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즈베리(Salisbury) 부인의 중국 방문기

 

     해리슨 솔즈베리(Harrison Salisbury)라는 2차대전 이후부터 90년대 초까지 거의 50년에 걸쳐 주로 뉴욕 타임즈(New York Times)를 중심으로 활동한  유명한 기자가 있었다. 그는 2차 대전 이후 뉴욕타임즈의 모스크바 특파원을 지내면서 소련 문제 전문가로서 자신의 필명을 날린다. 2차 대전의 결정적 전투 중의 하나인 900여일 간에 걸친 레닌그라드 공방전을 그린 『900 Days: The Siege of Leningrad』(1969)는 명저 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60년대 월남전의 와중에서 미국 기자로는 최초로 당시 북베트남의 수도인 하노이(Hanoi)로 날아가서 취재를 감행하여 이름을 떨쳤다. 소련과 주변 공산국가들과의 협력과 갈등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중국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여 월남전에서 중요한 영향력을 미치는 국가의 하나로 중국이 대두하면서 그는 70년대 이후에는 중국문제 전문가로서 수 권의 저서를 내게 된다.
 
      그가 중국전문가로서 자리를 매기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1973년 5월과 6월에 걸친 중국 방문이었다. 소위 핑퐁외교라는 것을 가지고, 중국과 미국의 굳게 닫혔던 서로간의 문을 열게 된 것이 1971년 4월이었다. 이어 헨리 키신저(Henry A. Kissinger) 당시 안보담당보좌관이 비밀리에 중국을 방문하고 마침내 닉슨(Richard Nixon) 대통령이 휴전 상태인 한국전쟁의 적국인 중국을 전세계를 놀라게 하면서 방문한 것이 72년 2월이었다. 당시 초등학교 3학년의 반공어린이에게는 이해할 수 없었던 사건이었다. 그리고 아무도 속 시원하게 설명해 주는 사람도 없었다. '미국 놈들 믿을 수 없다' 정도가 나중에 어른들이 내린 결론 같았다. 어른들이 내렸다기보다는 여러 가지로 미국 쪽에 책임을 넘겨 버리는 것이 유용한 점이 많았을 것이다.
 
      닉슨의 방문 직후부터 해리슨 솔즈베리는 중국 현지 방문 취재계획을 짜고, 요로요로를 통하여 노력을 한 끝에 일 년만에 그 결실을 보게 되어 중국 입국 취재에 대한 허가를 받아 1973년 5월에 중국에 발을 딛게 된다. 우리 나라로 보면 많은 경우에 가족과 함께 출장 여행을 한다는 것은 요원한 얘기지만, 그는 중국 당국으로부터 허가가 나올 기미가 보이자 미국에 있는 부인인 샤를롯 솔즈베리(Charlotte Y. Salisbury)을 홍콩을 통해 중국으로 입국하게 만들어, 약 5주간에 걸친 중국 취재여행을 함께 한다. 그 6주간에 걸친 여행기록을 당사자라고 할 수 있는 해리슨 솔즈베리는 기사만을 내 놓았는 데 비하여, 솔즈베리 부인은 뉴잉글랜드 출신의 가정주부다운 질박한 여행기를 내놓았다. 『China Diary』(Walker, 1973)라는 말 그대로 날자별로 정리한 중국 여행 일기였다.
 
      이 책은 시카고 근교의 에반스턴(Evanston) 지역의 헌 책방에서 샀다. 10여년 전에 뉴욕의 헌 책방에서 샀던, 1970년대 초에 독일 디벨트(Die Welt)지의 북경특파원이 된 남편을 따라서 북경에서 생활했던 미국 주부인 루이 피셔(Lois Fisher)의 중국 생활을 책으로 펴낸 『A Peking Diary』(St. Martin's Press, 1979)- 중국학자인 더크 보드(Derk Bodde)가 1950년에 낸 책과는 다른 것이다-에 나온 것과 같은 여성의 눈으로 본, 중국인들의 개방 전, 문화혁명 직후의 일상을 보고 싶은 기대에 이 책을 집어 들게 되었다.
 
      솔즈베리 부인에게 중국과 중국인은 자본주의에 전혀 오염되지 않은 청교도적인 생활이 공동체로 구현되는 이상향(理想鄕)의 오염되지 않은 청정한 사람들과 같은 모습으로 다가왔다. 물질적으로 부족한 듯 하지만, 서로서로 나누어 먹고 사용할 줄 아는 사람들, 지금 생각하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지만 쓰레기 하나 없이 깨끗한 거리들과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자신의 일행을 환영하는 어린 학생들의 모습을 그녀는 뉴욕의 현실과 비교하며 스스로 부끄러워 하게까지 된다. 또한 지식인과 육체 노동자 간의 차별이 없고, 지식인들도 일 년에 일정 기간동안은 육체노동에 종사하며, 그런 과정들을 힘겹게 생각하지 않고 진정으로 즐기며, 공동체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는 모습에서 그녀는 중국인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애정을 유명한 코미디언인 윌 로저스(Will Rogers)의 말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까지 이야기했다. "나는 (중국인 중에서) 진정으로 내가 싫어하는 사람을 만나 본 적이 없다."
 
      중국 체류 기간이 일주일이 넘어서면서 솔즈베리 부인은 조금씩 회의적인 시각을 품게 된다. 너무 판에 박힌 공장과 집단농장으로 이어지는 방문지와, 일률적인 공연 레퍼토리로 이루어진 환영 행사와 사람들의 태도에 조금씩 자신이 처음에 가졌던 이미지와 다른 점들을 보려고 애를 쓰게 된다. 아니 자연스럽게 그런 점들이 눈에 띄게 된다. 예를 들면 약간 한적한 관광지 한 편의 산등성이에서 쓰레기 더미를 보면서, 중국인들이 자발적으로 그렇게 쓰레기를 버리지 않고 청소를 하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한창 치안이 불안했던 70년대의 뉴욕시와 비교를 하여, 금붙이가 길에 떨어져 있어도 아무도 줍지 않았을 것 같은, 또 그렇게 도둑이 없다고 얘기했던 중국의 어느 마을에서 새로이 조성한 농장에 쳐져 있는 철조망 울타리를 보고는 꼭 그렇지 만은 않은 것 같다며 의문을 품게 된다.
 
      그들이 들렀던 각 도시마다에서 보여 준 공연은 문화혁명 기간 동안에 중국 문화의 주도자로 중국 문화 전반을 쥐락펴락했던 강청(江淸)이 소위 혁명가극으로 인정을 했던 『백모녀(白毛女)』, 『홍색낭자군(紅色娘子軍)』에 거의 국한되었다. 이 공연들에 대규모 공사나 역대 유물들의 거대 발굴공사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상영되었다. 처음 그 가극들의 혁명적인 내용에 공감하던 솔즈베리 부인은 같은 공연이 다른 식으로 반복됨에 따라서, 여자 무용수들의 화장이나 합창단의 기량 등과 같은 부분에 대해 앞서 보았던 공연들과 비교를 하며 나름대로 비판하게 된다.
 
      중국에서의 마지막 기착지인 광주(廣州)에서 솔즈베리 부인은 다음과 같이 중국측의 환대(?)에서 풀려 난 것에 조용히 만족스러워 한다.
"우리의 공식적인 일정은 상해(上海)에서 끝났기 때문에, 가극, 영화, 서커스, 어린이 공연 등의 어떤 행사도 우리를 기다리고 있지 않다! 집단농장이나 공장을 방문하지 않아도 된다. 아무도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묻지 않는 이 편안함이란!"
 
      정도를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함과 매한가지라는 과유불급(過猶不及), 지나친 공손함과 배려는 차라리 예의에 어긋난다는 과공비례(過恭非禮)는 비단 솔즈베리 부인의 중국 방문과 같은 공식행사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외국인과 업무 관련하여 만날 때 이런 모습을 아직도 너무나도 자주 목도하게 된다. 특정 국가나 인종에 대한 과공(過恭)이 다른 부류로 치부되는 사람들에게는 정반대의 억압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많이 보게 된다. 비단 외국인들과의 관계를 떠나서도, 우리가 보여 주고 싶은 것만을 반복적으로 보여 줄 때, 상대방은 우리가 의도한 것 이외의 것을 보려고 노력하게 된다. 광고에서의 한계효용체감과 부작용은 큰 목소리로, 자주 부르짖을수록 빨리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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