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군원(昭君怨)

                               동방규




오랑캐 땅이라 화초가 없어

봄이 와도 봄 같지가 않구나

저절로 옷 허리띠 느슨해진 건

몸매를 가꾸기 위함이 아니라네.



胡地無花草 春來不似春

自然衣帶緩 非是爲腰身.



‘소군원(昭君怨)’은 당나라 시인 동방규(東方叫)의 시다. 그의 생몰연대는 정확하지 않다. 측천무후 때 좌사(左史·사관)를 지낸 사실만 전해온다. 그러나 이 시 덕분에 후세에 길이 남는 시인이 됐다.

시의 주인공은 기원전 30년 무렵 한(漢) 원제의 궁녀였던 왕소군(王昭君)이다. 양가집 딸로서 꽃다운 나이에 궁녀가 된 그녀는 절세미인이었다. 훗날 서시(西施), 양귀비(楊貴妃), 초선(貂蟬)과 함께 중국 4대 미인으로 불렸다.

원제는 이미 3000여 명의 여인을 거느리고 있었으므로 궁중화가에게 새 궁녀들의 초상화를 그리게 해서 그걸 보고 간택했다. 궁녀들은 궁중화가에게 뇌물을 주며 잘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뇌물 액수에 따라 미색이 달라졌다. 그러나 왕소군은 그러지 않았다. 결과는 뻔했다. 그녀의 초상화는 실물보다 못했다. 얼굴에는 보기 싫은 점까지 찍혀 있었다.

어느 날 북방 흉노족장이 한나라 여인과 결혼하겠다고 청했다. 화친이 필요한 원제는 승낙했다. 그때 낙점된 궁녀가 왕소군이다. 그런데 작별 인사하러 온 왕소군을 본 원제는 깜짝 놀랐다. 그림과 달리 천하절색이었기 때문이다. ‘초상화 비리’를 알게 된 원제는 그 자리에서 화가의 목을 날려버렸지만 흉노족장과의 약속은 지켜야 했다.

오랑캐 땅으로 향하는 왕소군의 심정은 찢어지는 듯했다. 아린 마음을 달래려 금(琴)을 연주했다. 그 소리가 너무나 아름답고 처량했다. 날아가던 기러기 떼가 날갯짓을 잊고 떨어질 정도였다. 낙안(落雁)이라는 말이 바로 여기에서 생겼다.

그녀의 슬픈 이야기는 중국 문학에 수많은 소재로 쓰였다. 동방규의 시도 그중 하나다. 이 시에 나오는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봄은 왔지만 봄 같지가 않다)’이라는 구절이 특히 유명하다. 낯선 이국땅에서 말도 통하지 않는 그녀의 외로움이 오죽했을까. 황량한 땅이어서 꽃과 풀도 나지 않으니 봄은 왔으되 진정 봄 같지는 않았으리라.

첫 두 구절의 의미를 뒤집어 새겨보면 또 다른 묘미를 느낄 수 있다. 아무리 오랑캐 땅이라 해도 어찌 봄꽃과 풀이 없겠는가. 다만 그녀의 마음이 삭막했을 것이다. 시름으로 몸이 야위어 옷 띠가 절로 느슨해질 정도였으니 더욱 그랬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는 ‘오랑캐 땅이라고 화초가 없으랴마는/ 봄이 와도 봄 같지가 않구나’라고 해석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동방규에 이어 이백도 ‘왕소군(王昭君)’이라는 시를 남겼다.



왕소군이 백옥 안장 떨치고

말에 오르자 붉은 뺨에 눈물 흐르네.

오늘은 한나라 궁녀의 몸

내일 아침 오랑캐 땅 첩 신세로다.



昭君拂玉鞍 上馬啼紅顔 今日漢宮人 明朝胡地妾.



이 시는 두 수로 구성돼 있는데 위의 시는 둘째 수다. 첫째 수에서 이백은 ‘살아선 황금 없어 초상화 잘못 그리게 하더니/ 죽어선 청총을 남겨 사람 탄식하게 하네(生乏黃金枉畵工 死遺靑塚使人嗟)’라며 안타까워했다. 흉노 땅에 묻힌 왕소군 무덤의 풀이 겨울에도 시들지 않아 청총(靑塚)이라 했다는 얘기를 패러디한 것이다.

당나라 시인들이 한나라 때의 왕소군을 그린 것은 그때도 주변 이민족과의 화친을 위해 공주를 시집보내는 일이 허다해 그것을 풍자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