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여인’

제2차 세계대전은 유럽지식인들을 벼랑 끝에 세웠다. 그들은 철학을 위한 철학, 종교를 위한 종교, 혹은 예술을 위한 예술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고 개선하며 자신을 감동시키는 새로운 장르의 학문을 찾아 나섰다. 1943년 가을, 나치스가 힘을 잃기 시작할 때, 자코메티는 제네바에서 사소한 일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는 아주 작은 동상들을 만들고 다시 부수는 편집증 환자와 같은 파괴적인 행동을 일삼았다. 그 당시 아무도 그가 훗날 위대한 조각가가 될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없었다.

자코메티는 제네바로 피난 와, 다른 예술가들과 어울리며 소일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제네바의 한 레스토랑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식사하는데, 친구가 제네바 출신 젊은 여성을 데리고 왔다. 그녀는 날씬하고 살갗은 희고, 검은 눈에 검은 머리, 그리고 세상의 어떤 어려움도 경험한 적인 없는 순진한 얼굴을 가졌다. 그녀는 자코메티보다 22살이나 나이가 적은 아네트 암(Annette Arm)이다. 42살의 자코메티가 20살의 아네트를 만난 것이다. 아네트의 아버지는 보수적인 학교선생이었다. 그녀는 예술을 통해 부모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기를 꿈꾸는 철없는 여성으로 제네바 교외에 있는 비서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아네트의 엄격하고 청교도적인 성격은 자신의 어머니 아네타와 유사했다. 그러나 동시에 금욕적인 집안을 탈출하려고 여러 번 자살을 시도할 만큼 당돌한 여성이기도 했다. 인생의 바닥에서 헤매고 있는 자코메티에게 아네트는 삶의 활력소가 되었다. 파리에는 자신이 아직도 사랑하는 여인인 이사벨라가 있었지만, 자코메티는 제네바에서 자신의 삶 속에 들어온 아네트와 사랑에 빠진다. 그들은 만난 첫날부터 연인이 되었다. 아네트는 자코메티의 파란만장한 삶의 중심을 잡는 안주인이 될 것이다.

아네트

자코메티는 1938년 자동차 사고로 다리를 다쳐 지팡이를 짚고 다녔다. 그는 아네트와 함께 산책하면서 지팡이로 아네트 다리를 툭툭 치며 “앞으로 전진”이라고 장난섞인 말을 건내기를 즐겼다. 아네트가 자코메티 삶의 동반자가 될지는 의문이었지만, 이들의 만남은 분명 운명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자신의 삶의 가장 중요한 어머니의 이름 아네타(Annetta)와 유사했다. 그녀는 젊고 생동감이 넘쳤다. 순종하면서 동시에 반항하는 성격도 가졌다. 중년의 가난한 예술가에게는 너무나 매력적인 성격이었다. 보수적인 아네트의 부모님은 누추하고 늙은 자코메티를 처음에 반대하다가 딸의 연인으로 수용하였다. 그러나 자코메티의 어머니는 아네트와의 관계를 인정하지 않았다. 전쟁 중에 벌이가 없었던 자코메티는 비서로 일하는 아네트에 경제적으로 의존한다.

‘마드므아젤 로즈’라는 여우

1944년 6월 6일 새벽 연합군은 노르망디 해변에 상륙하여 파리를 나치스로부터 탈환하기 위해 파리로 진군하였다. 나치스 점령시절, 나치스 앞잡이를 했거나 동조했던 파리 시민들은 도망치거나 잠적하기 시작하였다. 같은 해 8월 24일 연합군이 파리로 진격하였다. 그 당시 자코메티는 제네바에서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며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파리는 자코메티를 예술가로 훈련시키고 자신의 예술을 전개할 수 있는 사상적인 근간을 형성시켜주었던, 어머니같은 존재였다. 파리는 그에게 조각가로서 두각을 드러나게 만들어준 장소였다. 제2차 세계대전 후, 파리는 음식과 자동차 연료를 받기 위해 긴 줄을 서야했다. 파리의 지식인들과 정치가들은 유럽의 다른 도시들과 마치가지로 나치스가 남긴 유산을 청산하기 위해 공개 재판과 앙갚음에 집중하였다.

자코메티는 파리에 남아서 이폴리트 맹도롱가에 있는 자신의 작업실을 관리해 주던 동생 디에고를 걱정하였다. 디에고는 파리에 남아 장식디자이너로 연명하였다. 그는 수년동안 궁핍과 고통 속에서 지내면서 새로운 친구를 만났다. 디에고의 친구가 레지스탕스의 일원이었는데, 나치스에게 체포되어 수용소로 보내진 후,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그는 그곳에서 새끼 암 여우 한 마리를 애완동물처럼 키우게 되었고, 전쟁 후에 그 여우를 파리고 데리고 와 자신이 사는 아파트에서 키웠다. 이 사실이 디에고를 기분 나쁘게 만들었다. 디에고는 여우를 아파트에서 키우는 것은 부도덕한 일이라고 말했다. 결국 디에고는 여우를 자신의 작업실로 데려와 키우기 시작하였다. 디에고는 이 붉은 여우이름을 ‘마드므아젤 로즈’ 즉 ‘장미 아가씨’라고 불렀다. 디에고는 ‘마드므아젤 로즈’를 통해 인간의 잔인함과는 대조되는 동물의 친절함과 민감함을 배운다. 그는 형 자코메티를 기다리는 동안 마드므아젤 로즈에게 집착하며 생활하였다.

‘귀향’과 ‘이별’

자코메티는 1945년 9월 17일 파리도 돌아가는 기차를 탄다. 그는 아네트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그가 제네바에서 머무는 동안 작업했던 회화들을 전부 불태우고 작은 형상들은 성냥갑에 넣었다. 파리로 돌아갈 여비가 없어, 뻔뻔스럽게 아네트에게 빌렸다. 그는 아네트와 다시 만날 것 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그는 1922년 청운의 꿈을 안고 파리에 도착했을 때를 기억했다. 그로부터 23년 후 그는 다시 파리로 돌아가는 중이다. 3년 9개월만에 돌아온 파리, 특히 그의 작업실은 이전과 똑같았다. 자코메티의 충실한 조수이자 장식예술가인 동생 디에고가 매일 관리했기 때문이다. 자코메티는 자신의 과거가 그대로 보존된 작업실을 보고 신비하면서도 불안한 감정에 휩싸인다. 아버지 지오반니와 여동생 오틸리아가 죽은 후, 거의 10년동안 이렇다할만한 작업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코메티가 작업실에 도착했을 때, 디에고가 키우고 있는 ‘마드므아젤 로즈’를 알아보고 어쩔 쭐 몰랐다. 자코메티는 모델과의 끊임없는 정적을 수련해야만 조각 작품을 창작할 수 있었기 때문에, 동물을 싫어했다. 여우는 낌새를 알아차리고 구석에 조용히 앉아있었다. 디에고는 마드므아젤 로즈가 길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문단속을 반드시 해야 한다고 형에게 말했다. 그러나, 그 다음 날 작업실로 돌아왔을 때, 작업실 문을 살짝 열려있었고 마드므아젤 로즈는 사라졌다. 그 후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디에고는 형에게 불평을 토로하지 않았고 마음에 앙금이 생겼다. 언제가 형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코메티는 제네바에서 자신과 함께 지냈던 헌신적인 아네트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자신에게 많을 것을 요구하는 이사벨라 델버와 재회한다. 이들은 6년 만에 만났다. 이사벨라는 자코메티가 알던 그런 여인이 아니었다. 33살 이사벨은 과도한 음주와 무절제한 생활로 과거의 매력을 잃었다. 이들은 다시 만나 작업실 근처 다 허물어져가는 건물에 살림을 차렸다. 이들의 동거는 몇 개월 지속되지 않았다. 그해 크리스마스에 이사벨은 자코메티와 함께 참석한 파티에서 만난 르네 라이보비츠라는 전위 음악가과 함께 살기로 하고, 떠났다. 자코메티는 파리에서 다시 혼자가 되었다.

루이 아라공 Louis Aragon (1887-1992)

자코메티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하나? 파리로 돌아와 자신의 예술적인 혼을 불태울 불쏘시개는 무엇인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자코메티의 과거를 상징하는 이사벨라와도 헤어졌다. 자코메티에게 전후 첫 작품을 의뢰한 사람은 프랑스 초현실주의를 주도한 시인이며 공산주의를 주창한 레지스탕스 멤버였던 루이 아라공이었다. 아라공은 자코메티가 제네바에 있을 때 방문하여 1946년 2월 15일에 개최된 <예술과 레지스탕스>라는 전시를 설명하며 두 작품을 의뢰하였다. 하나는 프랑스 레지스탕스들을 위한 기념조각으로 레지스탕스의 영웅 앙리 탕귀 (Henri Tanguy) 대령 조각이었다. 그는 프랑스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일드프랑스 (Ile-de-France, 파리를 포함한 프랑스 중북부의 파리분지 중앙부)를 지휘한 군사영웅이다. 두 번째는 전쟁동안 죽은 사람들을 상징하는 여인들과 아이들에 대한 조각이다. 자코메티는 이 부탁을 받고 주저하고 있었다. 전시 날짜는 다가오고 영감은 떠오르지 않았다.

자코메티는 탕귀를 자신의 작업실에 불러 몇 개월동안 그의 이미지를 데생하였다. 그러나 전시가 시작되고도 조각 작품을 완성하지 못하고 초초하게 날을 보내고 있었다. 1946년 2월 마지막 날 밤, 그는 이 탕귀 조각상과 여인 및 아이들을 그린 ‘밤’이란 작품을 갑자기 완성한다. 그는 완성할 수 있었던 이유를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난 주 금요일 나는 이전에 결코 경험해 본적이 없는 새로운 방식의 데생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제부터 나는 조각하는 방법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는 하루 밤에 대령 탕귀의 흉상을 기억으로부터 완성했고 아침에 디에고가 찾아와 너무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만든 조각은 고색창연한 고대의 흉상처럼 아름다웠기 때문입니다. 나는 회화, 조각, 데생에서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는 이런 것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여 너무 놀라고 있습니다. 나는 수년 동안 만들고 부순 조그만 작품들을 생각합니다. 그 과정을 거쳐 이런 성과를 얻었습니다. 나는 이 아침에 작업실에서 너무 기뻐 덩실덩실 춤추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나는 삼일동안 내가 이전에 본적이 없는 것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자코메티가 손쉽게 조각할 수 있게 되었을까? 그는 그 비밀을 이 편지에 남겨두었다. “나는 현실을 처음으로 보기 시작했어요. 내가 모든 것을 신속하게 처리할 수 있는 방식으로. 나는 고대 그리스인들처럼 허공에 있는 형상들을 만들 수 있게 되었어요. 고대 이집트인들처럼 나신 조각상을 만들 수 있게 되었지요. 거의 같은 수준으로. 나는 매일매일 새로운 것을 발견해요. 한숨도 잘 수가 없어요. 8일 동안 신문도 읽지 않았어요.” 지난 10년 동안 괄목할만한 예술적인 진척이 없었던 자코메티에게 새로운 예술적인 영감과 자극을 제공한 요소들은 다음과 같다. 먼저, 아라공이 제안한 <예술과 레지스탕스>라는 전시다. 그는 이 전시에서 프란시스 그루버 (Fancis Gruber)와 파블로 피카소의 작품을 보았고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동료 예술가들의 작품과 증언을 들었다. 특히 작은 조각작품들을 제작하는데 영감을 준 소나 모세(Sonia Mossée)가 아우슈비츠 유대인 집단 수용소에서 굶어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충격을 받았다. 죽음의 충격에 특별히 취약했던 자코메티는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 매진해야 할 예술적인 주제를 발견했다. 그것은 죽음을 염두에 둔 인간의 삶에 대한 의연한 태도다.

탕기 두상

자코메티의 탕기 데상은 처음에는 3cm를 넘지 않았다. 그러다 점점 커져 13cm까지 커졌다. 자코메티에게 탕기는 수많은 사람들을 살려낸 “용사의 거대한 머리를 가진 행동하는 노동자”였다. 탕기는 자코메티가 작업하는 동안 그 앞에서 몇 시간이고 한 치의 움직임도 없이 앉아있었다. 탕기는 이 경험을 후에 이렇게 기록했다. “나를 면밀하게 조사하는 그의 강렬한 시선은 마치 그가 손으로 내 얼굴을 만지는 것 같았다.” 그는 이제 대상의 위치를 규정하는 공간의 크기와 부피를 이해하기 시작하였다. 공간에 대한 느낌은 침묵이며 공간은 대상을 그 침묵 속에서 질식시킨다.

앙리 탕기 henri rol-tanguy /1945, 27.94cm,
청동 / 워싱턴 허시혼 박물관Museum and sculpture garden Hirshhorn

배철현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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