하면 실컷 먹을 수 있으니까 손을 위로 들고 빨리 나오세요.”

이때 한 발의 총성이 울리며 총알이 이수의 귓전을 휙 지나갔다. 이수는 그대로 앞으로 엎어지며 크게 소리 질렀다.

“우타, 엎드려!”

이수는 머리를 땅바닥에 댄 채 다리를 돌려 아래쪽 우타가 있는 방향을 살폈다. 우타와 미군 3명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미 엎드린 모양.

총성이 울리고 10초쯤 지났을 때 고개를 들어보니 특공정 대원 3명이 포복 자세로 빠르게 동굴에서 기어 나와 옆에 있는 덤불 속으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그들은 미군이 동굴 안으로 수류탄을 던져 넣을까 봐 겁이나서 도망치는 중이었다. 뒤를 보니 테일러 하사가 일본군이 숨어든 숲을 가리키며 손짓했다.

“잭, 엄호해줘.”

어시지 상병의 자동소총이 특공정 대원들이 숨어있는 넝쿨 위를 갈기자 나무줄기와 이파리들이 주룩 특공대원들에게 쏟아졌다. 테일러 상병이 벌떡 일어선 후 특공대원들을 향해 총을 겨누더니 특공대원의 발밑에 두세 발의 위협사격을 했다.일본 특공정 대원들은 총을 가슴에 안고 드러누워 숨만 헐떡일 뿐 움직이지 못했다. 너무 공포에 질려 움직일 수가 없어 보였다. 어시지 상병이 뒤쪽으로 돌아가 등 뒤에서 그들에게 총을 겨누었다.

“사살하지 마세요. 소년병입니다.”

이수가 미군들에게 소리치자 테일러 하사가 오른손으로 총을 겨눈 채 숲 밖으로 나오라고 손짓했다. 그래도 그들은 움직이지 못했다. 이수가 뒤편에서 일본말로 소리쳤다.

“일단, 두 손을 들어!”

3명의 특공정 대원들은 총을 그 자리에 두고 벌벌 떨면서 겨우 손을 들었다. 어시지가 바른 동작으로 그들이 내려놓은 총을 모두 거두었다. 일본군 소년대원 세 사람 모두 얼마를 굶었는지 볼이 움푹 들어가고 강한 햇볕에 눈을 뜨지 못해 얼굴을 잔뜩 찌푸렸으며, 한 병사는 눈꺼풀을 바르르 떨었다.

이때 뒷전에 있던 우타가 갑자기 뛰쳐나가며 눈꺼풀 떠는 소년 대원에게 달려갔다.

“오가와!, 오가와 너 살아있었구나. 아...정말 다행이야. 네가 반도쿠루진지로 오지 않아서 다카쓰키 전투에서 죽을 줄 알았어. 오가와, 너 목마르지? 잠깐만...”

우타는 수통을 꺼내 자살 특공정 대원 오가와 하사에게 내밀었다. 오가와는 물을 건네주는 사람이 우타인 것을 확인하고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물 한 모금을 마시더니, 동료에게 수통을 건네주곤 빈혈이 나는지 그 자리에 푹 주저앉았다. 우타가 가방에서 초콜릿을 꺼내 3명의 특공정 대원에게 나눠줬다.

아니, 초콜릿이 마약인가? 초콜릿 속에 이런 대단한 힘이 숨어있는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오래 굶은 사람에게 초콜릿은 마약 같은 위력을 나타냈다. 초콜릿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던 소년 대원들은 금방 눈알이 반짝였고, 푹 주저앉아있던 오가와도 생기를 띠더니 이수를 알아보고 고개를 꾸벅했다.

이런 반응을 보고 식물학자 이수는 초콜릿 원료인 카카오에 각성제가 함유된 건 잘 알고 있지만 이것의 성분을 다시 분석해보기로 다짐했다. 그가 판단하기에 초콜릿엔 분명히 우리가 알지 못하는, 아직 분석되지 않은,  두뇌를 일깨우는, 그런 성분이 들어있음에 틀림 없는 것 같았다.

[빨아먹는 초콜릿도 있다...]

초콜릿을 먹자 정신을 차리는 현상을 지켜보던 3명의 미군들은 겨누던 총을 내리고,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허탈해했다. 테일러가 이수를 쳐다보며 얘기했다.

“얘들은 초콜릿을 먹더니 이제 정신이 돌아오나 보네....이들은 교전 경험이 전혀 없는 친구들이야.... 어떻게 해서 이런 어린애들을 전장으로 몰아넣었을까?”

“일본군이 미군에 밀리니까 이런 16세에서 17세의 고등학생들을 특공대원으로 뽑아, 베니어판으로 만든 작은 특공정에 250㎏짜리 거대한 폭탄을 싣고, 미군의 구축함이나 수송선에 충돌하도록 한 거죠. 이 친구들이 소총을 가졌지만 제대로 쏠 줄도 몰라요. 단지 자살 특공 훈련만 받은 겁니다.”

“우린 이오지마에서 일본군과 싸워봤는데 정규훈련을 받은 일본군의 사격 실력은 미군보다 훨씬 나았어. 우리가 몇 배의 화력을 가지고 있었는데도 작은 섬 하나 점령하는데 미군 1만 명 이상이 희생되었지. 그 이후부터 우리는 일본군에겐 절대 아량을 베풀지 않았거든...눈에 보이면 그대로 사살해버렸어. 그러니 오늘 이 친구 3명은 참 운이 좋은 셈이지.....미스터 서와 함께 오지 않았으면 이들은 벌써 사살됐을 거야.”

“테일러 하사님, 오늘 우리는 사람을 죽이러 온 게 아니라, 살리러 왔잖아요.”

“그렇군!...그래, 힘이 자라는 데까지 한번 살려보자고.”

초콜릿 덕분에 일본 특공정 대원들이 정신을 차리자, 이수가 오가와에게 다그치듯 물어봤다.

“오가와, 오쿠노야마 호안에 너희들 셋 말고, 다른 사람들은 없어?”

“조선인 군부 5명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너무 굶어서 잘 움직이지 못합니다.”

이수는 수통과 초콜릿을 챙겨 동굴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동굴 안을 살펴보니 5명의 군부들이 밖에서 나는 총소리 때문에 얼이 빠져 있었다. 박재문 최기선 천유세 정달식 황태식이었다.

“이 사람들이!...빨리 항복을 하라는데...왜 대답을 안해...빨리 일어나 밖으로 나가. 미군들은 한국 사람을 절대 죽이지 않아... 어서 나가!”

“조장님, 진짜 괜찮은 겁니까?”

최기선이 아직 의심이 사라지지 않았는지, 기어들어가는 음성으로 물었다.

“이 사람아, 나를 봐. 멀쩡하게 살아 있잖아. 이 물 한 모금씩 마시고 밖으로 나가면, 먹을 거 나눠줄게. 다들 따라 나와!”

물 한 모금 마시고 초콜릿을 받아든 다섯 명의 군부들이 비틀거리면서도 줄을 서서 이수를 뒤따랐다. 테일러 하사는 이수의 설득력이 신기하다는 듯 쳐다봤다.

“미스터 서, 벌써 우리가 8명을 구출했네?”

“네, 그렇습니다... 지금 이 다섯 명은 코리언 군부들입니다. 강제로 일본군에 끌려와서 저 아래 후루자마미 해변에 특공정 은닉호를 뚫는 작업에 동원됐던 사람들입니다.”

어시지와 베닛 상병이 특공정 대원이 버린 소총 3자루를 들고 와 이걸 어떻게 처리할까라고 테일러 하사에게 묻자, 폐기해버리라고 했다. 팔뚝 근육이 울퉁불퉁한 어시지 상병이 일제 소총 3정을 튀어나온 바위에 세차게 부딪쳐 부순 뒤 풀숲 속으로 내던져버렸다.

 

ⓒ 한경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