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컹거림에 선잠을 깼다. 부시시한 몰골로 차창 밖을 살폈다. 바닷가 마을길 과속방지턱을 넘느라 버스의 주행감이 둔중하다. 버스는 새벽달이 내려앉은 로맨틱한 여수 밤바다를 더디게 스쳐 지난다. 21:00분에 서울을 출발해 날짜를 바꿔 04:50분, 여수 신기항에 닿았다.

 

금오도 여천 선착장으로 향하는 첫 배는 07:20분 출발이다. 얼추 두시간 넘게 기다려야 한다. 여객선 터미널 주변은 깜깜했다. 버스 헤드라이트를 켜 터미널 벽면에 반사시켰다. 일행이 빙 둘러 앉을 수 있는 환한 공간이 확보됐다. 간이의자를 펴고 버너를 꺼내 불을 당겼다. 준비해온 컵라면으로 이른 조식을 그렇게 해결했다.

 

어둠이 천천히 물러나면서 어디선가 사람들이 꾸역꾸역 모여 들었다. 06시가 넘어서자 터미널에 불이 들어면서 승선권 발매가 시작됐다. 신분증과 배삯 5천원을 창구에 디밀었다. 금오도 여천 선착장까지는 배로 25분 거리다.

 

'금오도 비렁길'은 섬의 남서쪽 해안 18.5km를 다섯 코스로 나눠 조성된 힐링 트레킹 코스다. '비렁'은 '벼랑'의 여수지방 사투리다. 이번 금오도 비렁길 트레킹은 가장 아찔하면서도 아름답다는 3, 4코스를 택했다. 4코스가 끝나는 심포마을에서 시작해 거꾸로 3코스 시작점인 직포마을까지 걷기로 했다.
해수면은 장판처럼 매끄럽고 잔잔했다. 선내 방바닥에 잠시 삭신을 뉘였다. 등짝이 따스하니 절로 눈꺼풀이 내려앉는다. 하지만 금새 신기항에 닿았다. 이곳에서 트레킹 시작점으로 정한 심포마을까진 마을버스를 이용해야 한다. 그러나 대기하고 있던 소형 마을버스는 앞서 하선한 사람들로 금새 만차가 되어 떠나버렸다. 배차간격은 한 시간이다. 이 섬에 3대뿐이라는 7인승 택시를 이용키로 했다. 15,000원에 심포마을까지 데려다 준단다. 일곱명이 마을버스를 타면 2,000원씩 합이 14,000원, 일곱명이 택시에 합승해도 15,000원이다. 맥없이 마을버스 오길 기다릴 필요가 없는 이유다.

 

택시에서 내린 곳은 금오도 비렁길 4코스와 5코스의 분기점인 심포마을 입구다. 자그마한 어촌마을이다. 마을 어귀 텃밭에선 파릇한 채소가 남녘 봄향기를 전한다. 바닷가 해풍을 맞고 자라는 방풍나물이다. 청정해역 금오도의 특산물인 방풍나물은 쌉쌀하면서도 맛과 향이 독특해 봄 식탁의 으뜸이요, '풍을 막아 준다'하여 약재로도 요긴하게 쓰인다고 한다.

 

포구를 벗어나 데크가 놓인 산허리길을 끼고 돌자 비로소 숲길이 시작됐다. 댓잎 서걱이는 대나무 숲을 빠져나오자 시야가 뻥뚫렸다. 옥빛 바다에 한가로이 떠 있는 낚시배, 홀로 갯바위에 올라 세월을 낚는 낚시꾼... 이 모두가 한 폭 그림이다. 온금동 전망대에 올라 사위를 둘러보니 그제야 알 것 같다. 트레커들이 왜 '금오도 비렁길'에 후한 점수를 주는가를...

 

비렁길의 백미는 단연 '동백'이다. 동백나무는 해풍에 특히 강하다. 그래서 바닷가에 흔히 자생한다. 동백꽃은 피맺힌 한이나 정열적 사랑으로 싯귀에 곧잘 등장한다. 핏빛처럼 처절하게 붉어서일까, 양반집 꽃이라는 능소화가 그러하듯 동백꽃 역시 모가지째 땅에 떨어져서도 고고함을 잃지 않는다. 그래서 더욱 처연하다.

 

일행 중 J가 동백나무 밑으로 기어들어 모가지 떨군 동백꽃을 비닐봉지에 주워 담는다. 무얼 하려는 걸까? 동백홀릭인가? 궁금해 물어봤지만 빙긋이 미소만 날릴 뿐.

 

학동마을 앞 해변 너럭바위에 잠시 배낭을 내렸다. 학동마을은 비렁길 3, 4코스의 분기점이다. 진행방향인 3코스쪽 끝머리에 올라야 할 매봉이 제법 우뚝하다. J는 비닐봉지 가득 담아온 동백꽃을 바위 위에 쏟아부었다. 그리고선 정성스레 하트 모양으로 배열했다. 세상에나! 일행들에게 포토존을 선사하기 위해 그렇게 주워 모았던 것이다. 오가는 트레커들도 연신 탄성을 토하며 동백꽃 하트에 스맛폰을 들이밀었다.
"J, 당신을 비렁길의 낭만가이로 인정합니다"

 

비렁길 3코스로 들어섰다. 역방향으로 걷게 될 3코스는 학동마을 > 비렁다리 > 매봉 전망대 > 갈바람통 전망대 > 직포마을까지 3.5km 거리다. 3.2km를 걸어온 4코스는 심포마을 > 온금동 전망대 > 사다리통 전망대 > 학동마을이다.
3코스도 예외없이 해안단구를 따라 이어지는 기암괴석과 에머랄드빛 바다 그리고 끝없는 동백꽃길이다. 가히 일품이다. 여수에서 제일 큰 섬인 금오도는 전국 유인도 중 스물한번째로 큰 섬이며 금빛 자라처럼 생겨 금오도(金鰲島)라 한다.

 

3코스의 뷰포인트라는 '비렁다리'에 닿았다. 협곡을 이어놓은 출렁다리다. 두개의 반지를 형상화한 조형물 사이를 걷게 해 놓아 '언약의 다리'라고도 불린다. 다리 중간쯤 바닥에 투명 강화유리를 깔아놓아 아찔함을 더한다.

 

지금까진 그런대로 시야가 좋았는데 서서히 해무가 밀려들면서 바다 풍경은 시야에서 사라졌다. 비렁다리에서 보이는 매봉전망대도 그새 뿌옇다. 자욱한 해무로 조망이 없는(?) 매봉전망대를 스쳐 지나 숲길 바위턱에 잠시 걸터앉아 우슬차(?) 한 잔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이번 트레킹의 종착점이자, 3코스의 출발점인 직포마을이 가까워질 즈음, 산허리에 감긴 해무가 서서히 걷히면서 바다와 하늘 그리고 산능선의 경계가 다시 드러났다. 변덕이 죽 끓듯 한다는 게 다도해의 기상인 것을...

들쭉날쭉한 섬의 벼랑을 따라 이어진 비렁길은 동백꽃이 더해져 환상의 트레킹 코스로 오래도록 여운이 남을 것 같다. 일상에서 묻혀온 때가 말끔히 씻겨 나간 기분을 느끼며 나무데크 계단을 내려섰다. 직포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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