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한 권의 책이 집으로 배달돼 왔습니다. 보낸 이는 이종섶 시인. 부드러우면서도 예리한 눈매를 가진 ‘바람의 시인’이지요. 우편함 뚜껑을 밀치고 입을 삐죽 내민 봉투 속에는 시집 ‘물결무늬 손뼈 화석’(푸른사상)과 함께 ‘기쁜 마음으로 드립니다’라는 인사말이 담겨 있었습니다. 활자의 잉크가 채 마르지 않은 신간을 접하면 언제나 그렇듯,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표지를 넘겼습니다.

바람의 식사법

바람은 흔들리는 것들만 먹고 산다
흔들리지 않으면 죽은 것이라는 감별법에 따라
무엇을 만나든 먼저 흔들어야 직성이 풀린다
끼니때마다 바람의 식탁을 차려야 하는 나무는
잎사귀의 흔들림까지 바쳐야 하는 삶이 괴로워
바람도 불지 않고 흔들림도 없는 어두운 땅속에서
어린 뿌리들의 두 손을 꼭 잡고
아무도 보지 않는 곳으로 떠나라고 재촉한다
가느다란 가지 하나 바람결에 흔들리기라도 하면
탈출 계획을 들켜버린 듯 화들짝 놀라는 나무
아무 일 없다는 표정을 간신히 지을 수 있지만
땅속에서는 시커먼 흙을 움켜쥔 뿌리들이
놀란 가슴 쓸어내리며 서럽게 울고 있다
입맛을 더욱 돋궈주는 그 소리는
나무 하나 붙잡고 통째로 뜯어먹는 바람의 양념
뼈만 앙상한 나무에 다시 푸른 살이 오를 때까지
기나긴 허기를 달래줄 맑고 차가운 독을 품는다
뾰족한 잎사귀나 딱딱한 잔가지들까지
모조리 핥아 먹어버리는 바람의 습성 앞에
발이 묶여 있는 나무들이 벌벌 떤다
바람은 흔들림을 먹고 사는 짐승
흰 이빨에 맹독을 키우며 나무를 사육한다
바람의 아가리에 물리면 약도 없어
봄가을로 빨갛게 부어올랐다 가라앉는 자국들
푸른 멍이나 이빨 자국을 남기며 아문다

눈밭

하늘이 쓴 시를 받아 만든 시집 한 권

아이들은 눈사람이라는 시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첫눈이라는 시를 좋아한다

눈이 많이 내리면 재판 삼판을 찍지만

초판만 겨우 찍고 사라지기도 하는 겨울

순수하고 깨끗한 시집은 인기가 좋아

보는 이 마음에 생생한 여운을 남긴다

글만 알면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눈 비비며 읽어도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탄성을 지르게 한다

보면 볼수록 눈까지 맑고 시원해져

한 자 한 자 읽을 때마다 들려오는

뽀드득 뽀드득 소리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 소리가 좋아

평생 곁에 두고 애송하며 잠들고 싶은 밤

읽는 사람 누구나 시인이 된다

시인의 가슴에는 언제나 눈이 내린다

60편의 수록 작품들은 아침 동창(東窓)으로 보이는 초록의 산처럼, 찬 샘물로 방금 담근 오이 냉국처럼 청량하고요. 순수하고 깨끗한 서정의 무늬가 눈이 부실 정도로 투명하네요. 일상의 언어를 낯설게 빚어내는 정화 능력이 일품입니다. 독자로 하여금 ‘언어가 숨쉬는 순간’을 체험하게 한다고나 할까요. 시인은 인간의 온기를 느낄 수 있는 깊은 속내와 따뜻한 시선도 지니고 있습니다.



복수(腹水)

여든이 넘은 어머니의 마른 골짜기에
보일 듯 말 듯 물이 나는가 싶더니
어느새 탱탱하게 부풀어 오르는 저수지
경작할 논밭이 없어서일까.
고무호스를 꽂아 모터를 돌리는데도
물은 아주 조금씩 빠져나갈 뿐
완강한 고집을 버리지 않고 있다
침대 밑에서 물을 받아내는 비닐봉지
병실 천장만 하염없이 바라보는 노파 대신
온몸에 누런 물을 채워 빵빵해지고 싶은 것인데
마른 논에 물 들어오는 기색이 없어
혀만 바짝바짝 타들어간다
자식들에게 평생 못물을 대주느라
있는 물 없는 물 끌어대기 바빴던 노모
팔다리에 남아 있는 수로마다
물살이 세차게 흘러간 흔적들
눈물은 차마 저 길을 가지 못했을 것이다
봉우리 아래 산허리 휘감을 듯
안간힘을 다하고 있은 물의 기운
아무리 빼내도 마르지 않는다는 것을
늦게나마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
마지막 숨 몰아쉬는 저수지 수면 위
퍼런 실핏줄에 매달려 있는 파랑(波浪) 하나
젖은 날개 파닥거리며 눈을 감는다

맹문재 시인은 이 시집을 읽고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종섶 시인의 작품들에는 바람처럼 움직이는 비유들로 가득하다. 시인의 비유들은 무게나 크기나 생김새나 인상이나 기분이나 방향 등을 규정할 수 없는 바람처럼 무한하게 변주해 가을 들판에서 책장까지, 감나무에서 양로원까지, 한 켤레의 신발에서 장수하늘소까지, 줄기에서 자라나는 오이에서 공중그네 곡예단까지, 파도에서 목수까지, 하늘에서 눈밭까지 이르고 있다. 그 속에서 구름이 땅으로 내려오고, 눈물이 깊고 동그란 집을 짓고, 나사못이 젖을 빨고 싶어 오물거리고, 느티나무가 그리움을 달래며 장기를 두고, 시래기가 그늘 농사를 짓고, 가지에 매달린 홍시가 자식을 기다리고, 가로수가 새벽마다 잔기침을 하고, 장화가 댓돌 위에서 두 귀를 세워 바람 소리를 듣고, 바람이 풀과 꽃과 나무들에게 이메일을 보낸다.

그리하여 시인의 비유들은 역동적이면서도 뿌리가 든든하고 눈길이 깊고 손길이 따뜻하다. 꼽추를 산(山)사람이라고 여기면서 ‘평생 정복하지 못할 산밑에서 오래도록’(꼽추) 울고, 손을 봐야 할 피아노 앞에서 ‘가슴이 아프다며 앓는 소리를’(피아노) 듣고, 절대 강자가 없는 무림의 세계에서 목숨을 잃을 수밖에 없는 고드름을 바라보며 ‘오늘도 벼랑 끝에서 죽어나가는 사람들’(고드름)을 떠올린다. 늙고 외롭고 슬프고 아프고 가시가 많은 존재들을 적극적으로 끌어안는 시인의 비유들은 이 세계의 본질이며 이치며 우리가 지향해야 할 인간 가치를 자각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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