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강정에 쓰다(題烏江亭)

                                               두목




승패는 병가도 기약할 수 없는 법

수치 견디고 치욕 참는 것이 진정한 남아.

강동의 자제에게는 준재가 많아

권토중래했다면 결과를 알 수 없었거늘.



勝敗兵家不可期 包羞忍恥是男兒

江東子弟俊才多 捲土重來未可知





‘권토중래(捲土重來)’라는 고사성어의 원전이 된 두목(杜牧, 803~852)의 ‘오강정에 쓰다(題烏江亭)’ 마지막 구절이다. 오강(烏江)은 항우(項羽)가 사면초가(四面楚歌)를 당하고 도망친 뒤 스스로 목을 쳐 자결한 곳이다.

유방(劉邦)에 맞서 ‘운명과 흥망을 건 한판 승부(乾坤一擲)’를 벌인 항우는 참패해 오강으로 쫓겨났으나 “강동(江東)으로 돌아가 재기하라”는 권유를 뿌리쳤다. “8년 전 강동의 8000여 자제와 함께 떠난 내가 지금 혼자 무슨 면목으로 강을 건너 부형을 대할 것인가.”

항우가 죽은 지 1000여 년 후, 이곳을 찾은 시인 두목은 객사에서 그를 생각하며 상념에 잠겼다. 단순하고 격한 성격에 산을 뽑고도 남을 힘을 지닌 장사, 사면초가 속에서 사랑하는 여인 우미인(虞美人)과 헤어질 때 보여준 인간적인 매력….

천하를 휘어잡던 영웅이 강동의 부형에 대한 부끄러움을 참고 재기를 꿈꿨다면, 그곳엔 준재가 많으므로 권토중래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을 텐데 그는 왜 그렇게 하지 않고 31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을까. 이 시를 쓰면서 두목은 짧은 생을 스스로 마감한 항우의 비극적인 운명을 무척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흙을 말아 일으킬 형세로 다시 온다’는 뜻으로 쓴 ‘권토중래’는 이후 수많은 사람의 인용을 통해 지금까지 널리 쓰이는 성어가 됐다. 만일 항우가 그때의 권유를 받아들였더라면 천하의 형세는 어떻게 변했을까. 공상의 나래를 펴는 시인의 표정이 눈에 보일 듯하다.

두목의 역사의식은 적벽대전을 소재로 한 시 ‘적벽(赤壁)’에서도 잘 드러난다.

‘모래에 묻힌 부러진 창, 쇠끝이 삭지도 않았구나/ 나는 진흙을 씻고 갈아 앞 시대의 것임을 확인한다./ 동풍이 주랑을 편들지 않았더라면/ 봄 깊은 동작대에 두 교씨를 가두었으리라(折戟沈沙鐵未銷 自將磨洗認前朝 東風不與周郎便 銅雀春深銷二喬).’

적벽은 후베이성의 양쯔강변에 있는 작은 산 이름이다. 후한 말 손권과 유비의 연합군이 동풍을 활용한 화공으로 조조의 대군을 쳐부순 적벽대전이 바로 이곳에서 벌어졌다. 모래 속에 묻힌 당시의 창 조각이 아직 다 녹슬지 않았다고 했지만, 시인은 그것이 오래전 전투의 유물이라는 것을 알고 감개에 젖는다. 만약 그때 동풍이 불지 않았다면 조조는 또 어떻게 됐을까.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삼으면서도 실제 일어나지 않은 사건을 곁들이는 그의 상상력이 시의 밀도감을 한층 더 높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