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쭉쭉빽빽' 하얀 자작나무숲에 홀릭되다
07시 55분 용산發 춘천行 ITX 6호차 좌석 8AB에 옆지기와 나란히 몸을 실었습니다. “맨날 산으로 혼자 튀지 말고 한번쯤은 함께 기차 타고 콧바람 좀 쐬어 봅시다”는 옆지기의 뼈(?) 있는 요청을 간과할 수 없어 얼마 전 코레일 기차여행을 검색하여 ‘인제 자작나무숲과 홍천 수타사 힐링 걷기 여행’ 당일치기 상품을 택해 예약을 해두었죠.
'쭉쭉빽빽' 하얀 자작나무숲에 홀릭되다
좌석 찾느라 차내 통로를 오가는 나들이객들의 모습을 살펴보니 5~60대로 보이는 여성분들이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대개 친구사이로 보입니다. 회전이 가능한 좌석이라 끼리끼리 마주보며 앉아 간이테이블을 펴 먹을거리 올려놓고 아침부터 폭풍 흡입 중입니다. 그런데 제 자리가 하필이면 화장실이 가까운 쪽이라 문이 여닫힐 때마다 스치는 스멜~ 앞 뒤 옆 테이블의 먹거리와 콜라보되어 여엉 껄적지근 합니다. 냄새에 예민한 옆지기는 애써 수면 모드로 전환을 시도해봅니다.

1시간 달려 가평역, 이어 강촌을 지나며 삼악산이 아는 체 합니다. 모심기를 끝낸 논은 초록 카펫을 펼쳐 놓은듯 싱그럽습니다. 넋놓고 차창 밖 풍경에 몰입하다가 내려야 할 남춘천역을 그냥 지나칠 뻔 했습니다. 후다닥 열차에서 내려 남춘천역 대합실에 들어와서야 앗차! 싶었습니다.

좌석 앞 걸고리에 ‘라이방’을 걸어 놓고 그냥 나온 겁니다. 열차는 이미 가버렸죠. 그냥 잊어버리기엔 소중한 물건입니다. 공군 파일럿인 사위가 선물해 준 오리지널 ‘레이밴(Ray-Ban)’이라 그러합니다. 역사 내 고객안내실을 찾아 자초지종을 설명했지요. 인적사항과 전화번호를 전했습니다. 안내원이 승무원과 통화했고 ‘라이방’이 그자리에 있다면 챙겨서 보관해 놓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느라 역사 앞에 대기 중인 관광버스에 맨 꽁지로 오르다보니 비어있는 좌석은 맨뒤 나란히 붙은 다섯자리 뿐이었습니다. 뒷좌석이라 멀미를 걱정하는 옆지기에게 미안할 따름이었지요. 열차도, 버스도 좌석運은 없었던 겁니다.
'쭉쭉빽빽' 하얀 자작나무숲에 홀릭되다
'쭉쭉빽빽' 하얀 자작나무숲에 홀릭되다
'쭉쭉빽빽' 하얀 자작나무숲에 홀릭되다
버스는 자작나무숲行에 앞서 인제산촌민속박물관과 박인환문학관 마당에 일행을 내려 놓았습니다.

“강원도 인제에 오셨으니 두메산골 인제의 옛 모습과 시대를 앞선 로맨티스트 시인 박인환을 추억해 보시기 바랍니다. 20분 후에 출발하겠습니다.”

아무리 주마간산격으로 둘러본다해도 20분은 턱도 없을 시간인데 누구하나 태클을 걸지 않습니다. 일행 대부분이 박물관과 문학관 관람에 특별한 의미를 두지 않는 듯 설렁설렁 소풍 나온 것 자체를 즐기는 분위기입니다.
'쭉쭉빽빽' 하얀 자작나무숲에 홀릭되다
인제산촌박물관은 사라져가는 인제군의 민속문화를 체계적으로 보존하고 전시하기 위해 2003년에 개관했습니다. 1960년대 전후 사람들의 생활모습이 모형과 실물, 영상 등을 통해 전시되고 있습니다.
잰걸음으로 박물관을 둘러보는데, 스마트폰이 진동합니다. 낯선 번호입니다. 남춘천역일 것이라 직감하고 전화를 받았습니다.

“차** 고객님 되십니까?” “아 예, 그렇습니다만…” “남춘천역에 선글라스 받아 놓았으니 귀경길에 들러 찾아 가십시오.” “하이고, 감사합니다”

허겁지겁 박물관을 나섰지만 박인환문학관은 둘러볼 겨를이 없었습니다. 20분이 다 되었기 때문이죠. 어김없이 버스는 출발했습니다. 모두들 칼같이 시간을 지키는 걸로 보아 이런 패키지여행의 고수들인 모양입니다.

버스는 원대리 자작나무숲 아래 황태구이집 마당에 멈춰 섰습니다. 낯모르는 분들과 네명씩 짝맞춰 황태구이와 산나물반찬 그리고 감자옹심이가 오른 밥상을 받았습니다.
'쭉쭉빽빽' 하얀 자작나무숲에 홀릭되다
20~30년생 자작나무 41만 그루가 밀집해 있는 순백의 숲에 이르려면 주차장에서 한시간 남짓 임도를 따라 올라야 합니다. 그늘 없는 임도라 따가운 햇살로 정수리가 뜨끈뜨끈 합니다. 자외선 노출에 민감해진 옆지기의 엄살을 어르고 달래가며 천천히 걸어 오릅니다. 드디어 자작나무숲은 하얀 속살을 드러내며 자신의 품을 내어줍니다.
'쭉쭉빽빽' 하얀 자작나무숲에 홀릭되다
'쭉쭉빽빽' 하얀 자작나무숲에 홀릭되다
어딜 둘러보아도 그림입니다. 문득 어느 여행 블로그에서 본 바이칼호수의 자작나무숲이 오버랩 됩니다. 그 판타스틱한 풍광이 거짓말처럼 지금 눈앞에 펼쳐져 있습니다. 고고하고 빼어난 자태로 말이죠. ‘숲의 귀족’이라는 표현이 딱 어울립니다.

자작나무는 불에 탈때 자작자작 소리를 낸다하여 붙여진 순우리말 이름이지요. 한자로는 ‘華’로 쓰며 ‘화촉을 밝힌다’의 화촉은 자작나무 껍질을 뜻합니다. 촛불이 없던 아주 옛날, 자작나무 껍질에 불을 밝혀 촛불을 대신했기 때문이랍니다.

자작나무는 단단하고 조직이 치밀해 벌레가 안 생기고 오래도록 변질되지 않는 특성을 지녔습니다. 국보 제207호인 천마도가 자작나무로 만들어진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라지요. 천마도는 자작나무껍질을 여러겹 사용해 제작된 현존하는 신라 최고의 그림으로 지금껏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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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쭉쭉빽빽' 하얀 자작나무숲에 홀릭되다
시나브로 자작나무숲에 푹 빠져들어 나무 움집이 있는 쉼터 벤치를 떠나기가 싫었지만 빡빡한 당일치기 패키지 일정입니다. 다음 코스인 홍천 수타사로 가기 위해 주차장에 집결하는 시간을 엄수해야만 합니다.
'쭉쭉빽빽' 하얀 자작나무숲에 홀릭되다
이어 홍천으로 이동해 천년고찰 공작산 수타사를 잠시 둘러본 후 19시, 남춘천역 앞에 다달았습니다. 역사 내 고객안내실을 찾아 오전에 놓고 내린 ‘라이방’을 온전하게 접수했습니다. 용산行 ITX는 19시 38분 출발입니다. 춘천에 왔으면 먹어줘야 한다는 게 춘천닭갈비인데… 남은 시간이 30분 남짓이라 춘천막국수로 아쉬움을 달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