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명품을 갈망하는가?
“예술과 문화를 향유하며 여성의 아름다움과 행복을 지원하는 것”이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라고 말했던 크리스챤 디올이 최근 논란의 중심에 있다. 왜냐하면 한국여성 비하 논란으로 번진 ‘유흥가 앞 명품녀’ 사진 전시때문이다. 이에 대해 사과하고 이 작품의 전시를 중단하기로 했지만 브랜드이미지에 대한 타격은 무척 크다. 명품브랜드에서 이러한 전시를 하기로 결정한 것이 나로서는 참 아이러니다. 어떤 의도로 전시를 기획한 것인지 들어나 보고싶은 심정.

사진이 주는 메시지는 한국여성을 폄하한 듯한 느낌을 주어 사실 불쾌하다. 모든 한국여성이 그런것이 절대 아니기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아주 일부지만, 명품에 대한 막연한 환상으로 자신의 분수에 맞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가식’과 ‘허영’의 유혹에 사로잡히는 여성도 있기에 많이 안타까운 심정이다.

어울리지 않는 명품을 드는 것은 자신의 초라함을 가려줄 화려한 가면을 쓰고 싶어하는 욕망의 표출일수도 있다.

가면..가식….내가 우리가 참 버리고 싶어하지만 잘 안되는 것들!

우리는 왜 가식적인가? 우리는 왜 분수에 넘치는 명품을 갈망하는가?



우리는 남들에게 자신이 돋보이기를 갈망한다. 비록 가진것이 없어도 가지것이 많아보이기를 바라고 덜 아름다워도 더 아름다워보이기를 갈망한다. 그래서 명품을 하면 명품이 될거라는 착각을 한다.

남들 앞에 내가 명품으로 드러내기를 원하는 경우가 많다.

반면에 우리는 남들 앞에 나를 드러내지 않아도 되는 공간에서는 지나치게 용감해진다. 익명이 보장된 공간에서는 지나치게 도를 넘는 사람들이 많다.

인터넷이란 가상공간에서 악플을 다는 심리는 어쩌면 평소 가면으로 억눌린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배설심리 아닐까. 아무도 내가 누구인지, 내 행동거지를 신경쓰지 않는 공간에서는 맘에 없는 예의를 갖추지 않아도 되는 거다. 그게 도가 지나치면 욕설을 하고, 남을 비방한다.

실제로 이를 증명하는 실험이 있었다. 1350명의 아이들에게 할로윈 변장을 하고 시애틀 곳곳의 가정을 찾아가 사탕을 얻어오게 했다. 아이들은 혼자 혹은 두세 명 그룹으로 움직였다. 실험에 동원된 20채의 집에서는 실험협조자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아이들의 50퍼센트에는 이름을 물어보았고, 나머지 50퍼센트에게는 이름은 물론 신상에 관한 그 어떤 것도 묻지 않았다.

집에 들어와 사탕을 받은 아이들에게 잠시 자기들끼리만 있게 두고, 실험협조자들은 자리를 비웠다. 그러자 집단으로 움직이고 이름을 물어보지 않은 아이들의 절반 이상이 탁자위에 무방비 상태로 놓인 사탕과 돈을 훔쳤다. 반면 혼자 왔고 이름을 밝힌 아이들이 훔친 경우는 10분의 1도 되지 않았다.

내 이름을 밝히는 순간 남들의 시선을 더 의식해야 한다. 그러니까 도둑질을 할 수 없게 된다. 하지만 나란 존재를 숨긴 아이들은 사탕을 훔치고자 하는 유혹에 더 많이 휘둘렸다.

샌프란시스코의 필모어 스트리트의 한 카페에는 이런 포스터가 있다.

‘가게 안에서는 가면을 벗어주세요! 즐거운 할로윈데이를 위해서!’그 이유는 간단했다.

“손님들이 가면을 쓰면 예의가 없어지고 막나가거든요! ”

결국 가식이 필요없는 상황은 혼자 있을 때, 그리고 나란 존재를 다른 사람들이 전혀 몰라볼 때이다.



집에 혼자 있는 여성이 명품백을 드는 경우는 거의 없으므로!​

하지만 진정한 명품은 ‘나 명품!’이라고 호들갑 떨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베어나온다.

그리고 느낀다. 비록 처음에는 몰라봐도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명품의 고귀한 가치는 더욱 반짝거림을…..​
우리는 왜 명품을 갈망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