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있거라 벗이여

                                  세르게이 예세닌




잘 있거라, 벗이여, 안녕.

사랑스런 그대는 내 가슴에 있네.

우리 이별은 예정된 것이언만

내일의 만남을 약속해 주는 것.

잘 있거라, 벗이여, 인사도, 악수도 필요없느니,

한탄하지 말고 슬픔에 찌푸리지도 말게,―

인생에서 죽는다는 건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지,

하지만 산다는 것 역시 새삼스러울 것 없는 일이네.





세르게이 예세닌(1895~1925)은 러시아 시인 중에서 푸시킨 다음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0대 후반부터 러시아 농촌의 자연과 민중을 바탕으로 한 시를 발표하며 ‘마지막 농촌 시인’으로 부상했다.

하지만 그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폭압적인 제정시대와 스탈린의 공포정치 속에서 ‘술과 광기로 인생을 견뎌내고’ 30세에 자살한 비운의 시인이었다.

그는 러시아 혁명에 동참했지만 곧 환상에서 깨어난 뒤 “사회주의는 꿈도 없고 모든 걸 죽이기만 한다”며 절망했다. 이후 반항자가 되어 농민 전쟁을 테마로 한 ‘푸가초프’, 밑바닥 인생들의 아픔을 그린 ‘선술집 모스크바’ 등을 잇달아 썼다. 이 때문에 스탈린 정부로부터 ‘비속한 말과 술 취한 광인의 눈물로 얼룩져 있기에 누구의 작품보다도 해롭다’는 비난을 받았다. ‘예세닌주의’는 곧 불명예의 표상이었다.

흐루쇼프의 등장으로 러시아 동토에 해동의 바람이 불기 시작할 때까지 ‘인민에게 유독한 작가’라는 꼬리표가 붙어 다녔다. 하지만 톨스토이가 그의 죽음 앞에서 “가장 위대한 시인이 죽었다. 그의 시는 마치 그의 마음의 보물을 두 줌 뿌린 것과 같다’고 했을 정도로 그의 작품은 뛰어났다.

예세닌의 삶에서 ‘맨발의 춤꾼’ 이사도라 덩컨을 빼놓을 수 없다. 러시아혁명 후 모스크바에 무용학교를 세우고 제자들을 가르치던 44세의 덩컨은 열일곱살 연하인 예세닌에게 한눈에 반했다. 둘은 1922년 결혼했으나 이별과 재회를 거듭하다 2년 만인 1924년에 완전히 결별했다.

예세닌은 신경쇠약과 알코올 중독, 피해망상에 시달렸다. 1925년 12월21일 정신병원에서 퇴원한 그는 24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앙글르테르호텔에 투숙했다. 3년 전 덩컨과 신혼의 꿈에 젖던 곳이다. 27일 그는 잉크가 없자 손목을 긋고 흐르는 피로 시를 썼다. 그 시가 바로 ‘잘 있거라, 벗이여’였다. 그리고 다음날 그는 창문에 목을 맸다.

덩컨은 니스에서 새 삶을 시작하다 1927년 바람에 날린 숄이 오픈카 바퀴에 걸리는 바람에 목이 졸려 숨졌다.

또 한 사람, 러시아 혁명시인이자 예세닌의 라이벌이었던 블라디미르 마야코프스키(1893~1930)도 있다. 그는 예세닌의 시 ‘잘 있거라, 벗이여’의 마지막 구절 ‘인생에서 죽는다는 건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지,/ 하지만 산다는 것 역시 새삼스러울 것 없는 일이네’에 ‘인생에서 죽는다는 것은 어렵지 않지,/ 살아내는 것이 더 어렵다네’로 화답해 화제를 모았다.

예세닌의 장례식장에서 흐느끼며 ‘세르게이 예세닌에게’라는 시를 낭송했던 그 또한 5년 후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모두가 혁명기의 불운한 천재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