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기사에 보이는 것과 같이 뉴욕과 프라하, 그리고 이제 한국에서도 활동하는 브랜드 디자이너 친구가 한국에서 책을 냈다. ("나의 눈은 세계를 향하다-사회평론) 그 책에 그녀와의 인연을 풀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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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배자가 되는 것도 즐거우리

 

박재항

(이노션월드와이드 마케팅본부장)

 

뉴욕에서 다국적 브랜드 컨설팅 회사에 근무하던 한국인 여성 디자이너 친구가 하나 있었다. 그런데 2 년 전 갑자기 남편을 따라서 체코의 프라하로 간다고 하더니 연락이 끊겼다가 몇 개월 전 예전에 그녀와 함께 근무했던 친구를 통해서 연락이 닿았다. 체코의 프라하에서 브랜드 회사를 세워서 운영하고 있단다. 진공청소기, 커피메이커 등의 가전 소품으로 체코에서는 1위를 하는 가전회사의 CEO가 중국에 출장을 오는데, 한국에까지 들르도록 하였으니, 자리를 함께 하자고 해서 제일기획 출신으로 그녀의 오랜 지인인 여자 친구 하나와 함께 4명이 만났다. 그들이 머무는 신라호텔과의 인접성과 오랜만의 귀국이므로 한국 토속적인 음식을 해야 한다는 점까지 감안하여 장충동 족발집에서 저녁을 함께 했다.

 

지난 2008년 10월에 어느 지면에 지원과 오랜만에 서울에서 만났을 때 벌어졌던 얘기를 가지고 썼던 졸문의 첫 부분이다. 처음 내가 그녀를 만났을 때 그녀는 뉴욕에서 드문 여성 브랜드 디자이너였다. 그러고 보니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패션 쪽에만 너무 몰려 있어서 그런지 브랜드 디자인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여성들을 거의 보지 못했다. 2000년 말에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에는 나도 뉴욕의 브랜드 업계 사정을 잘 몰랐던 시절인지라, 그녀를 흔치 않은 ‘여성 브랜드 디자이너’의 그룹에 집어 넣지 않았다. 단지 ‘한국인 여성 뉴요커’의 범주가 먼저였다. 그녀야말로 내가 그리워하던 한국인 뉴요커의 모든 면을 지니고 있는 인물로 최초 각인이 되었다.

내가 그리워했던 한국인 뉴요커의 모습은 무엇인가? 사실 정확하게 정의를 내린 적은 없다. 그러나 대략 어느 미국 친구와 나누었던 대화를 통하여 정리해 놓은 대략의 이미지가 있을 뿐이었다. ‘91년에서 ‘93년까지 2년 동안의 뉴욕대 경영대학원 수학 시절을 보내고, 이후 제일기획에 들어가 수십 차례 뉴욕을 들락거리다가 ‘99년 가을 정식 주재원 발령을 받고 가족들을 이끌고 뉴저지에 안착을 했다.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모든 것이 낯설고 귀찮은 행정절차에 시달리던 무렵 오래 전부터 잘 알던 미국 친구와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누었다.

 

“예전에 살기도 했고, 출장도 많이 나왔는데 다시 오래 자리를 잡고 살려니 어때?”

“뉴욕대 시절과 비교하여 세 가지 큰 차이가 있더군. 첫째, 그 때는 학생이었잖아. 지금은 회사원이고. 학생은 기분이나 환경이 안 된다 하면 수업에 안 들어가도 되잖아. 회사는 거의 무조건 가야지. 둘째, 총각이었던 당시와 두 아들놈까지 둔 지금은 비교가 되지 않지. 마지막으로 그 때는 말이야 맨하탄에 살았지만, 지금은 뉴저지야. 가장 큰 차이는 맨하탄에서 나는 차 없이 잘 돌아다녔는데, 뉴저지에서는 꼼짝할 수 없는 게야.”

“하하하, 그 한 6년 사이에 자네가 잃은 것은 ‘자유(freedom)’이고, 얻은 것은 ‘굴레(ball and chain)’이야.”

 

나의 가족들이 들으면 화가 날 수도 있겠지만, 그 미국 친구의 말이 맞았다. 물론 내가 그런 예만을 든 것이 결정적인 이유였지만, 6년이라는 시간의 흐름 속에 ‘잘 나가던 맨하탄의 독신남’에서 ‘가족들과의 일상생활 속에 몰입한 평범한 도시 근교의 미국 직장인’으로 변해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아쉬움과 안타까움 속에 그리움으로 ‘맨하탄이야말로 독신을 위한 곳이야. 혹시 결혼을 했어도 맨하탄 생활을 즐기려면 애가 있어서는 안돼” 와 같은 얘기를 친구들에게 새로이 발견한 진리처럼 내뱉고 다녔었다. 내가 잃어버리고 그리워하고 있는 맨하탄 생활을 만끽하는 여건과 모습을 나는 지원에게서 발견했다.

 

퓨처브랜드(FutureBrand)라는 회사와 한창 일을 하면서 그 곳을 들락거리던 어느 날 그 곳의 내 카운터파트 미국 친구가 지원을 소개했다. 소개할 때 이름을 제대로 듣지 모하여 그냥 동양계 디자이너로만 생각하여 영어로 인사를 했다. 한국인이라고 미국 친구가 얘기를 했지만 한국어가 어눌하게 나와서 이후에도 몇 차례 퓨쳐브랜드 사무실을 드나들며 얼굴을 마주칠 때마다 거의 영어로 인사를 하든지, 눈인사만 했다. 본격적으로 디자이너들까지 팀에 합류하여 토론을 하고, 중간중간 휴식시간에 함께 담배를 피면서 얘기를 나누면서 그녀의 한국말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유창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실 한국이냐 외국이냐 하는 지역을 불문하고 외국인 회사에서 일하는 한국 여성들에 대하여 그러지 않으려 노력을 하지만, 약간의 부정적인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운동권은 아니었지만 ‘80년대 가장 탄압이 극심하던 시기에 대학을 다녔고, 그 중간에 미군 부대에서 군대 생활을 하면서 보았던 군무원부터 영어회화를 배우겠다고 막사를 들락거리던 여대생들과 생활의 방편으로 진을 치던 수많은 기지촌 여성들을 보면서 어찌 보면 집단적으로 배태된 비이성적이고 비논리적인 편견이었다. 대놓고 그들을 비난하지는 못하고, 단지 그녀들과 어울릴 기회가 있어도 어울리지 못하고 피하는 형식으로 주로 나타났다.

지원과는 당장 일을 함께 해야 하니 그렇게 피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서로 회의와 휴식 시간의 대화를 통하여 서로가 아쉬워하며 부족했던 것을 상대방에게서 찾았고, 그것을 채워주는 것으로 파트너쉽과 우정을 쌓기 시작했다. 우리는 ‘한국인이라는 출신 지역과 민족, 뉴욕을 사랑하고 즐기려는 욕구, 브랜드 부문에서 일을 한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지만,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그 공통점들에서조차 무척 다르게 엇갈리고 있었다. 몇 년 동안 회사를 다니고 뉴저지의 한인촌에 자리를 잡으면서 나의 한국인성(Korean-ness)은 강해지고, 뉴욕니스(NewYork–ness)는 약해지고 있었다. 반면 지원은 그 반대였다. 외국인이 한국어를 하는 거처럼 들릴 정도로 그녀의 한국인성은 약해지고, 뉴욕의 미술계와 음악계를 아우르며 다닐 정도로 뉴욕에서의 활동 범위를 넓히고 있었다. 그리고 브랜드 부문에서 ‘Strategist’와 ‘Designer’로서 ‘Text’와 ‘Image’의 최고의 앙상블을 만들어야 하는 공통의 목표를 가지고 서로의 빈 곳을 채워야만 했다.

지원을 통하여 나는 맨하탄 남쪽 소호(SOHO)를 중심으로 모여 있는 갤러리들이 모마(MoMA)와 같이 더욱 큰 박물관과 연계하며 존재하는 방식에 대하여 알게 되었다. 그녀의 오케스트라 지휘자인 남편은 뉴욕의 클래식 음악계를 이해할 수 있는 그림을 내게 보여 주었다. 2003년 주재생활을 끝내고 서울로 돌아온 이후, 처음 뉴욕에 출장으로 들렀을 때 그녀는 먹는 것과 관련하여 뉴욕생활에서 그리워하던 것을 완벽하게 한 자리에서 처리하여 주었다. ‘다양한 종류의 생굴(Oyster) – 두터운 안심 스테이크(NY Steak) – 찐한 치즈 케잌(Cheesecake)’의 코스로 어느 음식점에서 대접을 해주었다. 먹는 양식으로서의 뉴욕니스( NewYork-ness )를 채우며, 대화를 통하여 마음의 양식으로서의 뉴욕니스도 채워주는 식의 만남이 짬짬이 뉴욕에 들를 때마다 계속 되었다.

그녀의 그런 후의에 대한 나의 보답이 바로 서두의 졸문에서 살짝 내비친 것처럼 장충동 족발과 같은 한국적인 요소로 그녀를 채워주는 것이었다. 한국식 통닭, 노래방 외에 많은 한국 친구들을 그녀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그녀의 디자인 작품 속에 살짝 한국적인 영향이 조금씩 내비친다는 느낌을 이후에 강하게 받았다. 엷게 번지는 듯한 색동무늬나 곡선들의 부드러운 조화를 이루어내며 연결시키는 것들이 바로 그 예이다. 한국 요리나 술집과 친구들이 직접 영향을 미쳤다기 보다는 그녀가 뉴욕의 치열한 경쟁 상황 속에서 외국인 가족들과의 생활 속에서 잊고 있거나 눌려져 있던 것들이 자연스럽게 뿜어져 나오는 것 같다. ‘한풀이’나  ‘외곬’이 아닌, 동서(東西)를 아우르는 아름다움과 기품을 가지고 표출되고 있다.

지원은 동서를 품에 안고 발현하는 자신의 재능이 척박하기 그지 없는 브랜드의 황무지에서도 어떻게 꽃을 피울 수 있는지 프라하에서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퓨쳐브랜드에서 지원의 상사로 근무했던 친구가 지원의 프라하에서의 성공 얘기를 들은 직후 지원과 통화를 하고는 나에게 말했다. “예전의 디자이너 지원만 알고 있었는데, 비즈니스 우먼으로서 지원이 나타났어.” 나는 한술 더 떴다. “나에게는 인문철학자로까지 보이던데. ”

 

2008년 10월 우리의 만남과 그에 대한 졸문은 아래처럼 이어졌다.

 

(우리는) 홍콩에서 발간되는 <Media>란 잡지에 실린 전반적인 한국 시장과 소비자들의 특성에 관한 기사에 관하여 한동안 얘기를 나누었다. 특히 그 기사에서 인용된 내 인터뷰가 한국의 소위 ‘골드미스(Gold Miss)’라고 불리는 구매력 크고, 소비성향이 강한 20대 후반에서 30대 여성에 관한 내용이라, 여성과 남성 소비자의 차이를 소재로 한참 얘기를 나누었다. 얘기가 소비자를 넘어서 남성과 여성의 차이로 넘어가더니, 5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벨기에 출신의 그 CEO가 소주 기운이 오른 영향도 있어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남성‘으로서의 신세한탄과 함께 두 명의 여성들에게, ’그래, 남자들은 패배자(Loser)야! 너희 여성들이 항상 승자(Winner)야!“라고 선언인지 결론인지 고백인지가 애매한 발언을 했다. 그리고는 우리는 그 CEO 친구가 얘기할 때마다 ”그래, 당신은 패배자야“라는 말로 장단을 맞추며 가볍게 놀려댔다.

족발집에서 소주와 함께 한 저녁을 마치고, CEO 친구가 2차를 호텔의 바에서 자신이 내겠다고 해서 왔던 길을 거꾸로 계단을 올라가는데 발걸음이 유달리 빨랐다. 열 걸음 정도를 앞서서 호텔 현관에 도착하여 기다려 섰다가 너무 빨리 걸어서 미안하다고 얘기하는 50대 CEO친구에게 대답을 했다. “Losers are always in a hurry(패배자들은 항상 조급하다니까).” 그 친구가 “맞다”고 소리치며 박장대소를 하고, 바에 가서 우리는 절대 조급해 하지 말자면서 여유 있게, 어울리지 않지만 몰트 위스키와 와인을 함께 했다.

 

지원은 결코 서두르거나, 당황하거나, 조급해 하는 법이 없다. 부드럽고 우아한 승리자(Winner)의 자세와 명운을 타고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기꺼이 그녀를 위하여 ‘조급한 패배자(Losers in a hurry)’의 역할을 기꺼이 맡을 친구들이 많다. 나도 그 대열에 들어가는지는 모르겠다. 어찌 되었든 그녀의 ‘뉴욕니스(NewYork-ness)-코리안니스(Korean-ness)-휴머니스(Human-ness)’의 브랜드를 만드는 삼각구도에 한몫을 그래도 했다는 자부심만으로도 족하다. 혹시나 ‘조급한 패배자’를 원한다면 경쟁이 치열하겠지만, 누구보다도 조급해하며 패배해 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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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원 작가 본인작품인 소주잔 샡을 보이고 있다(왼쪽은 주한 체코 올사 대사>


주한 체코대사관(대사 Jaroslav Olsa)은 지난 5월 18일, 서울 서교동 체코 문화원에서

한-체코 수교 20주년을 맞이해 ‘서울 -프라하 연결하기’ 전시회를 가졌다.



이 자리에는 올사 대사가 초청한 프라하의 ‘파이어 브랜딩(Firefly Branding)’스튜디오와 한국브랜드 디자이너 신지원(여 44세 뉴욕거주), 체코 유리디자이너 겸 조각가인 로니 프레슬(Rony Plesl)와 주한 외교관 및 관계 인사 100여명이 참석했다.



이날 올사 대사는 인사말에서 부랜딩과 디자인에 중점을 두고 있는 체코 프라하의 세계적인 디지인 스튜디오 ‘파이어 브랜딩 스트디오’와 한국인 신지원 브랜드 디자이너, 체코 조각가인 로니 프레슬 리가 현대적인 브랜드 디자인 발상으로 양국을 더욱 이해하고 가까워 질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인 신지원씨는 1966년 서울 태생으로 이화여대 생활미술과를 졸업하고 삼성의 CI 교체작업을 포함해 롯데백화점, 르네상스 호텔 등 브렌드 작업에 참여 했다. 뉴욕에 건너가 프랫대학교에서 디자인학을 수학했고, 2004년 뉴욕에 브랜딩과 디자인 회사인 파이어플라이(Firefly)를 설립했다. 2006년에 체코 프라하에, 2010년에 서울에 파이어 플라이를 설립했다.



신지원 씨는 한국이 아시아의 중심국가로서 자라잡고 있으면서 세계인에게는 저 평가 되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며 한국도 고도의 브랜드 마켓으로 홍보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또 한국의 젊은 여성에게 세상을 무대로 하고 성공해라는 말을 하고 싶다고 했다.



신 작가는 지난해 ‘올사’ 대사와 연결되어 체코의 유명 그라스디자이너와 함게 소주잔을 디자인 하여 세계에 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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