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스멘>에 실은 원고 '스토리텔링 코드'의 두번째입니다. 원래 원고에서 소재를 하나 더 추가했습니다.---------------------------------------------------------------------부재(不在)를 통한 가치 증명   2005년 6월 8일 북한과 일본의 축구 월드컵 지역 예선 경기가 태국에서 열렸다. 월드컵 예선 경기는 홈앤드어웨이 방식으로 열리는 게 원칙인데 북한도 일본도 아닌 제 3국인 태국에서 거행되었다. 더욱 이상하게 관중석은 텅 빈 채 선수와 심판들 외에는 극소수의 피파 관계자들만이 참관했다. 그 해 3월30일 이란과의 경기가 열린 평양 김일성 경기장에서 흥분한 북한 관중들이 소요 사태를 일으킨 데 대한 책임을 물어, ‘무관중 경기’라는 극약 처방이 내린 것이었다. 아주 드물게 무관중경기라는 처벌이 내려진다. 무관중 경기는 관중 수입이 절대적인 프로 축구에는 특히 치명적이다. 그 존립기반 자체를 부정하는 처분이다. 그런데 축구 관중들의 열광 정도가 심한 중남미에서 이런 현상이 가끔 벌어지는 것 같다. 페루의 프로축구리그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단다. 극단적인 대책이 필요할 때 페루의 스포츠신문인 ‘엘보콘(El Bocon)'에서 역시 극단적인 조치를 취했다.어느 날 엘보콘을 받아 본 독자들은 깜짝 놀랐다. 신문의 여러 면이 아무 기사도 없이 공백으로 발행이 되었기 때문이다. 축구가 없으면, 축구 기사가 없어지고, 그러면 스포츠신문의 많은 면이 공백으로 발행된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었다. 1974년 12월 서슬 퍼런 정부의 압력에 주요 광고주들이 갑자기 광고를 빼서 광고면을 공란으로 발행할 수밖에 없었던 동아일보 백지 광고 사건을 연상시킨다. 아무 것도 쓰여 있지 않은 그 공란이 당시의 정치 상황에 대해 어떤 기사보다도 더 정확하게 여실히 보여준다는 얘기가 나왔다. 그 공백을 국민들의 자발적인 격려광고가 메웠다. 유신독재에 대한 범국민적인 저항이 가장 큰 불꽃으로 타오른 사건이었다. 엘보콘의 공백도 화제거리 이상을 넘어서 건전한 축구 관전문화의 중요성을 환기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신문 기사에서나마 축구가 사라졌을 때, 곧 부재(不在)의 상황을 보여줌으로써 축구의 가치를 일깨워 준 것이었다.책 속의 글자와 그림의 부재를 통하여 가치를 일깨운 사례도 있다. 어느 책을 사려고 할 때 ‘전에 산 책도 다 못 읽었는데’하는 생각이 들어서 사지 않는 경우가 꽤 있다. 전에 사서 읽지 못한 책이 새로운 책 구매를 막는 대표적인 장애물이라고 한다. 아르헨티나의 한 출판사는 시간이 지나면 지면의 글자들이 사라지는 책을 출판하여 책을 사면 쌓아두지 말고 빨리빨리 읽어야 하는 필요성을 환기시켰다. 오스트리아의 태양에너지 관련 재단에서는 반대로 소개 책자를 백지 상태로 발간했다. 햇빛에 비추면 서서히 글자와 그림이 나타나서, 햇빛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었다. 작년 칸느광고제 최고의 화제작이었던 루마니아의 초코바 롬(ROM)도 존재 기반을 없애며 가치를 증명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루마니아의 소비자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혹은 격하시켰던 롬 안의 ‘루마니아’라는 가치를 아예 그와 대척점에 있는 성조기로 표현되는 ‘미국’으로 바꾸어 소비자들이 사라져 버린 루마니아를 연호하고 찾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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