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고 싶은 자
떠나게 하고
잠들고 싶은 자
잠들게 하고
그러고도 남는 시간은
침묵할 것. 

또는 꽃에 대하여
또는 하늘에 대하여
또는 무덤에 대하여

서둘지 말 것
침묵할 것.

- 강은교 ‘사랑법’ 부분

이타적 사랑은 유난을 떨지 않습니다. 섣불리 그리움과 외로움을 토해내는 법이 없습니다. 솔직하되 가볍지 않고 당당하되 옥타브를 낮출 줄 압니다. 떠나고 싶은 자를 자유롭게 떠나게 하라는 이 현명한(?) 연시는 아예 한 술 더 떠 ‘침묵’을 권유합니다. 비록 사랑은 떠났어도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다보면 ‘가장 큰 사랑이 등 뒤에 있다’는 성찰에 이르게 된다고요. 성숙해진 그대가 자유인이 된다고요. 일본 영상 언어의 마술사들이 직조한 ‘서두르지 않아서 아름다운 사랑법’을 들여다봅니다.

# 지금, 만나러 갑니다 (Be With You, 2005)

‘비의 계절에 찾아온, 죽은 아내와의 6주간의 기적’

1년 후 비의 계절에 돌아온다는 약속을 남기고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에겐 초등학교 1학년 아들과 젊은 남편이 있습니다. 비오는 어느 날, 아이와 함께 숲에서 산보를 하던 남편 앞에 거짓말처럼 아내가 나타납니다. 모든 기억을 상실한 채로. 부부는 자연스럽게 두 번째의 사랑을 맺어가고 아이 역시 엄마를 다시 만나게 돼 큰 기쁨을 느끼는데요. 하지만 여인은 비의 계절이 끝나는 6주 뒤에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습니다.

러브 스토리에 관한 한 유독 강한 자부심을 가진 도이 노부히로 감독의 대표작입니다. 멜로물 연출의 고정 관념을 깨고 ‘환타지 멜로’라는 색다른 맛의 감성을 선사하지요. 꿈속에서나 나올 법한 동화적 이야기를 현실적 영상에 가미시켜 극적 슬픔을 배가시켰습니다. 부부로 나오는 두 주인공 타케우치 유코와 나카무라 시도의 연기가 찰떡궁합인데요. 영화 속 두 사람의 완성도 높은 호흡이 실제 결혼으로 이어진 운명적 작품이기도 합니다. 비록 오래 가지는 않았지만.

현재의 하루하루를 감사해 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세 식구. 그러던 중 아내는 예전에 숨겨 두었던 타임 캡슐 안에서 자신이 고교 시절부터 써왔던 일기장을 발견합니다. 페이지를 넘기면서 큰 충격을 받는데요. 장맛비가 그침과 동시에 다시 이들과 헤어져야 한다는 믿고 싶지 않은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지요. 눈물도 잠시, 이제 남은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다음 날부터 그녀는 어린 아들에게 계란 프라이 만드는 법, 빨래 말리는 법 등을 가르치고요. 자기가 떠난 이후 매년 아이 생일때 배달되게끔 케이크를 주문 예약합니다.    

아내 역의 타케우치 유코는 1980년생으로 토끼처럼 맑은 눈과 새하얗고 가지런한 치아가 인상적입니다. 함박 웃음이 대단히 아름답지요. 카메라의 앵글이 조금만 바뀌어도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천변만화의 표정을 지녔습니다. 이 영화에서도 미소녀와 귀부인이 공존하는 얼굴을 선보이는데요. 실제 성격도 ‘장난기가 심하고 술을 마시면 우는 버릇이 있다’는 서글서글한 타입이고요. 스트레스를 받을 때면 수건을 말아 입에 물고 소리를 지른다거나 ‘다시 태어난다면 남자가 되고 싶다’는 농담도 곧잘 한다는군요. 갑자기 어떤 일이 하고 싶어지면 그 자리에서 바로 실천해버리는 근성 있는 배우입니다.

마침내 장마가 끝나고 아내는 다시 떠납니다. 허탈해진 남편은 그녀가 남긴 다이어리를 읽게 되는데요. 그 역시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됩니다. 과거 연애 시절, 교통 사고로 잠시 정신을 잃었던 그녀가 자신의 9년 후를 미리 경험했다는 내용이지요. 그 9년 후가 바로 지금 남편이 살고 있는 시간-아내의 죽음과 환생, 재이별을 포함한-이라는 겁니다. 관점을 바꿔보면, 처녀 시절의 아내는 그 남자를 만나면 자신이 9년 후 죽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지만 진정한 사랑과 행복을 위해 모든 것을 각오하고 결혼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순애보에서 자연의 질서는 사랑만큼이나 확고 부동하고 위대한 섭리입니다. 때문에 이러한 드라마에서 날씨와 계절, 풍경은 소품이 아니라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하지요. 눈과 비, 안개와 태풍, 호수와 바다는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웃고 흐느낍니다. 그녀가 돌아오고 다시 떠난 호젓한 숲도 마냥 신비롭기만 합니다.

시간 여행을 통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죽음을 인지하면서도 그 사랑을 선택한다는 설정이 지극히 비현실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화를 본 많은 이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무나 아련하고 애틋한 사랑. 나도 한 번 해보고 싶다’고요. 왠지 비의 계절이 기다려지네요.





 

# 니라이카나이로부터 온 편지(ニライカナイからの手紙, 2008)

오키나와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국립 공원 타케토미(竹富) 섬에서 태어난 소녀 아사토 후키(아오이 유우). 엄마는 어린 그녀를 놔두고 어딘가로 떠나갑니다. 하지만 매년 생일때 편지를 보내오지요. ‘후키, 너의 ○번째 생일을 축하해’로 시작하는 그 편지의 발신지는 언제나 니라이카나이라는 곳입니다. 후키는 할아버지와 이웃 어른들, 그리고 다정한 친구들과 함께 성장합니다. 그녀에겐 엄마에 대한 그리움 못지 않게 사진 작가가 되고 싶은 소중한 꿈이 자라고 있었지요. 열아홉이 되던 해 마침내 오키나와를 떠나 도쿄로 향합니다.



쿠마자와 나오토 감독 작품. 영화의 내러티브는 극단적이라고 할 만큼 단순한 플롯을 지니고 있습니다. 다소 지루할 수밖에 없는데요. ‘절제의 미’라는 일본 예술 특유의 미학을 염두해 둔다면 자연스럽게 넘어갈 만하고요. 오키나와의 정취를 아름답게 담은 영상미와 중후반의 반전 그리고 외로운 섬소녀의 감수성을 뛰어나게 표현한 아오이 유우의 빛나는 눈물 연기가 그 결점을 만회하고도 남습니다.

도쿄에서의 20세 생일 날, 후키는 엄마와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로 가지만 그 곳엔 할아버지만 달랑 혼자 와 있습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습니다. 후키는 엄마의 흔적을 찾아 다시 섬에 들어가고, 집에서 아빠의 영정 옆에 있는 엄마 사진을 보게 됩니다. 섬에서 떠난 지 오래지 않아 불치의 병으로 세상을 뜨게 된 엄마가 병원에서 눈물로 쓴 편지들을 그동안 할아버지가 배달한 것이지요.

편지를 매개로 한 지극한 그리움의 커뮤니케이션. 영화가 끝나도 뭔가 아쉬운 듯,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사랑을 정면으로 배웅하지 못합니다. 극중 우편함이 있던 선착장엔 여전히 기다림이 서성이고 추억의 해안선따라 긴 여운이 이어집니다. 인생은 결국 이런 것일까요. 한없이 적적한 풍경의 잔상이 떠나지 않는 자리 한 켠에 쓸쓸하고 지친 삶을 위로하는 시 한 편을 들여앉혀 봅니다.  

물 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 김종삼 ‘묵화’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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