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감기의 끝은 어디일까? 지난번 소백산행 때 감기로 고생했다. 잦아드는가 싶더니 또다시 감기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이른 새벽, 알람소리에 찌뿌둥한 몸을 일으켰다. 밤새 쿨럭거리느라 잠을 설쳤다. 하나, 감기 따위가 산행을 막아 설 순 없다. 목감기에 좋다는 생강차를 끓여 챙겼다. 목덜미를 두툼하게 감싸고 집문을 나섰다. 매섭던 한파는 한풀 꺾인 듯 하나 대신 미세먼지가 '나쁨'이다.
동문산악회 밴드에 2월 둘째주 정기산행 공지를 들여다 보는 순간, 설산의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다. 바로 호시탐탐 엿보던 인제 방태산이었기 때문이다.

11년 전 이맘 때다. 눈보라를 헤치며 러쎌산행을 감행하다가 방태산 정상, 주억봉(1,436m)을 불과 400m 앞에다 두고... 원근과 고저를 분간키 어려울만치 거센 눈보라에 체력은 바닥나 아쉽게도 발길을 돌려야 했던 곳이다. 채우지 못한 그 400m는 늘 숙제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이를 어쩌나? 40인승 대형버스에 달랑 여덟명이 전부다. 어이없긴 운전기사도 마찬가지인 듯 헛웃음으로 뻘쭘함을 대신한다. 산악모임을 꾸려가는 동문 후배들의 표정은 의외로 느긋하다.

"날 따스해지면 채워지겠지요 뭐"

2석 1인에 배낭도 1석씩 차지한, 그야말로 '황제골프'에 버금가는 '황제산행' 수준이다.
버스안에서 연신 쿨럭이느라 보온통에 가득 담아온 생강차를 거의 비워 버렸으니 방광이 꽉 차 오를 수밖에. 가평휴게소에서 들러 시원하게 반납하고 다시 차에 올랐다. 희뿌옇게 습기 찬 차창을 손가락으로 스윽 문질러 밖을 살핀다.
어느새 버스는 첩첩산중 속으로 빠져들었다.

 

10시경 방태산휴양림 매표소 앞에서 멈춰섰다. 관리원이 통제구간을 알리며 탐방이 허용된 구간만 이용하도록 당부했다. 몇명이냐고도 물었다. 여덟명이라고 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쳐다봤다. 하기야 대형버스에 여덟명이라니 믿기 힘들만도 하다. 동절기에 길이 얼어 있어 대형버스는 여기서 더 들어갈 수 없단다.
버스에서 내린 여덟명은 매표소를 통과해 산림휴양관까지 걸었다. 얼음장 밑 물소리를 들으며 적가리골을 거슬러 오른다. 오른쪽 정자 아래 2단폭포인 이폭, 저폭을 내려다 보며 조금 더 나아가니 도로끝 공터다. 본격 산행 시작은 여기서 부터다.

여기서 조금 더 올라가면 계곡 중간 갈림길이 나온다. 왼쪽으로 구룡덕봉, 오른쪽으로 오르면 방태산의 주봉인 주걱봉이다. 오른쪽 주걱봉 방향으로 올랐다 되돌아 오는 코스만 열려 있다. 이곳 갈림길에서 매봉령을 거쳐 구룡덕봉 능선길은 통제구간이다. 갈림길에 서서 잠시 갈등했다. 결국 다수가 원해 통제구간인 매봉령 오름길로 들어서긴 했으나 개운치 않다.  산객이라곤 우리 일행이 전부다. 산 전체를 통째로 전세낸 느낌이다.

완만하던 눈길은 계곡을 가로질러 놓은 나무 다리 두어개를 지나자 가팔라졌다. 이따금 지나는 골바람 소리가 심상치 않다. 구름 드리운 날씨에 미세먼지까지 더해 흐릿하고 텁텁하다. 등로는 심설에 갇혀 가늠할 수가 없다. 앞선 산객의 족적만 믿고 오른다. 헛 디뎌 자빠지고, 제대로 디뎌도 미끄러지고, 허벅지까지 빠지는 심설산행, 저질 체력을 실감하며 힘겹게 가파른 설사면을 올라 구룡덕봉을 1.5km 앞둔 매봉령에 닿았다.
후미 일행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세찬 골바람이 몰아치는 매봉령에서 걸음을 멈췄다. 한기가 목덜미를 파고 든다.
방태산 일대는 동해안 기류와 편서풍 기류가 만나는 곳이어서 눈비바람을 예측할 수 없을만큼 일기가 변화무쌍한 곳이다.

매봉령에서 구룡덕봉까지 능선길은  오르내림이 크지 않다. 조금 전 힘겹게 올라 붙던 설사면에 비하면  꽃길일 것이라 생각했다.  웬걸! 모래언덕을 오르는 게 이러할까?
잘 뭉쳐지지 않는 가루눈이 수북한 등로는 한 발자국 내딛는게 고행이다. 의지대로 걸음을 뗄 수 없으니 시간은 마냥 지체되고, 체력은 금세 바닥이다.

'집 나오면 개고생'이란 만고의 진리를 곱씹으며 걸음을 떼다보니 보상이라도 하듯 눈앞에 판타지 세상이 펼쳐졌다. 겨울 꽃 은빛 상고대다.

상고대가 병풍처럼 펼쳐진 구룡덕봉을 700m 앞둔 너른 눈밭에 자리를 폈다. 동화 속 겨울나라에서 현실 속 허기를 달래기 위해서다.

간간이 햇살이 비치긴해도 목덜미를 파고드는 한기는 어찌할 수 없다.
간편 행동식을 나눈뒤 서둘러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키작은 관목들 사이로 난 하얀 임도를 따라 구룡덕봉(1,388m),에 닿았다. 군시설물이 올라앉은 山頂은 바람에 눈이 날려 황량하고 을씨년스럽다.

 

매봉령에서 구룡덕봉, 주억봉에 이르는 방태산의 긴 능선은  거친 근육질의 강원 산군을 호령하듯 위엄 있다.

 

저멀리 희끗한 주억봉이 만만하게 눈에 들어왔다. 멀리서 보기에 주걱처럼 생겼다 하여 이름 붙여진 주억봉이다. 이곳 구룡덕봉에서 주억봉까지는 40여분이면 너끈한 거리다. 물론 눈이 없을 경우다.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엄청난 눈을 헤쳐 나가야 한다. 절대로 만만한 거리가 아니다.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을 길로 또 들어섰다.

 

내남없이 체력이 급격히 떨어져 숨소리가 거칠다. 눈에 무릎 이상 빠질 때는 평시보다 두세 배의 시간과 체력이 소모된다. 젖먹던 힘까지 끄집어냈다. 겨울 설산은 바라보기엔 환상적인 그림이지만 직접 발품을 팔라치면 고난의 행군이다. 실은 그 맛에 심설산행에 나서지만 말이다.
허벅지까지 푹푹 빠지는 눈길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교대로 러셀해가며 정말 사력을 다해 걸어 주억봉을 0.5km 앞둔 갈림길에 이르렀다. 러쎌에 지친 일행은 주억봉으로 곧장 진행하느냐, 아니면 우측 하산길로 내려서느냐, 고심 끝에 하산하기로 입을 맞췄다.

11년 전인 2007년 겨울에도 바로 이곳에서 엄청난 폭설을 만나 오늘처럼 발길을 돌렸던 쓰린 기억이 있다. 또한번 소생의 덕이 부족함을 자인하고 주억봉은 다시 숙제로 남겨 뒀다.

하산길에 맞닥뜨린 목계단은 겨우내 쌓인 눈에 묻혀 아찔한 눈썰매장으로 변해 있었다. 심설산행의 보너스는  엉덩이 썰매다. 뒤로 자빠진 채 눈비탈을 쏜살같이 미끄러져 내리는 재미가 상상 그 이상이다. 혹 요즘 겨울올림픽 경기 종목 중  ‘루지’가 우리의 엉덩이썰매를 밴치마킹한 건 아닌지.
엉덩이썰매에 푹 꽂혀 눈비탈만 만나면 드러누운게 화근이었다. 눈 밑에 감춰진 돌부리에 꼬리뼈가 걸려 나동그라지고 만 것.

지나치면 아니함만 못하다 했던가, 그 후유증으로 지금껏 꼬리뼈가 얼얼하니 이거야 원~

그렇게 16.2km를 느릿느릿 8시간 넘게 걸어 해가 서산에 걸릴 즈음, 방태산 자연휴양림 매표소로 원점회귀했다.

 

100대 명산(산림청 선정)에 속한 인제 방태산은 구룡덕봉(1,388m), 주억봉(1,444m) 등 고산준봉을 거느리고 있다. 한국에서 가장 큰 자연림이라고 할 정도로 수림이 울창하고, 희귀식물이 많은 생태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특히 산꾼들 사이에서 심설산행의 최적지로 각광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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