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항의 시간(Jaehang's Moment)

 

      지난 주 미국 시카고(Chicago) 출장을 다녀 왔다. 노스웨스턴(Northwestern)대학교의 경영대학원인 켈로그 스쿨(Kellogg School) 교수와의 워크샵 때문에 간 관계로 시카고 외곽의 노스웨스턴대학이 자리잡고 있는 에반스턴(Evanston)이란 곳에 묶었다. 당연히 에반스턴에 살고 있는 오랜 친구인 브래드 피칵(Bradley Peacock), 이 지면에서 '공작선생'이라고 소개했던 그를 만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브래드 피칵과 함께 그 1997년의 '그 미친 여름(That crazy summer)'를 함께 지냈던 랜디 링거(Randy Ringer)까지 이번 워크샵에 참가하러 동행을 했으니, 출발을 하기 전 브래드에게 우리들이 그렇게 간다는 메일을 보냈고, 메일의 알파벳 하나하나마다 브래드의 흥분과 기대를 느낄 수 있는 메일 답신이 바로 와서 시간을 잡았다.

 

      도착하여 워크샵까지 끝낸 다음 날 저녁, 로비에서 우리는 가벼운 포옹과 함께 해후의 기쁨을 나누었다. 동네 주민으로 호스트 역할을 맡은 브래드가 일식(日食) 생선회와 스시, 그리고 스테이크의 두 가지 대안을 내놓았다. 내가 말을 하기도 전에 랜디가 나섰다. "재항은 스테이크를 좋아해." 가끔 내가 한국 친구들과 함께 스테이크를 먹으러 가면, 주재원 생활을 하면서 스테이크가 내게는 꼭 짜장면 같은 음식이 되었다는 얘기를 하곤 한다. 나는 원래 한 때 채식주의자를 표방할 만큼, 고기 종류를 싫어했다. 그런데 주재원 생활을 하면서 어쩔 수 없이 스테이크 만찬을 해야 하는 자리들이 생기면서 어느 사이에 스테이크에 맛을 붙여서, 짜장면처럼 가끔씩 먹어 주지 않으면 허전한 음식으로 스테이크가 자리를 잡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랜디에게 농담 삼아 그 얘기를 했는데, 이후 랜디에게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으로 스테이크가 각인이 되어 버렸다. 이번 경우에는 하긴 에반스턴에서 회를 먹는다는 것 자체가, 브래드에게는 멀리 한국에서 친구가 왔을 때나 부러 시도하는 별미가 될 수도 있겠으나, 내게는 그리고 뉴욕에서 온 랜디에게조차 그리 좋은 대안은 아니었다.

 

      우리는 마티니와 함께 생굴을 먹으며 그간의 소식을 주고 받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내가 가장 즐기는 음식 중의 하나가 바로 생굴이다. 향과 색깔이 진한 맥주와 함께 레몬즙을 살짝 뿌려 빼먹는 생굴, 특히 수십 종류의 생굴이 제공되는 뉴욕 중앙역인 그랜드 센트럴(Grand Central)의 오이스터바(Oyster Bar)같은 곳에서 골라 먹는 재미는 찬바람이 부는 겨울철에 느낄 수 있는 별미의 하나이다. 참고로 굴은 알파벳 'R'이 들어 있는 달에만 먹으라고 한다. 그러니까 9월에서 4월까지, 덥지 않은 달에만 먹으라는 이야기이다. 하여간 찬 바람 불 때 먹어야 제 격이다. 생굴이 메뉴에 있는지 모르고, 바로 마티니를 시킨 것이 약간 실수이기는 했다. 마티니에 약간 얼굴이 달아오르기 시작한 브래드가 이어진 본 메뉴에 곁들인 와인으로 약간씩 목소리 톤이 올라가면서 "이보게들"하면서 얘기를 시작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일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잖아? 근데 처음 만난 순간이 계속 기억에 남아 있고, 그리고 이후에도 잊지 못할 그런 순간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고. 그런데 나에게는 '재항의 순간(Jaehang's moment)'와 '랜디의 순간(Randy's moment)'는 아주 생생하게 남아 있어. 어느 날 재항이 사무실에 나타나서 삼성과 한국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질문하고 답하던 그 모습. 그리고 몇 년이 흘러 뉴올리언즈의 호텔 화장실에서 둘이 만나서 반갑고 놀라워 했던 그 순간을 내가 어찌 잊을 수가 있겠어! 항상 내 가슴 속에서 문득문득 떠오르곤 하지."

 

      정말 나에게도 'Brad's moment'가 있다. 사장단 회의실에서 겨우겨우 자신이 알고 있던 유일한 한국어를 짜내어 자기 소개를 하던 모습과 브래드도 언급한 뉴올리언즈 힐튼 호텔 화장실에서의 그 재회(再會)의 순간. 그 생각들만 하면 나도 입가에 미소가 돌고, 브래드를 만나고 싶은 생각이 불쑥 들곤 한다.

 

      그런 얘기를 주고 받으며 즐거운 식사를 하고 약간의 술기운과 함께 방에 돌아와서, 자리에 앉으니 안도현의 '연탄재'라는 시의 한 구절이 생각났다.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그렇게 생각해 준 브래드가 고맙고, 브래드의 그 순간이 내게 부끄럽지 않고, 계속 빛나게 하기 위하여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다른 사람들에게 또 그런 순간으로 남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하는가 반성과 함께 되새겨 보게 만든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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