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유튜브(YouTube)는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매체이자 스타들이 팬을 유인하는 도구로 가장 선호하는 플랫폼이다. 2010년 7월 저스틴 비버(Justin Bieber)가 노래한 ‘베이비(Baby)’의 동영상은 레이디 가가(Lady GaGa)를 뛰어 넘어 유튜브 조회 수 1위를 기록했으며 최근까지 7억 6000만 번 이상 재생되었다. 사실상 무명이었던 그가 세계적인 아이돌 스타가 된 것은 이 동영상이 유튜브에 공개되었기 때문이다.

진정한 실리콘밸리맨, 스티브 첸

실리콘밸리의 창업 역사에서 유튜브는 신드롬에 가깝다. 2005년 이전까지 사람들은 인터넷에 동영상을 게시하고 공유할 수 있는 채널을 갖지 못했다. 바로 그 때 유튜브가 나타나 ‘동영상 공유’라는 네티즌들의 수요를 충족시켜 준 것이다.

스티브 첸(Steve Chen·34)의 유튜브 창업 스토리는 실리콘밸리 역사 중에서도 단연 흥미로우며 연구해볼 가치가 충분하다. 스티브 첸이 창업한 지 2년이 안 되어 16억 5000만 달러라는 엄청난 돈을 받고 유튜브를 매각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창업이 ‘실리콘밸리맨’의 전형적 특징을 거의 다 보여주기 때문이다.

마음이 원하는 바를 끊임없이 추구하는 것, 창업을 향한 열정과 몰입, 상품·사용자·기술에 대한 예리한 안목, 능력 있고 상호 보완적인 창업 파트너, 에너지가 넘치는 창업 멤버, 역경을 극복하는 과정 등이 그것이다. 이런 특징은 유튜브가 세상을 바꾸게 된 결정적 이유이며 신생 창업자들이 가장 먼저 배우고 체득해야 할 부분이다.

티이완을 떠나 미국으로

스티브 첸은 타이완 타이베이에서 태어났다. 8살 때 미국 일리노이의 작은 마을로 이주했다. 그 때부터 스티브 첸이라는 영어 이름을 갖게 되었다. 20살 때는 캘리포니아의 실리콘밸리에서 지냈다. 그는 자서전에서 아이들에게 더 많이 외우라고 강요할 뿐 스스로 생각하고 개선할 기회를 주지 않는 타이완에 살았다면 유튜브를 창업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언급한다. 점수에 연연하지 않고 창의력에 중점을 둔 미국의 교육 시스템 덕분에 컴퓨터를 좋아하게 되었고, 초등학교 때부터 프로그램을 설계했다고 말한다.

그의 고등학교 시절은 밤새도록 프로그램을 짜거나 친구들과 놀고 낮에는 잠만 자고 수업에는 들어가지 않는 생활의 연속이었다. 이후 일리노이 대학의 컴퓨터학과에 입학했다. 이때도 자주 수업을 빼먹었고 독학으로 학업을 이어 나갔다. 그런데 독학을 하면 할수록 성적은 오히려 좋아졌다. 전체 과목에서 컴퓨터는 늘 ‘우수’였다. 선택과목인 ‘역사’와 ‘철학’ 수업은 한 번도 빼먹지 않았다. 수업시간에 흥미로운 여러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실리콘밸리의 유혹에 대학을 떠나다

어느덧 ‘중퇴’라는 말은 실리콘밸리의 상징처럼 되어 버렸다.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가 대학을 중퇴하고 회사를 창업했고, 마이크로소프트의 창업자 빌 게이츠와 페이스북의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도 그랬다. 스티브 첸도 졸업의 남은 몇 달을 기다릴 수 없을 만큼이나 실리콘밸리의 유혹은 강렬했다. 그는 전자결제 기업인 페이팔(PayPal)에 면접을 보고 입사했다.

스티브 첸은 오래전부터 꼭 해보고 싶은 경험 2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상하이에서 일정 기간 살아보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일리노이를 떠나 캘리포니아로 날아가는 것이다.”

1999년 11월 21일. 스티브 첸은 혈혈단신 실리콘밸리에 입성했다. 당시 전형적인 실리콘밸리 엔지니어의 일과표는 이러했다. 느지막이 일어나기, 출근하기, 점심과 저녁 모두 회사에서 해결하기, 새벽 1~2시 심지어 3~4시까지 코드 작성하기, 숙소로 돌아가서 잠자기. 그러다가 프로젝트 일정이 빡빡할 때는 샤워마저 회사에서 하기도 했다. 바쁠 때는 당시 최고경영자인 맥스 레브친도 예외가 아니었다.

페이팔에서 날개를 펴다

페이팔은 관리자 인원수를 대폭 줄이고 엔지어니가 주도하는 운영시스템을 만들었다. 이는 매우 단순하면서도 효과적이었다. 서로를 잘 파악하고 있어 따로 윤활유가 필요 없었다.

페이팔이 크게 성장하기 전, 스티브 첸은 엔지니어와 디자이너가 긴밀하게 협력하는 이곳의 업무방식을 좋아 했다. 새로운 기능이 생각날 때마다 주저 없어 디자이너들에게 제안했고 디자이너들은 그에 따라 설계 화면을 만들고 다시 엔지니어들과 의논했다. 이런 메카니즘 속에서는 어떤 새로운 기능도 3~4일이면 현실화될 수 있었다.

실리콘밸리에서는 누구나 창업을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부끄럽게 여겨야 할 정도다. 하지만 창업한 후의 실패는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다시 시작하면 되기 때문이다. 유튜브의 공동 창업자인 스티브 첸, 채드 헐리, 자웨드 카림은 모두 페이팔의 초기 멤버였다.

채드 헐리가 어떤 인터뷰에서 얘기 한 말이다. “페이팔 사람들이 아이디어를 내고 그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사업을 시작할 때 정말 많은 것은 느끼고 배웠습니다. 비즈니스 관련 학위가 없어도 전체 프로세스를 볼 수 있으니까요. 이 경험을 통해 나는 시작 단계의 회사가 하는 모든 일이 아주 의미 있음을 배웠습니다.”

이베이를 떠나 유튜브를 열다

2002년 7월 페이팔이 상장된 지 다섯 달 후, 이베이(eBay)는 페이팔을 인수했다. 이 후 6개월 동안 최고경영자 맥스 레브친이 떠났고, 부회장 리드 호프먼도 떠났다. 이베이의 관리방식은 페이팔과는 전혀 다른 방식이었다. 스티브 첸은 그중에서 가장 판이했던 것은 엔지니어의 발언권이 없어졌고 단지 위의 명령에 따라 움직여야 했다고 말한다. “나는 경영진이 개발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고 스스로 참신하고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지 못하는, 혁신 없는 조직의 모습을 이베이에서 확인했다. 그토록 에너지가 넘치고 늘 떠들썩한 재미있는 회사였던 페이팔도 이베이에 인수되고 나서는 답답한 운영 방식의 틀에 갇혀버리고 말았다.”

2005년 초에 스티브 첸은 이베이를 떠난다. 머릿속은 창업 아이디어로 가득차서 노트에 다 담아 낼 수가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에게는 노트가 여러 권 있다. 그때그때 떠오르는 아이디어나 기이하고 황당한 일을 적어 놓은 것이다. 점심시간에도 적고, 회의시간에도 적고, 잠에서 깰 때도 적고 심지어는 샤워하다가 말고 욕실을 뛰쳐나와 적기도 했다. 좋은 생각을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중에는 창업 관련 아이디어가 가장 많았다.

2005년 봄의 어느 날, 샌프란시스코의 친구 집에서 모임을 가졌다. 그런데 모임이 끝난 후 함께 찍은 동영상을 공유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일이 전달하기가 너무 귀찮았던 스티브 첸은 친구들과 직접 동영상 사이트를 만들어 보기로 했다. 그는 창업의 시작을 이렇게 말한다. “모든 성공이 소설에 등장하는 것처럼 어떤 엄청난 계기로 인해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은 아주 ‘작은 아이디어’나 ‘작은 필요’에 의해 ‘충동적’으로 시작되고 ‘지속적인 보완’과 ‘개선의 과정’을 거친다. 유튜브의 시작도 그랬다.”

유튜브, 세상을 바꾸다

창업을 위해 스티브 첸을 비롯한 채드 헐리, 자웨드 카림이 뭉쳤다. 스티브 첸은 멤버들이 마음에 들었다. 그와 자웨드는 엔지니어이므로 사이트 설립 초기에 필요한 개발 작업을 감당할 수 있고, 채드는 우수한 웹 디자이너로서 뛰어난 감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엔지니어와 디자이너의 결합은 실리콘밸리에서의 전형적인 창업 방식이었다.

창업 후 한 달이 넘는 토론 끝에 그들은 3가지에 대해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첫째, 누구나 동영상에 관심이 있다. 둘째, 사이트는 이용하기 쉬워야 한다. 셋째, 친구를 사귀는 데 도움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소셜 미디어 사이트에 이름을 붙여 주기로 했다.

‘유튜브’라는 이름은 완성되기 까지 단 하루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탄생한 유튜브는 후에 많은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다. You는 모든 사람을, Tube는 TV를 의미한다. 두 단어를 함께 놓으면 모든 사람이 시청자이자 제작자라는 뜻이 되고 더 구체적으로는 ‘당신의 동영상 플랫폼’이란 뜻을 나타낸다. 2005년 2월 14일 ‘www.youtube.com’이라는 도메인을 샀고, 2005년 4월 23일 자웨드가 유튜브에 19초짜리 첫 번째 동영상 ’동물원에서‘를 올렸다.

처음에 유튜브를 이용하는 사람은 창업자들뿐이었다. 그들은 친구들은 동원해 사이트를 홍보하고 심지어는 선물 이벤트까지 벌였지만 실제로 큰 효과는 없었다. 세 사람은 잡동사니로 가득한 차고에서 매일같이 머리를 싸맸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변화가 생겼다. 사이트의 정의를 사용자에게 맡기기로 결심했다. 사용자들의 자발적인 선택에 맡기면서 유튜브는 어느덧 콘텐츠를 생산하는 사이트가 되었다.

그러면서 2005년 6월에 하나의 결정을 내렸다. 사용자들이 다른 사이트에 유튜브의 콘텐츠를 얼마든지 퍼 나를 수 있게 한 것이다. 한동안 사람들은 유튜브의 ‘퍼 나르기’ 기능이 자살 행위라고 평가했다. 사용자들이 유튜브에 로그인하지 않고도 동영상을 감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상은 적중했다.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커뮤니티는 유튜브의 명성을 전파하는 도구가 되었고 중요한 광고 수단, 그것도 공짜 광고 수단이 되었다. 인터넷 세상에 전파되고 재생되는 동영상에 유튜브라는 마크와 링크 주소가 늘 따라 다녔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영상을 보고, 전파하고, 퍼 나르고 싶다면 유튜브로 오세요’가 회사의 모토가 되었다.

창업 초기에는 사무실을 갖는다는 것을 상상하지 못했다. 대부분의 업무는 온라인으로 처리하고 매주 3일 정도만 채드의 차고에서 만나 일처리를 했다. 창업과 더불어 스티브 첸의 생활도 완전히 달라졌다. 주말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고 낮과 밤으로 업무시간을 구분할 수 없었다. 대략 24시간 일하고 10시간 쉬는 패턴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던 중 2005년 10월, 유튜브에 투자를 결정한 세쿼이어캐피탈이 임시 사무실을 제공해 주었다.

유튜브는 독립된 품질평가 시스템을 아예 두지 않았다.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유튜브에서 테스트팀은 시간 낭비에 불과 했고, 결과물에 문제가 생겼을 때 직원 간에 책임을 떠넘기는 빌미가 될 뿐이었다. 그 결과 직원 모두가 공동의 책임의식을 가지고 새로운 아이디어가 있으면 주저 없이 말하는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었다.

2006년 10월, 유튜브는 16억 5000만 달러에 구글에 인수되었다. 당시에는 기업 구성원 모두가 매각을 찬성했다. 너무 지쳤기 때문이다. 유튜브 직원들은 매주 100시간 이상 일했다. 하루에 14시간을 일한 셈이다. 뿐만 아니라 당시 진행 중이던 아시아, 유럽 시장 진출 등 일부 프로젝트가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막강한 데이터 센타가 필요했고 더 많은 대역망과 서버가 필요했다. 그래서 대기업의 도움이 절실했다.

유튜브, 구글과 함께 가다

스티브 첸은 자서전에서 구글에서 일하게 될 줄 정말 몰랐다고 고백한다. “내 대학 성적으로는 전혀 가망 없는 일이었다. ‘구글맨’들은 대부분 하버드, 스탠퍼드, MIT, 카네기멜론 출신으로 박사 또는 석사 학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에 반해 ‘유튜브맨’들은 대학 중퇴자가 대다수다. 우리는 구글에서 새삼 인생의 행운을 만끽했다.”

그는 언론이 구글이 유튜브를 인수한 일을 ‘바가지를 썼다’고 표현한 것에 억울해하며 이렇게 표현한다. “왜 그들은 모르는 걸까? 유튜브가 구글에 인수합병 될 때 기술 책임자가 4명밖에 되지 않았다는 걸! 그 4명이 세계에서 트래픽이 가장 많은 사이트를 구축하고 유지했다는 걸! 뿐만 아니라 직원이 80명도 안 되는 소기업이고 대부분 중퇴생들이지만 고학력자로 이루어진 구글 동영상팀을 제압했다는 걸!”

유튜브의 무대가 세계로 확장되면서 더 많은 사용자들이 몰려들었다. 2010년 5월에는 일일 검색 횟수가 20억 회를 넘어섰다. 유튜브의 하루 동영상 검색량은 미국 3대 방송국 서비스 분량을 모두 합친 것과 맞먹게 되었다.

승승장구하던 유튜브에 어느날 인상 깊은 동영상이 올라왔다. 스티브 첸의 당시를 이렇게 소회한다. “어떤 회의에서 연사로 나선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가 유튜브를 이용해 자신을 검색하는 법을 설명하는 모습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돈이 많은 사람이 내가 만든 서비스로 자신을 검색하고 있었다.”

구글을 떠나 자신의 길을 가다

2007년 스티브 첸은 뇌종양 판정을 받았다. 병명은 ‘혈전성 거대 동맥류’. 그를 더욱 힘들게 한 것은 이 불행이 가장 명예로울 때, 유튜브의 창업자로 영웅처럼 추앙받던 그때에 일어났다는 점이다. 그는 이때를 ‘마치 무대로 올라가서 손을 뻗어 우승컵을 받으려는 순간 발을 헛디뎌 떨어지는 느낌이었다’고 말한다.

뇌종양 수술이 끝나고 꽤 오랜 시간을 쉬었다. 그는 병마와 휴식이 자신을 일깨워주었다고 말한다. 이후 죽음의 위협에서 벗어 날 수 없다면 가장 좋아하는 일을 그리고 내 마음을 위해 살아야겠다고 다짐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 뭐지? 골프? 테니스? 아니다! 그렇다면 구글의 높은 연봉과 휴가? 그것도 아니었다. 만약 대기업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면 떠나는 게 맞다. 내가 가장 하고 싶어 하는 일이 창업이라면 실리콘밸리로 가서 다시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 맞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이 한순간에 사라져버릴 수 있다는 걸 알았는데, 왜 하고 싶은 일을 하지 않아 후회를 남기겠는가?”

2008년 1월 유튜브코리아가 설립되었다. 그해 스티브 첸은 한국을 방문한다. 당시 구글코리아에서 한국을 가장 잘 아는 직원을 보내 마중했는데, 그녀가 박지현 이었고 일 년 간의 열애 끝에 스티브 첸의 아내가 되었다.

스티브 첸은 3년간의 구글 생활을 마치고 떠났다. 그리고 다시 실리콘밸리 외곽의 작은 사무실에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다. 새로운 회사 이름은 ‘아보스(AVOS)’이다. “조용한 숲에서 길을 잃었는데 눈앞에 두 갈래의 길이 있다. 하나는 자동차 바퀴 자국이 많은 큰 길이고 또 하나는 잡초가 무성한 오솔길이다. 나는 분명 한참을 바라보고 고민한 후 오솔길을 택할 것이다. 결과를 예측할 수 있는 길은 무료하기 짝이 없기 때문이다.”

유튜브의 창업에서 배워야 할 것

유튜브의 창업과정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 첫째, 창업에는 의기투합하는 파트너가 필요하다. 둘째, 창업이란 유튜브가 2005년 ‘동영상 공유’라는 새로운 개념을 만든 것처럼 정확한 때에 정확한 일을 하는 것이다. 셋째, 창업은 초기의 아이디어로 바로 큰 성과를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유튜브 역시 소셜 네트워크 등 다양한 방식을 시도한 후에야 진정한 사용자들의 수요를 파악할 수 있었다. 넷째, 새로운 상품을 개발할 때는 그에 대한 애착과 기술혁신에 대한 열정이 필요하다. 다섯째, 소수의 창업 멤버가 대기업을 능가할 수 있다. 유튜브가 구글의 동영상팀을 제압했듯이 말이다. 여섯째, 창업 멤버 간의 지분 등 이해관계가 명확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쉽게 분쟁과 소송에 휘말릴 수 있다.

성공을 갈망하는 모든 창업자들에게 스티브 첸의 성공 스토리가 주는 가장 큰 교훈은 ‘마음 가는 대로 정신’일 것이다.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일을 할 때 비로소 성공할 수 있다. “인생을 살면서 아무리 크고 중요한 결정도 모두 3일 안에 해치웠어요. 대학교 자퇴를 결정하는 데 15분, 집을 구입하는 데 하루, 결혼을 결심하는 데 3일이 걸렸어요.” “상관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