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ld Beijing'과 ’지구를 뒤덮은 슬럼‘ 사이에서




        근래에 두 권의 서로 연관되는 책을 읽었다. 중국에 평화봉사단(Peace Corps)의 일원으로 중경(重慶) 쪽으로 갔다가, 봉사단원으로서의 기간이 지난 후에 중국에서의 체류를 연장하여 북경의 초등학교 교사로 취직한 친구가 쓴 <The Last Days of Old Beijing>(Michael Meyer 지음, Walker Publishing, New York, 2008)이란 책을 읽는데, 용산에서의 사건이 일어났다. 그래서 도시 슬럼이나 철거의 문제에 조금 관심을 가지게 되며, 서점에서 <슬럼, 지구를 뒤덮다>(마크 데이비스 지음, 김정아 옮김, 돌베개 펴냄, 2007)-원제는 <Planet of Slums>-란 책을 읽게 되었다.




2005년 겨울 치엔먼다지에(前門大街)란 대로변의 상점들과 그 뒤의 후퉁(胡同)이 철거되면서 가림막이 쳐졌다. 그 가림막에는 공사가 끝난 후 변모되어 나타날 거리의 모습들이 그려졌다. 그림에 나타난 거리를 다니는 행인들은 모두 중국인들이 아닌 흰색 피부의 백인들이었고, 거리의 상점들은 피자헛이나 스타벅스와 같은 외국 브랜드의 매장들이었다. (‘Old Beijing~' 책 50페이지, 대충 발췌 번역)




또 베이징 북부 외곽에도 ‘오렌지 카운티’가 있다. 이곳은 100만 달러짜리 캘리포니아식 저택들이 끝없이 이어진 폐쇄형 사유지로, 뉴포트 출신 건축가의 설계와 마사 스튜어트의 인테리어를 자랑한다. 이곳 교외 개발업자가 미국 기자에게 설명한 것처럼, “오렌지 카운티는 미국 사람들에게는 지명이지만 중국사람들에게는 상표다. 조르지오아르마니가 상표인 것처럼 말이다”. 베이징 북쪽에는 신축 6차선 슈퍼 고속도로에 걸쳐 ‘롱비치’도 있다. "뉴욕타임즈“에 따르면, 롱비치는 중국에 있는 가짜 로스앤젤리스의 핵심이다. 홍콩에도 ‘팜스프링스’가 있다. ('슬럼‘ 책 153 페이지)




        입맛이 쓰기는 하지만, 브랜드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어떤 식으로 작동을 하는지 알 수 있다. 올림픽 준비의 일환으로 베이징을 새롭게 건설한다는 중국인들에게 중국적인 것은 감추고 벗어나고 싶은 것이다. 그들은 미국으로 대표되는 서구적인 것들로 바꾸어 버리고 싶어 한다. ‘오렌지’가 아닌 ‘오린쥐’라고 애써 발음하여야만 한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미국 프랜차이즈 레스토랑과 브랜드 상점들이 줄지어 있고, 그 곳의 고객인 백인들이 바로 베이징 건축의 성과를 보여 주는 목표이자 지표가 된다.




        지난 2005년 베이징에 출장을 가서 주재원으로 있던 친구 집에 머무른 적이 있다. 그 친구의 집이 바로 위에서 묘사한 것과 같은 폐쇄형 사유지였다. 롱비치인지 오렌지 카운티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육중한 철문과 높은 담벽 위에 철조망이나 고압전선까지 두른 것도 모자라 단지 곳곳에 경찰과 구분이 되지 않는 제복을 입은 경비원들이 순찰을 도는 그런 곳이었다. 주재원을 비롯한 외국인들과 중국인으로는 고위 공무원과 기업인들이 많이 산다고 했다.




        푸미아오(朴缪)란 중국 출신으로 현재는 미국의 하와이대에서 가르치기도 하고 유사한 프로젝트에 참가하고 있는 건축가 겸 교수는  2003년에 이런 폐쇄형 주택단지를 “최근 도시계획 및 도시 설계에서 가장 의미 있는 개발”이라고 했다. 이 교수의 원문을 보지는 못했는데 긍정적으로, 문자 그대로 말씀을 하신 것이라면 이는 소수의 부자들을 위한 부패한 국가를 위해 거의 곡학아세하며 봉사한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제재 없이 날뛰는 자본주의도 용서하기 어렵지만, 부자들을 위해 존재하는 부패한 국가는 그보다 더 악독한 것이다. 상황이 이 정도면, 체제 개선을 위한 노력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 - 앨런 길버트와 피터 워드 (‘슬럼’ 책 71 페이지)




(도시빈민들도) 살인적인 도시계획에 지쳤고, 자기네를 인간방해물이라고 정의하는 근대화의 오랜 어휘에도 지쳐버렸다(‘인간방해물’이라는 말은 다카 당국이 1970년대에 중앙 비동빌에서 9만 명을 내쫓으며 사용했던 표현이다). (‘슬럼’ 책 133 페이지)




        자기 나라의 빈민들에게는 ‘인간방해물’이라는 낙인을 찍고, 사회의 최고위층 소수를 위한 공간에는 미국식 브랜드를 가져다가 쓰는 현실이다. 국가나 지역 사회도 하나의 브랜드일진댄 인간에 대한 존중이 없이, 재산의 많고 적음에 따라서 그들을 배척하는 브랜드에 미래는 없다. 어느 이름을 가져다가 브랜드라고 붙이고 외양을 화려하게 꾸민다고 해도 자신의 주체성이 없어지고, 수많은 다른 사람들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은 무고한 희생 위에서 브랜드가 제대로 서는 법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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