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이원규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천왕봉 일출을 보러 오시라
삼대째 내리 적선한 사람만 볼 수 있으니
아무나 오시지 마시고
노고단 구름바다에 빠지려면
원추리 꽃무리에 흑심을 품지 않는
이슬의 눈으로 오시라

행여 반야봉 저녁노을을 품으려면
여인의 둔부를 스치는 유장한 바람으로 오고
피아골의 단풍을 만나려면
먼저 온 몸이 달아오른 절정으로 오시라

굳이 지리산에 오려거든
불일폭포의 물 방망이를 맞으러
벌 받은 아이처럼 등짝 시퍼렇게 오고
벽소령의 눈 시린 달빛을 받으려면
뼈마저 부스러지는 회한으로 오시라

그래도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세석평전의 철쭉꽃 길을 따라
온 몸 불사르는 혁명의 이름으로 오고
최후의 처녀림 칠선계곡에는
아무 죄도 없는 나무꾼으로만 오시라

진실로 진실로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섬진강 푸른 산 그림자 속으로
백사장의 모래알처럼 겸허하게 오고
연화봉의 벼랑과 고사목을 보려면
툭하면 자살을 꿈꾸는 이만 반성하러 오시라

그러나 굳이 지리산에 오고 싶다면
언제 어느 곳이든 아무렇게나 오시라
그대는 나날이 변덕스럽지만
지리산은 변하면서도 언제나 첫 마음이니
행여 견딜 만하다면 제발 오지 마시라

- 시집『옛 애인의 집』(솔, 2003)

나야말로 도저히 '견딜 만하지 못해' 당신을 찾았습니다. 고백하건대 평생 적선의 덕을 쌓은 바 없고 꽃무리에 흑심 품지 않는 이슬의 근처에도 가본 적 없습니다. '유장한 바람'은 언감생심이며 '죄 없는 나무꾼'과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습니다. 겸허한 삶이나 반성과도 거리가 멉니다. 툭하면 '첫 마음'을 놓치는 변덕쟁이일 뿐입니다. 그런 내가 이제 더 이상은 '견딜 만하지' 못합니다. 한반도를 내려다보고 있는 민족의 어머니, 지리산이시여! 당신의 하늘길에 올라 혼줄 내려놓고 비옵니다. 목숨을 담보로 한 비즈니스와 게걸스런 탐욕의 카르텔이 수장시킨 영혼들 앞에서 대성통곡하지 않는 내 몰양심과 몰염치를 꾸짖어 주십시오. '어둠을 은폐하는 어둠'의 가공스런 작태에 길들여진 이 비겁한 타성을 부디 용서하지 말아 주십시오. 참혹함에 기가 막히고 비열함에 숨이 막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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