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상징’과 ‘강렬한 유혹’

 

우리가 한 사물을 인지한다고 말할 때, 혹은 그 이미지는 그린다고 말할 때, 사실 우리는 그 이미지 혹은 사물의 외면을 둘러싸고 있는, 그리하여 정확히 그곳으로 들어가 그것을 인지하려는 것을 막고 있는 언어를 만난다. 실재에의 차단이다. 그리하여 정말 언어를 잘 다루는 사람들은 그 언어의 부정확성에 놀라고 바랭처럼 사물의 외면을 감싸고 있는 언어의 부정확성에 대한 현기증 나는 감정을 느낀다. 그들은 언어가, 그들이 선택한 언어의 양태가 사물의 실재와 너무나도 떨어져 있음을 안다. 그리고, 그들은 정말로 사물을 잘 인지했을 때에는 침묵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찬, ‘김현, 한국문학의 구체성과 프랑스 문학의 보편성, 그 절망과 열망의 변주곡’, “김현 신화 다시 읽기”, 작가와 비평 편, 2008, 중에서 - 김현, ‘김춘수와 시적 변용’, “상상력과 인간/시인을 찾아서”, 문학과 지성사, 1991,에서 인용한 부분)

 

생활에 절도가 없어지고 전혀 경건한 구석을 찾아 볼 수가 없어졌다. 진지하게 생각을 하는 시간을 가져야 했다. 마침 책상 바로 옆 서가에 팽개쳐 놓다시피 쌓아 놓은 책들과 기사자료들을 치우라는 무언의 압력을 계속 받아 왔기에 생활 주변의 정리를 위하여 거기에 쌓아 놓은 것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다른 어떤 책보다 위의 김현 선생에 관한 비평가들의 비평을 모아놓은 “김현 신화 다시 읽기”가 눈에 띄었다. 상당히 오래 전에 봐서 어느 부분을 읽었는지, 어디까지 보았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제대로 표시도 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중간 부분 아무 쪽이나 펴서, 눈에 걸리는 단어들이나 대목이 있는 편을 찾기 시작했다.

 

‘김춘수’라는 시인의 이름이 눈에 띄는 쪽이 있어, 그 편을 읽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교과서에 몇몇 작품들이 실리고 해방 이후 우리나라 시단의 대표적인 인물이고 본인의 노년에 흠집처럼 작용했지만 국회의원도 하시면서 더욱 인지도를 올리셨던 분이기에 친숙해서 그랬다. 여기에 덧붙여 국내에서 브랜드 강의를 할 때 김춘수 선생의 그 유명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 그는 다만 /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로 시작되는 작품, “꽃”을 인용하는 사람들을 곧잘 보아서 더욱 반가웠다.

 

김현 선생이 김춘수 시인을 프랑스의 말라르메와 비교하여 쓴 평론을 중심으로 김현 선생의 사상적 궤적을 따라간 평론가 이찬의 글이었고, 거기에 위에 인용한 부분이 있었다. 우리의 머릿속에 그려져 있는 이미지를, 우리가 생각한 것들을 100% 그대로 언어로 표현할 수는 없다. 치열하게 생각하고 이미지를 만들어 핵심으로 접근했던 경우일수록, 이후 언어에 의한 실재의 전이에서 온전한 형태가 흐트러지고 왜곡되는 것은 심해질 수밖에 없다.

 

광고는 여러 가지 특성과 장점을 가진 제품이란 실재에서 극소수의 이야기 꺼리를 뽑아내어서 그것을 가장 효과적으로 설득력 있게 전달하려 노력하는 활동이다. 매우 뛰어난 제품을 정말로 잘 파악하면, 시인이 ‘정말로 사물을 잘 인지했을 때에는 침묵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되는 것처럼, 뭐 하나를 뽑아내어 거의 완벽에 가까운 제품의 성가를 무너뜨리는 것은 아닐까 두려워진다. 시인은 스스로 침묵의 길을 선택할 수 있지만, 광고인은 의뢰를 받고 계약을 맺은 이상 두려움을 이겨내고 광고를 만들어야 한다. 물론 극히 예외적인 경우이기는 하지만 ‘가만히 있어도 입소문이 저절로 퍼져나갈 것이니, 광고를 할 필요가 없다’, ‘디마케팅(demarketing)이 오히려 효과를 볼 터이니, 광고를 하지말자’, ‘제품에 문제가 있어서 광고를 하면 기업이미지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충고를 하는 경우도 있다. 광고를 만들 수밖에 없는 광고인들이 자신들이 광고하는 제품의 실재와 창조하는 광고물 사이의 ‘거리’를 의식해주었으면 한다. 광고가 제품의 모든 것을 반영하고, 광고하는 제품의 모든 것이 좋다고 생각해야 한다는 무조건적인 집단최면에서는 깨어나 있었으면 한다.

 

김현은 세상을 뜨기 한 달 전에 <제 1회 팔봉문학상>의 수상소감문을 썼는데, 그것이 그의 마지막 글이었다고 한다. 그 글의 제목이 「‘뜨거운 상징’을 찾으며」였다. 그에게 문학이란 ‘온몸으로’ 보여주는 ‘뜨거운 상징’으로, 문학은 멋진 수사도 힘 있는 구호도 아닌 “그 자체가 하나의 더운 상징이 되어 거기에 대한 뜨거운 반응을 유발하는 하나의 사건”을 의미한다고 했다.

 

광고는 무턱대고 멋있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광고는 오길비가 강조하듯이 제품이나 서비스를 팔아야 한다. 멋진 수사에 화려한 그래픽으로 힘 있게 큰 목소리로 외치는 행위가 아니다. 그 자체가 소비자들이 행동하지 않을 수 없게끔 만드는 ‘강렬한 유혹’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유혹의 강도로 광고의 성공여부를 평가하여야 한다. 유혹하지 않고 스스로 외치기만 하는 광고는 그리하여 실재 바로 제품과 광고와의 거리를 멀리하게 만들어 버린다. 처음 광고에 혹했던 소비자는 결국은 실재하는 제품의 본질을 알게 되고, 광고에 대하여 눈과 귀를 닫아버리는 법을 스스로 터득하게 된다. 광고여 어떻게 할 것인가? 광고인이여, 무엇을 하고 있는가?

ⓒ 한경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