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과 최고경영자

 

        올해 초에 원로 기술인들의 조찬모임에 가서 강연을 할 기회가 있었다. 강연 사회를 맡으신 분께서 나의 경력 소개를 위하여 내가 보내드린 소개 자료를 하나씩 짚으며 확인을 하시다가 깜짝 놀란 듯한 표정을 지으며 약간 소리를 높여 물어 보셨다. “아니, 동양사학과를 나오셨군요! 어떻게 가능하죠?” 우리나라에서 학부의 전공에 따라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비율이 얼마나 될 것인가를 얼추 추측하매 그 분께서 심하게 놀란 듯한 모습이셨지만, 공학을 한 분들의 경우 그 비율이 다른 부문과는 비교할 수도 없게 높을 것이라는 점에서 이해가 가는 구석도 있었다.  

 

        사실 이런 식의 질문을 나의 고객들이나 모임에 가서 심심치 않게 받는 편이었다. 특히 컨설팅이나 자문을 위하여 최고 경영층을 만났을 때, 일종의 비공식적인 테스트와도 같은 형식으로 학부의 전공 관련한 질문에 부딪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길게 얘기할 필요 없이 준비 해 놓은 대답이 있었다. “HP, 곧 휴렛팩커드(Hewlett Packard)의 CEO였던 칼리 피오리나(Carly Fiorina)가 학부에서 역사를 전공했습니다.” “아, 그래요?!” 이 대답 하나로 전공 관련하여 나에 대한 그 분의 의구심(?)은 사라졌다.  

 

        역사를 넘어서 인문학을 전공했던 유명 CEO들 몇 명을 덧붙여 말씀을 드렸다. 그 중 한 예로 내가 처음 직장생활을 삼성전자에서 시작할 때, LG전자의 전신인 금성전자의 CEO로 철학과 출신이었던 이헌조 사장을 들었다. 마침 사회자 분께서 예전에 이헌조 사장과 함께 근무를 하셨다고 하면서 반가워하셨다. 경쟁사의 CEO였다는 것을 떠나서 내가 이헌조 사장을 각별하게 기억하는 것은 그 분의 연설원고를 경쟁사 분석 차원에서 보게 된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당시 금성전자의 과장급 중간관리자를 대상으로 한 강연이었는데, 이렇게 시작하고 있었다.

 

     "오늘 여러분들께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어제 밤에 무척 고민을 하면서 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당시 금성전자는 격렬한 노사분쟁에 휩싸여 있던 시기였다. 신입사원 연수 교육 중 프로그램의 하나로 지방사업장 방문 때에 보았던 수십일째 파업 상태임을 알리고 있던 구미의 금성전자 공장과, 수많은 여공들이 발랄하게 드나들던 삼성시계 공장의 대비가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 있던 시절이었다. 상황이 그러했던 만큼 노사관계에 관한 주의를 주고 당부를 하는 자리였는데, 원고를 읽는 경쟁사의 내가 울컥할 정도의 느낌이 그 첫 구절에서 밀려 왔다. 상투적인 표현이기는 하지만 'CEO의 고뇌', 밤잠을 이루지 못하는 모습이 공감각적으로 느껴졌다. 그 원고를 나의 대학 같은 과 동기로 삼성전자에 함께 입사한 친구와 보면서, 서로 인문학을 전공했기에 이런 말이 나올 수 있는 거야 하면서 괜시리 뿌듯해 했다. 그 친구나 나나 그 시절에 윗분들 연설문 작성하는 업무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도, CEO 자신의 목소리가 그렇게 나온다는 자연스러운 일에 지나치게 감동했던 까닭이었을 지도 모른다.

 

     어쨌든 사회자 분의 나의 전공에 대한 의구심(?)은 눈 녹듯 사라졌고, 반대로 자랑스러운 훈장처럼 되었다. 공식적으로 나를 소개하는 한 대목에서 “박재항 소장님은 동양사학과를 나오셨습니다. 여러분들께서 너무나도 잘 아시는 칼리 피오리나가 박소장님과 같은 역사를 전공했다고 합니다.” 면접관처럼 안경 너머 꼬장꼬장한 눈빛을 보내시던 참석하신 분들의 표정이 밝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당연히 그 날의 강연은 매우 부드러운 분위기에서 격려성 질문들까지 이어지면서 끝났다.

 

     작년 초 서울대학교에 <최고경영자를 위한 인문학 과정>이 처음으로 열렸다. 다른 학교에서 먼저 시작한 사례가 있는지 모르겠으나, 처음 과정을 개설하면서는 주관대학인 인문대학에서 걱정이 많았던 것 같다. 얼마나 절실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알음알음으로 나에게까지 수강할만할 사람을 추천해 달라는 연락이 왔었다. 그런데 세 번째 기수가 시작하는 올해의 경우는 3:1 이상의 경쟁률에 웬만한 기업의 CEO나 명성이 있는 경영자가 아니면 감히 들어올 수가 없었을 정도로, 점잖기 그지 없는 교수 한 분이 "대박을 쳤다"는 표현을 스스럼없이 할 정도로 인기를 끌고, 화제가 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인문학과 경영의 접목을 시도한 책자나 그를 설파하는 강연들이 눈에 많이 띄고 있다.

 

     인문학이 너무나 갑작스럽게 경영의 세계에서 범람하고 있는 것 같아서 두렵다. 이미 학교 평가나 정부나 학술진흥재단 보조비 타기 경쟁 등에서 일부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기는 하지만, 경영의 잣대로 인문학마저 평가되는 것 같아서 불편하다. 인문학자들이 경영 쪽으로 넘어오기 보다는, 경영자들이 인문학 쪽의 식견을 갖추려 노력하는 것이 옳은 길일 것이다. 그런데 아직은 괜찮지만, 인문학의 경영에 대한 구애의 형태가 나타나려는 것 같은 세태가 걱정스럽기 그지 없다.

 

<蛇足> 위에서 언급한 공학계 원로들 대상의 강연이 끝난 후 몇몇 분들과 명함을 주고 받으며 인사를 나누었다. 그 중에 유난히 키가 큰 분이 계셨다. 키도 키지만 워낙 수강 태도가 좋아서 눈길을 끈 분이었다. 서울대학교 공대 교수이셨다. 까맣게 잊고 있다 이 글을 쓰면서 그 분 생각이 갑자기 났다. 김도연 현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이었다. 느닷없이 장관으로 선임되고, 근래 급격한 정책 변화 등으로 매스컴을 한창 탈 때도 전혀 연계를 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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