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 ‘칠거지악’은 남편이 아내를 정당하게 내쫓을 수 있는 7가지 근거 사항을 말합니다. 시부모를 잘 모시지 않음, 아들을 못 낳음, 간통, 질투, 나쁜 질병, 말이 많음, 도둑질이 여기 해당되지요. 설사 그렇더라도 아내를 내칠 수 없는 경우가 있었는데요. ‘삼불거(三不去)’라 해서, 여자가 갈 곳이 없다거나 함께 부모의 3년상(喪)을 치른 경우, 전에 가난했으나 혼인한 후 부자가 됐을 때가 적용 대상입니다. 여자는 시집가기 전에는 아버지를 따르고 결혼 후에는 남편을 따르고 남편이 죽은 후에는 아들을 따라야 한다는 ‘삼종지도’라는 규범도 있었지요.

당시 양반이 이혼하려면 임금의 허락을 받아야 했지만 평민은 쉽게 이혼을 할 수 있었다지요. 당사자끼리 합의한 후 그 표시로 저고리 섶(저고리 깃 아래에 달린 길쭉한 헝겊)을 잘라 주고받으면 끝났다고 합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고려 시대에도 이혼과 재혼이 자유로웠다고 하네요. 중국 송나라 사람 서긍이 쓴 ‘고려도경’에 ‘고려인들은 쉽게 결혼하고 쉽게 헤어진다’고 씌어 있다고 합니다. 우리 선조들은 어떤 스타일의 이성에게 매력을 느끼고 사랑을 나누었을까요.

여자를 바라보는 눈은 시대의 변천과 함께합니다. 현대의 얼짱 선호는 ‘정착’ 농업사회에서 ‘이동’ 도시사회로 바뀌면서 의식도 변화한 것이라 할 수 있는데요. 동서양을 막론하고 ‘예쁜 얼굴’에 부정적이었던 역사가 꽤 깁니다. 그리스 신화나 한국 괴담은 여우, 뱀 등의 요괴들이 사람으로 둔갑하면 모두 미녀가 되게끔 설정해 놓았습니다. 대신 옛 사람들은 성역 없는 에로티시즘에 몰두(?)함으로써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내고 당대 권력과 체제를 풍자했지요. ‘얼굴 예쁜 것보다 마음 예쁜 것이 더 예쁘고, 마음 예쁜 것보다 이불 속에서 예쁜 것이 더 예쁘다’는 우리 속담이 이를 증명합니다. ‘조개는 잡아 젓 들이고 가는 임 잡아 情(정) 들이자’는 내용의 민요는 꾸밈없는 성정(性情)을 고도의 비유로 노래한 솜씨가 일품입니다.

# 남쪽 나라에 역장군이라 불리는 족속은 외눈에다 몸체가 길었다. 역장군은 북쪽 나라 호지국과 잘 지냈는데, 호지국이 하루아침에 반역을 꾀하자 크게 화를 내며 치고자 했다. 그러자 좌우에서 역장군을 모시던 낭관들이 간했다. “호지국은 매우 멀 뿐만 아니라 외부가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쉽게 공격할 수 없습니다.” 역장군은 머리를 흔들며 들은 척도 않고 두 낭관을 거느리고 호지국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이내 큰 못 가운데에 빠져 하얀 피를 토하며 죽고 말았다.
- ‘역장군전’

조선 시대 패담(성 이야기)들 속에는 낯 뜨거울 만큼 진하면서도 배꼽을 잡게 만드는 해학, 삶의 애환과 깊은 슾픔이 함께 숨쉬고 있습니다.



# 어떤 고을 원(員)의 건망증은 비할 데가 없었다. 좌수의 성을 묻고는 다음 날 바로 잊어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다시 좌수에게 성을 물었다. “홍가입니다.” 고을 원은 매번 좌수의 성을 잊어버리는 것이 민망하여 홍합 하나를 그려 벽에 붙여두었다. 다음 날 좌수가 들어왔는데 또 성을 잊어버렸다. 벽에 붙어 있는 홍합 그림을 보았지만 그것이 홍합인지 아닌지조차 생각이 안 났다. 다시 그림을 유심히 보니 그 모양이 꼭 여자의 음문과 비슷했다. 그래서 좌수에게 물었다. “당신의 성이 보가지?” 했더니, 보가가 아니라 홍가라는 답이 돌아왔다. 이에 고을 원은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 그렇구나! 내가 홍합을 그려놓고도 또 그것을 잊고 말았네그려.” 이 말을 들은 사람들 모두 포복절도하더라.
- ‘고을 원은 건망증이 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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