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뒤에 남은 자

-The Man Who Stayed Behind-

 

      1946년, 일본이 항복한 직후 시드니 리텐버그(Sidney Rittenberg)라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North Carolina) 주의 찰스턴(Charleston)이란 곳 출신의 미군 병사 하나가 중국으로 배치를 받는다. 노스캐롤라이나의 찰스턴이라는 곳은 남북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충돌이 벌어졌던 썸터 요새(Fort Sumter)가 있는 남부의 경제 중심지 역할을 하던 항구도시였다. 지금도 가보면 고풍스런 포도(鋪道)에 예전 남부의 영화를 간직하고 있는 듯한 대저택들이 관광객들의 눈길과 발길을 끄는 곳이다. 그만큼 흑백간의 갈등이 남북전쟁 이후에도 지금까지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더라도 계속되고 있는 곳이다. 리텐버그는 그런 환경에서 일찌기 모든 사람이 동등한 대우를 받으며 살도록 하는데 기여를 하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미국 공산당원으로 활동을 한 의식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2차대전 직후 부정부패와 무능의 종합결정판과도 같았던 국민당 정권 하 중국에서의 부조리를 직접 보면서, 그가 중국공산당에 관심을 가지고 그들을 돕게 된 것도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 하겠다. 결국 그는 UN 소속 구호단체의 일원으로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중국에 남고, 중국공산당원들과 더욱 긴밀한 관계를 가지게 되면서 그 자신도 중국공산당원이 된다. 그가 중국공산당원이 된 때는 중국공산당의 장래가 지극히 어두웠던 1946년 연안(延安)에서였다. 곧 그가 물질적 호사나 사회적 지위를 쫓은 것이 아니라 그는 미국에서부터의 평등한 사회를 만들겠다는 그의 이상을 쫓아서 중국공산당원이 된 것이었다.

 

      그는 연안에서의 마지막 기간을 모택동이나 주은래와 같은 중국 공산당 지도자들과 함께 논쟁하고 댄스와 여흥을 즐기기도 하면서 그야말로 우의를 다지면서 지낸다. 이후 국민당군이 연안으로 밀고 들어 오면서 그는 세수대야 하나를 요강, 본래의 세수대야, 식기로까지 쓰는 30년대의 대장정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처절한 후퇴의 길을 중국 공산당원들과 함께 한다. 그러면서 그의 혁명에 대한 열정과 중국인들과의 우정은 더욱 깊어 갔고, 대외선전분야에서 그의 입지도 넓어져 갔다.

 

      중국공산당이 최후의 승리를 목전에 두고 있던 1949년초, 북경에서의 외국에 공산정권의 수립을 알릴 선전활동의 꿈에 젖어 있던 그는 졸지에 외국인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6년간 수감생활을 하게 된다. 한참 후에야 알려진 사실은 그와 친했던 미국의 친공산주의 저널리스트인 안나 루이 스트롱(Anna Louis Strong)이 소련에서 간첩 행위를 했다는 혐의로 체포되면서 소련측이 그녀와 친했던 사람들을 체포하도록 중국공산당에 압력을 넣었던 것이 원인이었다. 그런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6년간에 이르는 인간 이하의 생활을 겪으며 수감생활을 견딘 그를 풀어 주면서 공산당에서는 착오였다는 얘기만을 변명 같지도 않게 한다.

 

      이후 그는 북경라디오방송국에서 근무하면서 공산당 지도자들과 관계를 회복하고, 결혼하여 3녀1남을 낳고 행복한 생활을 영위하며, 얼마 되지는 않지만 북경에서의 외국인 사회의 주축 인물이 된다. 그리고 문화혁명 초기에는 모택동의 뜻을 제대로 해석하는 인사로 전국적인 각광을 받고, 북경방송국이 내분으로 집단지도체제로 돌아서면서 3인 대표 중 한 사람의 지위에 까지 오르게 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연안시절 곧잘 그와 댄스를 함께 하기도 했던 모택동의 처이자 문화혁명의 실질적 주도자였던 강청의 미움을 사서 그는 다시 미제국주의의 스파이라는 똑같은 혐의를 받고 독방에 갇히게 된다. 그의 이 두번째 감옥생활은 리처드 닉슨(Richard Nixon)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하는 청천벽력의 시건과, 주은래, 모택동과 같은 그와 친분이 있는 중국 지도자들이 사망하고, 4인방이 몰락하며 그 대표자인 강청이 그가 있는 감옥소에 갇혀서 한 지붕 아래에 있기까지 10년이 넘게 이어졌다.

 

      두 차례나 16년 이상을 그렇게 억울한 생활을 했지만 그의 중국 공산당에 대한 믿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등소평이 본격적으로 집권하기 시작한 그의 두번째 석방 후 중국공산당과 그에 기초한 행정부의 부패와 그에 따른 사회 혼란, 웨이징셍(魏京生)으로 대표되는 체제 반대인사를 탄압하는 모습에 대해 실망한 그는 결국 35년만에 미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심을 한다. 귀환 초기에 끼니를 걱정하던 이 부부는 이제 중국으로 진출하는 미국 기업들에 컨설팅 서비스를 제공하며 생활의 안정을 찾고 자녀들도 모두 결혼하고 미국에 자리를 잡았다.

 

      이 기구한 인생역정을 기록한 책이 바로 사진에 나온 것과 같은 "The Man Stayed Behind"(Simon & Schuster, 1993)였다. 7월말의 미국 출장 길에 산 것인데, 출장 후유증에 냉방병까지 겹쳐 주주에 휴가를 내고 읽기 시작했다가 너무 재미있어서 결국 할 일이 태산인데 이번 주말을 온통 이 책을 읽는데 바치고 말았다. 집에서 읽자니 자꾸 졸게 되고 집중이 되지 않아 한강고수부지까지 혼자 들고 나가서 강바람을 쐬면서 결국은 다 읽고 집으로 들어왔다.

 
     이 책에서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저자가 어처구니없게 고난을 당했지만 그것을 자신에게 강요한 중국공산당과 중국에 남기로 한 자신의 결정에 대한 어떤 후회도 없다는 것이다. 그에게는 즉각적인 행동의 결과 이상의 '자신의 행복을 위한 가장 확실한 길은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 노력하는 것(The surest way to happiness for yourself is to fight for happiness of others)'이란 삶의 철학과 목표가 있었다. 중국공산당의 정권 쟁취, '모택동 사상의 정통한 해석자'와 같은 가시적이고 매듭이 지어지는 목표만을 그가 가지고 있었다면 그 16년 간에 걸친 감옥살이를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이름도 중국공산당 정권 후에 북경에 남기로 했던 지금은 우리가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대부분의 몇몇 외국인들과 함께 잊혀졌을 것이다.

 

      정권 쟁취는 제품이나 기업의 마케팅 측면에서 보면 점유율이나 매출 1위를 하겠다는 목표와 비슷하다. 그런 물질적인 순위나 수자 이외에 더 길게 지속적으로 이어 나갈 꿈과 이상이 제품이나 기업에 담겨져 있고, 구성원들에게 공유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브랜드이다. 그리고 브랜드는 시드니 리텐버그의 꿈이 그가 16년 억울한 감옥살이 고난의 세월을 넘기는 바탕이 되었듯이, 기업이 위기 상황에 처할 때 그를 이겨 낼 수 있게 인도하고 이끄는 구원의 손길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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