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튿날 아침의 생태마을, 하늘은 더없이 맑았습니다. 구름 몇 조각만 떠갈 뿐 언제 비가 내리기라도 했느냐는 듯 말짱했습니다. 된장 등 각종 장류를 직접 담그는 마당을 지나 식당 문을 여니 하룻밤 사이 구면이 된 이곳 직원과 숙박 회원 대여섯 명이 짧은 눈인사를 보내왔습니다. 많이 걷는 날이 될 것같아 고봉밥으로 든든히 배를 채웠지요. 설설 끓는 구들장 같은 건조한 실내에서 이리 뒤척 저리 뒤척 잠을 설친 탓에 몸은 무거웠으나 마음은 깃털처럼 가벼웠습니다.



전날 향했던 산길을 다시 오르다가 강물 소리를 들으며 걷는 내리막 코스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완만하게 돌아가는 길은 좁았지만 그렇게 가파르지는 않았습니다. 포장이 돼 있어 가끔씩 차도 다녔습니다. 물론 1차선이었지요. 3㎞ 정도 지났을까요. 아담한 마을이 나타나고 어디선가 개 짖는 소리도 들렸습니다. 사람을 만나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이런 곳에서 개와 마주치는 건 전혀 반갑지 않은 일입니다.

한적한 시골 길을 걸을 때 제일 곤혹스러운 게 바로 코 앞에서 미친 듯 짖어대는 고약한 견공과의 대면이기 때문이죠. 이쪽에서 공격 의사가 없다고 실실 웃어도 아무 소용 없습니다. 지나가는 과객 기분은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꼬리라도 흔들어 주면 손해날 것 있나? 하지만 이런 기대는 절대 금물입니다. 괜한 오해(?)를 사지 않으려면 내 편에서 피하는 게 상책이지요. 그것도 빨리. “내 참, 저걸 때려 죽일 수도 없고…”

주위를 돌아보니 우회하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 듯 싶었습니다. 꽤 오래 전부터 방치된 느낌의, 앙상한 뼈대를 드러낸 빈 집을 돌아서니 아담한 전원주택 동산이 여기저기 보이고 예쁜 이름의 펜션 간판도 다수 눈에 띄었습니다. ‘가을동화’ ‘평창강펜션’… 드라마나 영화 제목에서 따온 듯한 이름, 왠지 깊고 시린 사연들이 많을 것만 같았습니다.

연인들은 길이 끝나는 곳에서 사랑을 최종 확인하고 싶은 걸까요. 그래서 어떤 이들은 바다로 향하고 일부는 이 외진 곳까지 와서 숭고한 의식을 치르는지도 모릅니다. 그 결과가 비록 상처나 눈물일지언정…. 가장 빛나는 순간을 위하여 자신의 전 생애를 통틀어 순도와 밀도가 가장 높은 시간을 헌정합니다. 개중에 잃어버린 시간의 바늘을 뒤로 돌리기 위해 이런 곳을 찾는 나 같은 사람도 물론 있지만요.

강물은 어제 내린 비로 인해 황토색을 띠었고 수량도 늘어난 것 같았습니다. 물방울끼리 부딪치고 긁히고 뒤집히면서 전체를 정화시키는 거대한 물리 현상, 매우 인상적인 시스템이었습니다. 무턱대고 자갈밭에 퍼질러 앉았지요. 담배 한 대 피워 물고 다시 궁상을 떨고 있는데 한 떼의 물새 가족이 푸더덕 강을 박차고 날아올랐습니다. 경쾌한 비상… '나도 저 새들처럼 자연스럽게 도약할 수는 없을까' 생각했습니다. 박두진 시인의 노래처럼 나에게도 곧 ‘황혼과 함께 이어 별과 밤은 오리니…’ 내 인생에 내가 쫓기지는 말자고 스스로 약속했습니다. 

다시 1박. 대충 아침을 먹고 짐을 챙겨 생태마을 정문을 나섰습니다. 떠나는 사람보다는 남아서 보내는 사람이 더 외로울 것이라는 다소 엉뚱한 상상을 하면서... 이번엔 두 발로 정선국도를 걷기로 했습니다. 이틀 전 나에게 '콜'을 부탁했던 기사에겐 미안했지만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터미널까지 부지런히 걸어서 두 시간. 그곳서 버스로 영월 거쳐 제천, 다시 기차로 덕소, 급행 버스로 집까지 강행군하였습니다. 지난 2월 27일의 일이었지요.

3월 2일부터의 새 직장생활을 앞두고 마음을 다잡기 위해 떠났던 여행. 옛 상사의 각별한 배려와 동료들의 사랑이 잊혀지지 않았던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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