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시는 비 내리는 정선국도를 천천히, 미끄러지듯 달렸습니다. 차창 너머 평창강을 왼쪽 허리에 낀 채 길고 완만하게 휘어진 도로가 롱숏으로 잡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풍경이 보여주는 부분의 합보다 전체가 훨씬 더 클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읍내 터미널에서 10여 분. 자그마한 언덕을 돌자 말로만 듣던 성필립보생태마을이 구름과 안개의 군무를 뚫고 자태를 드러냈습니다. 평창군 평창읍 도돈리. 2만 평 가까이 되는 넓은 터에서 재배되는 농약 안 친 유기농 제품과 친환경 교육 프로그램으로 유명합니다. 천주교에서 운영하지만 일반에게도 개방돼 있지요.  

풍력과 태양열로 발전을 하고 난방도 한답니다. 황토집도 여러 채 눈에 띄었는데요. 주로 암 환자들이 장기 거주하고 있다는 택시 기사의 귀띔이었습니다. 내가 퇴직자라고 밝히자 자신도 공무원 정년퇴직 후 여기저기 일거리를 찾았지만 아무 데서도 받아주질 않았다면서 전화 번호가 크게 찍힌 명함과 함께 돌아갈 때도 ‘콜’해 달라는 당부를 건넸습니다.  

“2박3일 있겠습니다.”
“식사는 9시, 12시, 6시. 종이 울리면 식당에서 드시고요. 계산은 후불입니다.” 

간단한 안내와 함께 배정받은 방 바닥은 엉덩이를 대지 못할 정도로 뜨거웠습니다. 몸이 찌뿌듯할 때 ‘지지기’ 좋겠다는 생각을 하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 눈꺼풀이 감기고 말았습니다. 똑, 똑… 창문을 때리는 빗방울 독주따라 낭창낭창 비단결처럼 감겨오는 안락함이라니. 행복했습니다. 

한 시간 정도 잤을까요. 비는 그치지 않았습니다. ‘좋은 비는 때를 알고 내린다’는 두보의 시구와 영화 ‘호우시절’의 장면이 오버랩됐습니다. 우산을 들고 정적이 감도는 숙소를 살금살금 빠져 나왔지요. 두터운 구름층이 뿌려댄 흑백과 다양한 상록수가 내뿜는 컬러의 대비가 뚜렷한 풍광. 그럼에도 두 이질적 색조는 서로 간섭하지 않았고 충돌도 없었습니다. 

강물은 넉넉한 품으로 흐르고 있었고 간간이 이름 모를 새들이 높은 산들을 배경으로 궤적을 그리며 날았습니다. 늦가을 떨켜를 만들지 않아 안쓰럽게 매달려 있는 굴참나무 잎들 사이로는 조그만 마을도 보였습니다. 생명의 젖줄인 강과 인간이 함께 숨쉬는 평화로운 생태계가 그곳에 숨어 있었던 게지요.  

호젓한 산길로 접어든 지 한 시간여. “후두둑” 갑자기 굵어진 빗방울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슬그머니 겁도 났지요. 아직 겨울이 끝나지는 않았으나 작년 감골서 맞닥뜨린 뱀 비슷한 동물이 튀어 나올지 누가 알겠습니까. 넓힌 보폭으로 걸음을 빠르게 하다가 그만 피식 웃고 말았습니다. 휴일도 아닌 주중 비는 내리는데 강원도 첩첩 산중에 제 발로 걸어 들어와 떨고 있는 꼴이 처량해서였습니다. 

“지금 내가 왜, 여기서 청승을 떨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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