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브랜드 아메리카(Brand America)'와 영어

 

       말도 많았던 솔트레이크(Salt Lake) 동계올림픽 스폰서 기업들의 마케팅 활동을 조사하기 위하여, 올림픽이 거의 막바지로 접어 들 때 솔트레이크에 갔었다. 번잡해진 올림픽 기간 중의 솔트레이크를 피해, 동부의 친척들을 만나고 온다던, 시니컬하기 그지 없던 미국인이 비행기 옆 좌석에 앉아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며 갔다. 동부에서 공부를 하고 그 쪽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가, 동부의 번잡함이 싫어서 서부의 솔트레이크로 왔는데 이 놈의 동네까지 망할 놈의 올림픽을 한다고 불평을 해대는 외모 자체도 60년대 히피의 마지막 떨거지-미국에서는 잔재(殘滓)란 의미로 'leftover'란 표현을 많이 쓴다-와 같은 인상을 주는 대학 교수였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솔트레이크라는 도시 얘기가 나오지 않을 수 없고, 그러자면 몰몬(Mormon) 얘기가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몰몬 신자가 아닌 관계로 더욱 시니컬한 듯한 그 교수가 한국에도 '그 놈의 몰몬 애들'이 전도하러 많이 나가냐고 물었다. "그럼요. 내가 어렸을 때 한국에서 본 미국인들은 딱 두 부류였죠. 하나는 평화봉사단(Peace Corps), 나머지는 몰몬 전도사. 몇몇 고장 애들에게는 한 부류가 더 있었죠. 미군, 바로 G.I."

 

양귀(洋鬼)의 나라

 

      내가 최초로 만난 미국인으로 기억되는 이가 평화봉사단원이었다. 경기도 남쪽의 어느 시골 읍내에서의 초등학교 2학년 때, 당시 20대 초반이었던 막내 삼촌 친구의 손에 이끌려 어느 식당에 갔더니 구석배기에 낯익은 막내 삼촌의 다른 친구들 사이에 털복숭이 양코배기, 지금 생각하면 장발에 수염을 기른 전형적인 70년대 초반 스타일의 서양귀신, 바로 양귀(洋鬼)가 있었다. 삼촌 친구들이 장난스런 표정을 지으며, 그 양귀에게 인사하라며 내 손을 잡아끌었다. 한사코 반항하다가 반강제적으로 악수를 하고는, 막내 삼촌 친구들의 웃음소리를 뒤로 하고 울면서 도망치듯 그 자리를 빠져 나왔다. 집에 돌아와 그 얘기를 했더니, 어른들 말씀이 동네 중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미국인'이란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컬하게도 양귀와 악수한 사실은 한동안 내 자랑거리가 되었다. 나는 울면서 도망친 얘기는 빼고, 미국인과 악수를 했다는 사실을 친구들에게 자랑스럽게 떠벌리고 다녔고, 그러면 친구들은 나를 선망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고, 어른들은 무척 대견한 일을 했다는 듯이 칭찬까지 곁들여 주곤 했다.  


      아해에게 두려움을 안겨 주고, 울음까지 터뜨리게 하는데, 그것을 또 자랑스럽게 떠벌리게 만드는 모순의 존재. 애증(愛憎)이라고 표현할 수도 없는 그런 미묘한 의미의 뭉텅이가 바로 미국, 미국이었다. 털복숭이 양귀를 만나서 터뜨린 울음과 그 직후의 또래들에 대한 자랑스러움은 어떻게 보면 징그러운 뱀을 억지로 만지게 된 아이의 소박한 감정의 표현과 같은 종류이었을 게다. "너희는 뱀 만져 본 적 없지? 별것 아니야!"하고 우쭐대는 식의, 본인이 느꼈던 두려움이란 이미 사라지고, 자랑스러운 기억으론 만들어진 기억. 어른들의 칭찬은 용감한 일을 했다는 것에 덧붙여 약간의 사회성이 깃들여 있다.

        즉, 미국과 관련된 것이면 거의 무조건적으로 좋다, 좋아해야 한다는, 막 초등학교 생활을 시작한 아이에게 '우리의 우방/맹방-미국'이라는 반공도덕 교과서의 주입식 가르침과 어울려 이승복 소년의 입을 찢은 빨갱이 북한 괴뢰도당에 대한 대척점에서 미국이라는 존재를 인식시킨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는 서로가 커뮤니케이션 할 필요가 없다. 존재 자체로 시혜를 베푸는 것과 같으며, 시혜를 입는 쪽은 머리를 조아려야 하는 상태였다. 영어란 직접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소수만을 위한 특권층의 상징이자 전유물이었다.

      

꿈의 나라 - 영어에 휘둘리며, 미국인의 인정에 감동하며

  

        중학교에 입학한 누이가 가장 부러웠던 것은 누이가 영어를 읽는다는 사실이었다. 다른 한국 책들이야 어떻게 하든 비슷하게 나가거나 내가 훨씬 더 잘 읽고 있다고 생각을 했는데, 내가 전혀 모르는 꼬부랑글자를 소리 내어 읽는 누이에게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저 그 소리를 경탄의 표정으로 쳐다보며 듣거나, 한글 단어를 대며 그것을 영어로는 무어라고 하느냐 물어 보는 정도였다. 그러다가 나도 중학교에 입학하여 영어를 공부하게 되니 상당한 자부심을 느꼈고, 영어도 중학생 수준으로는 최소한 성적은 괜찮게 나왔다.

         중학 2학년 초반 어느 날 광화문의 한 문방구에서 공책을 사고 있는데, 미국인-실제 법적으로 미국인인지는 확실치는 않지만, 하여간 머리 노랗고 코 큰 사람은 미국인라고 불렀다-하나가 선반 앞에서 이것저것 고르다가 내게 다가와 영어로 물어 보았다. "You can speak English?" 중학 2학년으로서도 못 알아들을 것 하나도 없는데, 나는 그냥 얼어붙어 있었다. 분명히 의문문인데 평서문과 같이 주어로 시작을 하다니. 그렇게 물어 보는 문장에 대해서는 어떻게 답해야 하나. 그 미국인은 나의 대답을 좀 기다리다가 어깨 한 번 으쓱하고 그냥 가 버렸다. 선생님께 여쭈어 보니, 문법적으로는 그렇지 않은데, 회화에서는 그렇게 쓴단다. 영어가 나아가 미국이 법대로만 되는 것은 아니란 진리를 깨우치는 순간이었다. 한편으로는 영어에 대한 자신감이 없어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알량하나마 미국에 대해서 나름대로 이해를 하고 밑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된 것은 '베이브 루드(Babe Ruth)'를 통해서였다. 중학교 1학년 겨울방학을 시작하면서 어머니께서 샘터사에서 발간된 당시 동아일보 기자였던 김광희 씨-우리 나라 최초의 야구전문기자라고 할만한 분이다-가 번역한 "베이브 루드 전기"와 김동길 교수가 지은 "링컨 전기"를 사 주셨다. 베이브 루드 책은 한 번만 보면 되고, 링컨 전기는 여러 차례 읽으라는 당부와 함께. 실제는 베이브 루드 책은 외울 정도로 수없이 되풀이하여 읽었고, 링컨은 한 번 정독하고 이후 부분부분 맘에 드는 곳을 찾아 읽었다. 베이브 루드 전기를 통하여 당시의 야구 선수들과 메이저 리그 뿐만 아니라 미국 동북부와 중서부, 특히 맨하탄과 뉴욕 근처의 지리에 익숙해졌다. 선수들의 배경과 각 팀들 팬들의 특징 등을 통하여 다인종 사회로서의 미국과 지역별 특성까지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베이브 루드의 생애를 연대기적으로 훑어 나갔기 때문에 20세기 전반기의 미국 역사의 감을 잡을 수 있었다. 미국에 대한 나의 진정한 최초의 교과서는 베이브 루드 전기였다. 이 얘기를 미국 친구들에게 하면 그 시기, 그 오지(奧地)에서 그렇게 했느냐는 식의 감탄 섞인 반응을 보인다. 사실 그런 얘기를 서로 낄낄대며 나누던 친구가 오직 하나 있긴 했다.


      중학 3학년 때 가장 친했던 단짝친구는 어린 나이였지만 미국행을 열렬히 꿈꾸었다. 창문 너머 멀리 여의도를 바라보면서 "야, 나는 여의도를 보면 맨하탄이 생각나"식의 뜬금없는 소리를 하다가, 어느 날 드디어 미국에 갈 방법을 찾아냈노라 흥분을 하여 얘기를 했다. 이모네 가족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는데, 이모의 양자로 입적을 하여 함께 가겠다는 얘기였다. 그 친구는 자신의 계획을 진지하게 부모님께 말씀을 드렸고, 부모님은 한 번 큰 소리로 허탈하게 웃으시고 가타부타 아무 말씀도 없으셨단다. 두어 번 더 부모님께 그의 계획을 말씀 드렸지만 똑같은 반응을 얻은 후, 그 짓을 멈추었지만 그 놈의 미국행 꿈은 중학 졸업할 때까지는 사그라지지 않았었다.  


      1979년 고등학교 1학년 때, "뉴스위크(News Week)" 잡지에서 '한국인들이 몰려온다(Koreans are coming)'는 제목과 함께 커버스토리로 한국의 경제 발전을 다룬 적이 있었다. 신문과 방송에서도 많이 떠들고, 학교에서도 교장 선생님 훈시에서 장시간 그 기사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경제만을 외쳐 대며 모든 것을 억압하던 당시 정권의 대국민 홍보의 일환이었겠지만, 내게는 한국이 그만큼 경제 발전을 이루었다는 것보다, 그 발전을 '미국이 인정'해 주었다는 것이 더욱 뿌듯하고 고마웠던 것 같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그런 마음 아니었을까? 당시의 담임선생님께서 뉴스위크보다 훨씬 크고 권위 있는 타임(Time)지에 표지인물로 박정희 대통령이 실릴 지도 모른다는 말씀을 그 기사와 연결시켜 해주셨다. 그 즈음에 타임에 ‘세계의 독재자들’이란 기사가 실렸는데, 그 첫 번째로 필리핀의 마르코스가 뽑혀 애석하게도 그가 표지에 나왔는데 두 번째로 선정된 우리 대통령이 곧 1위로 올라가 표지를 장식할 것이란 당시 상황으로는 위험천만의 농담을 하셨는데, 반에서 몇 명은 우리 대통령의 저력을 기대하며 우리가 미국에게 다시 한 번 인정을 받는 기회가 올 것이라고 멋도 모르고 고무되기도 했다.

 

매국노의 혀는 잘 돌아간다

  

        '미군에 증원된 한국군'이란 명칭의 카투사(KATUSA)로 병역의 의무를 마치고, 1987년 가을 학기에 학교로 돌아왔다. 복학생에게 문화적 충격이란 표현을 쓸 정도로 낯선 풍경중의 하나가 있었다. 후배들이 과 도서실에서 토플, 생활영어 등의 책을 놓고 '영어공부'를 하는 것이었다. 군대 가기 전까지 영어 공부를 그렇게 드러내 놓고 한다는 것은 암묵적인 금기사항이었다. 선배들로부터 딱히 이유를 들은 것은 아니지만, 따져 보면 영어는 취업 혹은 다른 실용적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 순수 학문을 하러 대학에 들어온 자, 혹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한 몸을 바칠 자로서 드러내 놓고 할 일이 아니라는 고결한 인문학도다운 이유, 그리고 군사정권에 대한 미국의 지원에 대한 비판 초기라는 역사적 환경과 함께 본고사 준비까지 했던 세대로서 영어 하나는 자신 있다는 학생들 사이의 전반적인 근거 없는 자존심이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 내었던 것 같다.  

      더더욱 놀라웠던 것은 토플 책을 꺼내 놓고 공부하던 후배들이 낯도 제대로 익히기 전에 스스럼없이 카투사를 다녀왔다는 이유로 영어 단어의 뜻이나 문장의 해석 따위를 물어 보는 것이었다. 당혹스럽기 그지없는 가운데, 우습게도 어렴풋이 '그 놈의 카투사를 나옴으로 해서 이제 사람들이 나를 볼 때는 미국이라는 것과 연결시켜서 보겠구나'하는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예감이 딱 틀렸다고 단정하기 힘든 그런 행적이 자의반타의반으로 그 후에 이어졌다.


      어린 시절 '양귀를 보았을 때 두려워서 그 자리를 울면서 피했지만, 자리를 모면한 이후에는 친구들에게 자랑한' 것처럼 미국에 대한 인상이나 인식은 항상 상반된 모습을 띄는 경우가 많다. 대학교 안에서는 끝까지 영어 공부를 하지 않는 척 했지만, 학교 밖에서는 당시의 상황을 고려하면 나름대로 열심히 학원도 몇 군데 다니면 열심히 영어 공부를 했고, 미국에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는 냥 얘기를 하면서  버젓이 미군들과 함께 하는 카투사로 군 복무를 했다. 영어 공부를 상대적으로 평균보다 열심히 한다고 하면서도 동양사학계의 태두로서 2000년 봄 별세하신 무섭기 그지없었던 민두기 선생님의 말씀을 나름대로 해석하여, 영어 공부에서의 한계선을 설정해 놓고 있었다.  


      중국사를 전공하겠다고 동양사학과로 진입하여-당시에는 역사계열로 대학 신입생들을 뽑고, 2학년에 올라가면서 동양사, 서양사, 국사, 고고미술사학 등으로 전공을 정했는데, 그것을 보통 전공하는 학과로 '진입'한다고 불렀다-, 오리엔테이션을 받으면서 보니, 외국어 부담이 보통이 아니었다. 영어, 중국어, 일어가 필수인 것은 물론이고, 한문 고전 해독에다가 불어와 독일어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다. 잔뜩 주눅이 들어 있는데, 민두기 선생님께서 우리들의 부담을 심적으로나마 경감시켜 주려 하셨는지는 몰라도,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의 주(駐)폴란드 대사를 지낸 박석윤에 대해서 말씀을 하시면서, 외국어 공부를 그렇게까지 열심히 할 필요는 없다(?)는 인상을 심어 주셨다. 말씀인즉슨, 영국에서 공부하여 정통 영국식 영어를 쓰는 박석윤 대사의 영어를 어느 일본 외교관이 극찬을 하자, 다른 일본인이 '매국노의 혀는 잘 돌기 마련이오'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시면서 외국인으로서 외국어를 해당국 사람처럼 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들이 인정할 수 있는  지식을 가지고 할 말을 확실하게 하면 된다는 말씀을 이어 주셨다.  


      선생님의 말씀 중에서 가장 실천하기 쉬운 미국놈처럼 영어를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바로 받아들여 지금까지 '그럭저럭' 수준으로 영어를 하고 있고, 특히 발음에 있어서는 '(너희들이) 알아서 들어라' 하는 식으로 하고 있다. 내 나름대로는 그런 모습이 꿋꿋해 보이고, 큰 불편도 느끼지 못하여 바꿀 생각이 별로 없다. 그리고 상대하는 외국 친구들, 심지어는 내가 설득을 해야 되는 사람도 영어를 모국어로 하지 않는 외국인으로서의 나를 인정하고 잘 들어 준다. 그런 발음으로 영어를 할 때 문제가 되는 경우가 있기는 하다. 내가 잘 모르는 한국인이 끼고, 그를 위해 통역까지 담당하는 경우이다. 뜻을 통하게 하는 것은 별 문제가 없는데, 굴리거나 날아가는 영어 발음이 나오지 않으니 미국 애는 가만히 있는데 한국 사람이 자꾸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한국 사람일수록 미국인이 내뱉는 서툰 한 마디 한국어에 박장대소, 한국말 잘한다는 칭찬을 과장되게 남발하며, '제 자신의 서툰 영어를 용서해 주세요'라는 '과공비례(過恭非禮)'의 전형을 보여 주곤 한다. 그러다 보니 한국어로 발표했을 때 시큰둥했던 내용을 영어로 발표하면 박수를 보내는 경우를 무수히 보아 왔다.

 

      나이지리아 출신의 소설가인 치누아 아체베(Chinua Achebe)는 서구의 비평가들이 "아프리카 작가를 다소 미흡한 유럽 작가로 보려는 대형(大兄)의 오만"을 드러낸다고 했다. 유럽과 아프리카를 미국과 한국으로 치환시켜도 성립이 될 듯 싶다. 그리고 '대형'이란 말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미국이란 브랜드의 성격을 규정할 때 기준이 되기도 한다. 죠지 오웰(Georgy Owell)이 '1984'에서 묘사한 통제의 성격이 강한 'Big Brother'에서 강렬한 카리스마와 인자함이 어우러지는 중국영화에 등장하는 '따거(大哥)'까지 '대형 아메리카' 브랜드의 스펙트럼은 넓다.


      그리고 어떤 의미로 '대형 아메리카' 브랜드를 정의하는가에 따라 그에 비추어진 내 자신의 브랜드가 결정되기도 한다. 그런데 어떤 경우든 혹시나 대형이 대형의 역할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닌지, 대형의 역할을 팽개치지나 않을까 지레 걱정하여 과잉대응을 보이는 일은 좀 없었으면 한다. 그리고 그들을 따라 잡는다는 미명으로 영어 외길로 달리는 광기 어린 모순의 행진도 모대 영문학과 윤지관 교수의 얘기를 보면서 이제는 좀 접어주었으면 좋겠다. 따라 잡을 수 없는 것도 문제이지만, 그런 행태가 투영되어 규정되는 우리 자신의 브랜드가 민망스럽다.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사람의 영어 구사력은 아무리 숙달된다 하더라도 한계를 가지게 마련이며, 모국어로서의 영어 사용자에 비해서 떨어지게 마련이다. 영어를 구사하는 기술로만 본다면, 우리는 영원히 모국어 구사자의 아래에 머물 수 밖에 없다. 영어 구사력으로 얻는 알량한 경쟁력은 언제나 진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경쟁력이지 그것이 경쟁력의 본질일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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