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세 사람의 실존인물이 등장한다. 파벌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는 실제와 다름을 이해해 주시길 부탁드린다.

A: 탤런트/영화배우. B로부터 전속계약을 계속 유지할 것을 협박당했다.

B: 과거 A의 매니저이자 한국 3대 조폭인 호랑이파 보스의 아들. A의 계약 연장을 위해 C를 동원했다.

C: 전설의 조폭집단 사자파의 두목. B의 청탁을 받고 ‘피바다’ 운운하며 A를 협박했다.



유명 배우 A 협박사건은 꽤 잘 알려진 뉴스다. 그런데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이상한 점’이 하나 있다. B는 호랑이파 계열이다. 그런데 어떻게 사자파 계열인 C에게 청탁을 할 수 있었을까? 또 C는 자기가 사자파 두목씩이나 되면서 어떻게 경쟁 파벌인 호랑이파 보스 아들의 말을 철석같이 따를 수 있었을까?



이 물음에 대한 힌트가 될 수 있는 영화가 한 편 있다. 관객 500만 돌파를 바라보고 있는 최근작 <범죄와의 전쟁>이다. 이 영화 안에 오늘날의 조폭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나름의 ‘통찰력’이 숨어 있다.



주인공 최익현(최민식)은 원래 건달이 아니었다. 세관 공무원 출신, 한 마디로 ‘먹물’ 계열이었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그는 남산만한 어깨들에게 깍듯한 인사를 받으며 호의호식한다. 정통 건달도 아니면서 민간인도 아닌 그와 같은 존재를 전문 용어로 ‘반달’이라고 한다.



반달 최익현의 대사 중에 현재 한국 조폭들의 현주소를 알려주는 중요한 한 마디가 있었다. 중요한 연락처가 빼곡하게 적힌 수첩 하나를 가리키며 “이게 수 억 짜리 전화번호부다.”라고 말하는 장면이다. 출신성분이 다른 최익현으로서는 정보가 생명이었을 터.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생긴다. 대체 그 수많은 연락처는 어떻게 얻을 수 있었던 걸까?



정답은 의외로 영화의 제목 안에 들어 있다. 그야말로 ‘범죄와의 전쟁’ 덕분이다. 노태우 정권은 1990년 10월 13일을 기해 국가적인 차원의 범죄 단속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조폭들이 감옥으로 잡혀 들어간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그대로다. 거리는 깨끗해진 듯 보였다. 하지만 감옥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었을까?



비운(?)의 시대를 타고 나서, 예전 같았으면 아무 것도 아니었을 일 때문에 잡혀 들어온 조폭들 사이에서는 파벌과 성분을 뛰어넘는 유대감이 형성되었다. 한국의 전통 유교사상에 입각해 나이순으로 형님/아우 관계가 재정비된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범죄와의 전쟁을 했다 해도 조폭들은 언젠가는 풀려날 운명이었다. 세상에 대한 억울함을 공유한 채로 그들은 다시 사회에 복귀했다.



한 마디로 범죄와의 전쟁은 범죄를 일소한 것이 아니라 한국의 조폭들에게 전국구 회의의 장을 마련해 줌으로써 계보를 총 정리할 기회를 준 셈이다. 미국의 영화배우 케빈 베이컨은 출연한 영화가 하도 많아서 그를 기점으로 모든 배우들이 연결된다는 ‘케빈 베이컨 게임’을 유행시켰다. 범죄와의 전쟁 역시 마찬가지. 이제는 파벌이 달라도 눈앞의 상대를 함부로 대할 수는 없다. 알고 보면 ‘우리 형님의 학교(감옥)동기의 후배의 동생’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제 조폭들에게 불가능은 없다. 어떤 일이든 다양한 채널을 통하면 성사시킬 수 있다는 '인맥의 통찰력‘이 그들 사이에 형성된 것이다.



범죄에 대한 노태우 정권의 대응이 단순했던 것에 비해 그 결과는 매우 복잡하게 펼쳐졌다. 요즘은 조폭들도 다들 나름대로 합법적인 법인을 구성해서 활동하는 세상이지만, 실질적으로 하나의 전국 계보를 갖게 돼 버린 한국 조폭사회에 한 번 잘못 엮여 들어가면 빠져나올 길이 만리장성이다.



A는 결국 이미지의 심각한 훼손을 무릅쓰더라도 사태를 공론화해서 빠져나오는 방법을 선택했다. 하지만 그럴 만한 인지도도 용기도 없는 평범한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통찰력 없는 한 정권의 무능이 조폭 나름의 통찰력을 파생시킬 때, 그 피해를 떠안아야 사람은 결국 따로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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