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장미꽃 향기를 맡는 법, 지평선 너머로 지는 해를 바라보는 법, 휘파람 부는 법, 상상력을 확대하는 법, 빈둥거리며 시간을 죽이는 법, 강아지와 노는 법, 음악을 맛깔스럽게 듣는 법, 낮잠 자는 법…. 세상에 이런 것들을 가르쳐주는 선생님은 없습니다. 살아가면서 스스로 터득(?)할 수밖에 없는, 대단히 비실용적이며 비생산적인 영역입니다. 대부분의 현대인들도 관심 밖이지요. 누군가 이의 필요성을 거론한다면 ‘콧방귀’가 돌아올 것이 뻔하고요.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냐’는 힐책을 듣기 십상이겠지요.

그러나 일단의 발칙한(?) 그룹에 의해 이러한 ‘비현실적 호기심’이 ‘현실’의 틈을 비집고 들어와 우리의 삶에 개입하기 시작했습니다. 인생의 룰에 대한 어떠한 강요도 없는 ‘지고(至高)의 자유’가 인간을 가장 행복하게 한다는 가치관이 설득력을 얻으면서 새삼 ‘느림의 미학’과 ‘여유의 아름다움’을 자각하게 만든 것이지요. 여전히 실생활과는 거리가 먼 얘기로 치부하는 경향이 농후하지만요. 인간성 회복과 관련된 ‘삶의 방식’에 눈 뜨기 시작한 사람들이 늘면서 예전보다 상당히 인지도가 높아진 것만은 사실입니다. 영화 세계에서도 관심이 부쩍 커졌지요. 여기 ‘슬로 라이프’를 말하는 세 편의 일본 영화 속으로 들어가봅니다.

# 안경(Glasses, 2007)

대학 교수인 타에코(코바야시 사토미)는 휴대폰이 터지지 않는 한적한 바닷가로 휴가를 갑니다. 손님이 많은 것을 싫어해 일부러 간판을 작게 만든 민박집 주인과 매년 이곳을 찾아와 ‘메르시’라는 희한한 체조를 지휘하는 빙수 아줌마(모타이 마사코), 시도 때도 없이 얼굴을 내미는 여고 생물 선생님과 재미라곤 전혀 없는 일상을 보내는데요. 배고프면 밥 먹고 하릴없이 바닷가를 산책하고 시간 되면 자고 다시 아침에 눈을 뜹니다.

소박하지만 황당할 정도로 느려터진 사람들의 행동에 싫증이 난 주인공은 민박집을 바꿔보려고 나서지만요. 새로 찾은 곳은 손님에게 의무적으로 밭일을 시키는 더 황당한 곳임을 알고 터벅터벅 되돌아옵니다. 그때 자전거를 탄 빙수 아줌마를 만나는데요. 끌고 오던 무거운 가방을 그 자리에 놔두고 몸만 자전거에 오르지요. 모든 짐을 벗어던지고 이제야말로 진정한 여행길에 오른 사람처럼. 불행을 막아준다는 매실 장아찌 반찬을 즐겁게 먹고 맛있는 음식이 생기면 조촐한 파티 열고…. 하품이 나올 정도로 심심한 이곳이 점점 좋아집니다. 그녀는 마침내 ‘느리게 사는’ 사람들에게 동화돼 조급하지 않고 초조해하지 않는 삶이 어떤 건지를 이해하게 되지요.

“나는 자유가 무엇인지 안다
길을 따라 똑바로 걸어라
심연의 바다를 멀리한 채
그대의 말들을 뒤로 남긴다
달빛은 온 거리를 비추고
어둠 속을 헤엄치는 물고기는 보석처럼 빛난다
어쩌다 인간이라 불리어 내가 지금 여기 있는 것
무얼 두려워하는가
무얼 겁내는가
이제 어깨를 누르는 짐을 벗어버릴 시간
나에게 용기를 다오
너그러워질 수 있는 용기를
나는 자유가 무엇인지 안다
나는 자유를 안다.”

타에코를 찾아온 제자(카세 료)가 바닷가에서 읖은 시입니다. 영화를 연출한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이 진정한 자유를 갈구하는 현대인에게 던지는 메시지처럼 들리네요. 로케이션 장소는 일본의 오지로 불리는 가고시마의 요론 섬이라는 곳입니다. 롱 테이크로 잡아낸 삶과 자연의 풍경, 절제된 대사, 깔끔한 음식의 정갈함에 주인공도 ‘젖어들고’ 관객도 젖어듭니다.






▲ 안경






▲ 안경

# 카모메 식당(Kamome Diner, 2006) 

무심한 척, 큰 소리로 외치지는 않지만 매우 섬세하게 마음을 파고드는 이야기. 햇살 속에 빛나는 예쁜 주방 기구와 혀끝을 자극하는 요리 장면이 인상적입니다. 영화는 누군가의 위로가 필요하고, 해답이 아닌 공감이 중요하며, 마음의 휴식이 간절한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위안은 크고 대단한 것이 아니라고, 가정식 요리를 만들 듯 진심 하나로 통하는 것이라고. 그리고 쓰다듬어 줍니다. 누구나 다 조금씩은 힘들고 외롭다고요. 까칠한 현실에 부대껴서 어딘가로 도망치지 않으면 도저히 못 견딜 것 같은 사람들을 위한 영화.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의 2006년 작품입니다.

핀란드 헬싱키에서 조그만 일본 식당을 운영하는 사치에(코바야시 사토미). 문을 연 지 한 달이 다 돼도 손님이 없어 파리만 날립니다. 어느 날 일본에 관심이 많은 청년 토미가 첫 손님으로 찾아오고 외로운 여인 미도리를 만나 함께 일을 하게 되면서 활기를 띠기 시작하는데요. 미도리처럼 매우 생뚱맞은 이유로 핀란드에 온 쉰 살의 아줌마(모타이 마사코)가 합세하자 텅 비었던 공간은 다양한 사람들의 사연으로 꽉꽉 채워집니다.

함께 시나몬 롤을 굽고 커피를 내립니다. 주먹밥을 빚고 연어를 익힙니다. 푸드 스타일리스트로 유명한 이이지마 나미가 선보이는 영화 속 요리들은 그 자체로 비중이 크지는 않지만 새 삶을 찾아나선 이 여유 있는 여자들을 동경하게 만드는 강력한 장치로 작용합니다. 단순히 배고픔을 충족시키는 ‘패스트 푸드’가 아니라 오랜 시간 정성을 들여 참맛이 느껴지는 ‘슬로 푸드’처럼 진하고 긴 여운을 선사하지요. ‘카모메’는 우리 말로 갈매기, 이제 막 작지만 예쁜 자신의 주방을 갖게 된 새댁들의 필수관람 영화라지요.






▲ 카모메 식당

# 수영장(Pool, 2009) 

‘카모메 식당’ ‘안경’의 제작진이 만든 또 하나의 슬로 라이프 무비. 태국에서 작은 수영장이 있는 게스트 하우스를 운영하는 주인공 쿄코(코바야시 사토미), 그녀를 만나러 일본에서 날라온 딸 사요,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지만 여유를 잃지 않는 건물 주인 아줌마 키쿠코(모타이 마사코), 친절한 청년 일꾼 이치오(카세 료), 언젠가는 생모를 만날 꿈을 갖고 있는 태국 소년 비이가 만드는 이야기입니다. 역시 예쁜 색감의 음식들이 많이 등장하고요. 메가폰을 잡은 사람은 다르지만(오기가미 나오코가 아닌 오모리 미카 감독) 흰 쌀밥처럼 맹맹하고 슴슴한 감동을 선사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엄마는 좋아하는 일이 생기면 어딘가로 떠나버려요. 그것도 아주 즐겁게 말이죠.”
“그때는 그렇게 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으니까. 살아가는 데 우연이라는 건 없어. 매 순간 자신이 원하는 걸 선택해 가는 거야.”

이 영화는 미약하나마 갈등 구조가 있는데요. 자신이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는 딸과 누구나 스스로 원하는 인생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쿨한 엄마의 관점이 서로 대립합니다. 하지만 충돌은 일어나지 않지요. 감독은 6일 간의 모녀 상봉 기간 중 갈등을 드라마틱하게 봉합시키지 않고 시간이 지나면서 저절로 아무는 과정을 천천히 보여줍니다. 쿄코가 기타를 치며 부르는 노랫말에 자신의 마음이 녹아 있네요.

“네가 좋아하는 연분홍 꽃 꺾어볼까 말까
(…)
내가 좋아하는 얼굴, 네 얼굴
사랑하고 있어.”






▲ 수영장

새로운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면 새로운 에너지를 얻게 됩니다. 어쩌면 그들은 영화 속의 핀란드, 태국이나 오지의 섬처럼 먼 곳이 아닌 가까운 어디에선가 '느릿느릿' 살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우리가 먼저 다가서기를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지요. 중요한 건 바람처럼 자유롭고 신선한 사고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우리의 마음 자세겠지요. 영혼의 가난과 궁핍으로부터 벗어나는 자기 내부로의 여행. 외로울 수록, 힘들 수록 짐은 가벼워집니다. 어떻습니까? 지금 길을 떠나보는 것이. 어머니처럼 모든 것을 이해하고 언제나 푸근한 미소로 나그네를 맞아줄 타에코, 사치에, 쿄코를 만나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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