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대 통신장비업체인 에릭슨, 유럽최대의 가전업체인 일렉트로룩스, 발전설비 부문 세계 3대 업체인 ABB, 대형트럭의 롤스로이스 스카니아, 하이테크 전투기의 강자 사브, 단일약품 최대 판매량을 자랑하는 아스트라제네카.  




세계 경제를 주도하는 이들 기업을 이끌고 있는 곳이 스웨덴 국내총생산의 30%를 점유하고, 스톡홀름증권거래소 시가총액의 40%를 차지하는 ‘유럽 최대의 산업왕국’ 발렌베리 가문이다. 발렌베리(Wallenberg)는 세계 1등 기업 5개를 포함하여 항공, 산업공구, 제지, 베어링, 금융, 의료기 등 산업 각 분야에서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는 14개의 핵심 자회사를 이끌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표면적인 기업규모나 경쟁력보다 더욱 발렌베리를 돋보이게 하는 것은 바로 투명성과 사회공헌을 강조하는 그들의 경영철학이다. 또한 이것이 발렌베리가 150년 동안 5세대에 걸쳐 소위 세습경영을 펼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적 지지와 사회적인 존경을 불러일으키게 만든 원동력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발렌베리는 ‘선장이 우선, 배는 나중’이라는 경영철학 하에 능력 있는 전문경영인으로 하여금 대부분의 소유 기업들의 경영권을 일임하고 있으면서도, 기업에 대한 장기적인 책임은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적극적 오너십’을 실행해 나가고 있다. 이처럼 발렌베리는 그 표면적인 규모뿐만 아니라 경영철학, 기업가 정신, 사회공헌에 이르기까지 우리 경제계에 신선한 화두를 던져주기에 충분하다.




사실 발렌베리는 최근까지 국내에 그리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런데 지난 2003년 여름, 삼성의 이건희 회장이 유럽순방 중 스웨덴으로 날아가 발렌베리의 모기업인 인베스터를 방문하면서부터 국내 언론의 집중적인 주목을 받게 되었다. 안정적인 경영후계구도와 기업의 소유 지배구조를 고민하던 삼성의 입장으로서는, 순조롭게 5세대 경영을 이어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직접 경영권을 행사하지 않으면서도 14개에 이르는 핵심 자회사들을 성공적으로 이끌고 있는 발렌베리를 주목하게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우리나라의 재벌그룹과 발렌베리의 가장 큰 차이는 발렌베리는 기업도 그룹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실제로 발레베리가 소유한 기업 어디에도 ‘발렌베리’라는 단어를 찾아볼 수 없으며, 통일된 상징물도 없다. 이는 발렌베리가 철저하게 자회사들의 독립경영원칙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소유지배구조상의 차이가 있다. 발렌베리의 소유기업은 우리의 재벌그룹처럼 복잡한 출자지분으로 얽혀있지 않다. 물론 이들에게도 주식상의 의결권 차이를 둔 ‘차등의결권주’라는 강력한 무기가 있긴 하지만, 이는 순환출자처럼 그룹전체를 공동운명체로 만드는 구조가 아닌 개별 기업 차원에서만 영향을 미친다는 차이가 있다. 더구나 발렌베리 사람들이 모든 자회사들의 1대주주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발렌베리 사람들은 뛰어난 경영역량과 리더십을 통해 지분을 뛰어넘는 경영권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회환원에 관한 차이가 있다. 발렌베리의 경우 소유기업들이 거둔 성과가 최대주주인 인베스터를 거쳐 최종적으로 발렌베리 재단으로 모이게 되어 있다. 스웨덴의 다른 재벌기업들이 무거운 세금을 피해 스위스 등지로 빠져나가는 동안 발렌베리는 노벨재단보다 훨씬 큰 규모의 공익재단을 만들어 스웨덴의 첨단 과학, 기술발전을 위해 사용함으로써 경영성과가 자연스럽게 사회 전체로 환원되는 구조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우리의 경우 여러 가지 사회공헌 활동을 벌이고는 있지만, 적극적인 사회환원이 아닌 부수적인 활동에 그치고 있다.




발렌베리에게 소유권은 특권이 아니라 책임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들은 가문의 부를 선물로 여겼으며, 잘 키우고 가꾸는 것이 임무라고 생각했다. 가문의 규율에 따라 자녀를 최고경영자 자리에 앉히기 전에 부모 도움 없이 명문대를 졸업해야 하고, 단신의 해외유학과 해군장교 복무를 의무사항으로 삼았다. 그리고 현재 발렌베리의 지주회사 인베스터의 회장을 맡고 있는 야콥 발렌베리 역시 매일 12시간 이상 일을 한다. 더 열심히 일하고, 누구보다 잘 해내는 것이 발렌베리 가문의 엄청난 부와 영향력에 대한 사회적 적대감을 극복하는 길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소수의 오너, 충성스런 전문경영인 그룹, 다양한 업종에 진출한 자회사들로 구성되는 발렌베리 가문의 외형은 우리나라의 재벌과 크게 다르지 않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발렌베리는 산업과 금융을 각각 나누어 맡는 두 명의 후계자를 둠으로써 최상층부에서부터 ‘견제와 균형’의 원리를 도입했으며, 실권을 가진 전문경영인 그룹과 효율적으로 운영되는 이사회를 통해 소유기업들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왔다. 또한 발렌베리는 소유기업의 경영성과를 사유화하는 대신 공익재단을 통해 사회에 환원함으로써 스웨덴 사회에 단단하게 뿌리내릴 수 있었다.




발렌베리 가문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은 사업가가 아니라 2차 대전 때 외교관을 지낸 라울 발렌베리 이다. 그는 수천명에 이르는 유태인의 목숨을 구했지만, 종전 직전에 실종되고 만다. ‘발렌베리:실종된 영웅’의 저자인 카티 마톤은 그의 저서에서 발렌베리 가문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스웨덴에서 발렌베리는 자본주의, 힘, 봉사의 동의어이다. 그들이 부를 일구기 위해 걸었던 길은 결코 공개되지 않았다. 발렌베리는 그런 이야기들을 그냥 조용히 묻어 두고 싶어 했으며, 5세대를 내려오는 동안 ’존재하지만 드러내지 않는다‘라는 가문의 모토를 결코 잊은 적이 없다.'

 

우리나라에서도 백년의 역사가 넘는 기업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제는 기업의 본질과 존재이유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성찰해볼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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