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든다는 처서(處暑). 풀이 더 이상 자라지 않고 모기의 입이 비뚤어진다는 시기인데요. 우리 조상들은 이 절기에 비가 오는 것을 몹시 꺼려했습니다. 잘 자라던 곡식이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처서비’가 내리면 ‘십리에 천 석 감한다’라고 하거나 ‘독 안의 쌀이 줄어든다’고 걱정했습니다. 전북 부안에서는 ‘혼사를 앞둔 큰 애기들이 울고 간다’고 합니다.

농군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흘째 처서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물기를 잔뜩 머금은 구름대가 공대지(空對地) 미사일처럼 발사 명령을 기다리고 있다가 일시에 스콜로 돌변합니다. 변덕도 그런 변덕이 있나 싶습니다. 쏟아지다 그치고, 다시 퍼붓고…. 습도는 또 왜 그렇게 높은지요. 가만히 있어도 축축해지는 등줄기따라 벌레가 흐물흐물 기어가는 것 같은 느낌. 이제 에어컨 없는 여름은 생각하기 힘들게 됐습니다.

우리나라 기후도 마침내 아열대성으로 바뀐 건지요. 하긴 대구나 경산 등에서 많이 키우던 사과의 북방 한계선이 이미 충청도를 지나 강원도까지 올라간 걸 보면 그런 것도 같습니다. 바다 속 풍경도 많이 변했다는 소식입니다. 제주 인근에서 살아야 할 어류가 난데없이 독도 수역에서 헤엄치고 있다지요. 동해 오징어 떼가 점점 북상함에 따라 우리 어선이 위험을 무릅쓰고 북쪽 경계선 가까이서 조업한 지도 제법 된 얘기입니다.



새 환경에 제일 잘 적응한 개체는 아무래도 매미일 듯 싶네요. 온난화 등으로 수가 크게 늘어난 녀석들이 낮을 달구는 것도 모자라 밤조차 잊었는데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합창교향곡 때문에 피해를 본 사람들도 생겨났습니다. 서울의 어느 학교에서 텝스 시험을 치르던 한 대학생은 ‘갑자기 귀를 찢는 듯한 매미 소리에 듣기평가 10문제를 놓쳤다’며 발을 동동 굴렀다고 하네요. 7~8월 인터넷의 토익 텝스 게시판에는 녀석들 때문에 시험을 망쳤다는 글이 줄지어 올라왔다는 군요.

수액이나 빨아먹는 작은 곤충이 어떻게 그런 엄청난 굉음을 토해내는지 신기합니다. 고작 3주간을 살기 위해 지상에 등장하는 안타까운 운명…. 다급한 외침일 수밖에 없겠지요. 옛 문인들은 그런 매미에게 다섯 가지 덕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문(文)-머리에 갓끈이 달려 문자 속이 보인다. 청(淸)-이슬을 마시니 맑다. 염(廉)-곡식을 축내지 않아 염치가 있다. 검(儉)-살 집을 안 지어 검소하다. 신(信)-철에 맞춰 오가니 믿음이 간다’

미물이지만 단아하게 살다가 미련 없이 퇴장하는 결단이 추상 같습니다. 만물의 영장임에도 자신과 관련된 비리에 ‘모른다. 죄송하다’며 권력과 금력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인간의 구차함을 부끄럽게 만듭니다. 그나저나… 이 비 그치면 염제(炎帝)가 퇴위하려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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