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을 추구했던 두 사람의 죽음




        제임스 릴리(James Lilley)라는 미국 CIA의 역사에서, 그리고 외교가에서 이제는 전설처럼 된 인물이 있다. 1986년 11월에 주한 미국대사로 부임하여, 1987년 6월 계엄령 선포를 저지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들 얘기한다. 1989년 주한 대사를 그만 두고는 바로 주중국 대사가 되어, 천안문 사건의 한 가운데 있게 된다. 그 전 1980년대 초반에 그는 주대만 미국대표부의 대표를 지내면서, 레이건이라는 초보수 대통령 아래에서 중국과 대만 사이에서 미국 외교의 균형을 잡는 흡사 줄 타는 광대와 같은 역할을 한다. 1972년에 중국과 미국이 역사적인 수교 관계를 맺으면서, 그는 흔히 CIA(Central Intelligence Agency)라고 불리는 미국중앙정보국의 요원으로서 중국 측의 양해 아래-중국도 자신의 정보국 인사 하나를 주미 대사관에 보내기로 합의-, 북경 소재 미국 대사관에 외교관 신분으로 파견되었다.




        미국 정부의 대표적인 ‘중국통(中國通)’. 이것이 그냥 내가 알고 있는 제임스 릴리였다. 작년에 출간된 그의 자서전이 “China Hands"라는 제목을 단 것도 그리 낯설지 않다. 그런데 ‘90여년에 걸친 아시아에서의 모험들과 첩보전과 외교전(Nine Decades of Adventure, Espionage, and Diplomacy in Asia)'라는 소제(小題)가 눈길을 끌었다. 특히 ’90여년‘이란 세월이 그의 나이를 생각하면 너무 과하다 싶었다가, 혹시 선교사의 자녀가 아니었을까 하는데 생각이 미쳤다. 선교사는 아니고 그의 아버지는 우리로 치면 중국 주재원이었다. 사실 1800년대말 미국에 중국 선교 바람이 불어서, 매년 수 천명의 미국 선교사들이 중국에 파견되었고, 예전 타임(Time)지의 발행인이기도 했던 헨리 루스(Henry Luce)를 비롯하여 20세기말까지 견고한 친중국-주로 친대만- 세력을 미국내에 형성했다.




        하여간 제임스 릴리는 1928년 지금은 맥주로 유명한 청도(靑島)에서 스탠다드 오일(Standard Oil)의 중국 주재원이던 아버지 아래서 태어났다. 태어난 이후 청도에서 산 이후 8년간이 그의 생애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라고 하는데, 당시 중국에서의 서구인들의 라이프스타일과 그를 뒷받침하는 수입, 게다가 독일풍 바닷가 도시인 청도라는 환경을 생각하면,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라는 그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는 4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는데, 이런 경우에 많은 사람들이 그러겠지만, 그와 여덟 살 차이가 나는 그의 큰 형이 그의 삶에 아주 큰 영향을 끼쳤다.




        그의 형인 프랭크 릴리(Frank Lilley)는 그야말로 어린 막내 동생의 눈을 떠나서도 슈퍼맨과 같은 존재였다. 공부는 해외 생활에도 불구하고 거뜬히 예일(Yale)대학에 들어갔고, 중학교 때부터 바로 밑의 동생을 데리고 객지에서 생활하면서 부모에게 전혀 걱정을 끼치지 않으며, 항상 부모와 두고 온 동생에게 감동어린 장문의 편지를 즐겨 쓰는 그야말로 집안에서 보면 흠잡을 데 없는 장남이었다. 게다가 나를 정말 놀라게 한 것은 일찍부터 운동, 그 중에서도 수영을 즐겨서 청도에서 여섯 시간동안 바로 밑의 동생을 데리고 바다를 헤엄쳐서, 그 동네에 50년 후에까지 전설로 남는 얘기를 남겼던 그 장남 프랭크가 예일대 수영부 주장을 맡으면서 수영 400미터 릴레이 부문 세계기록을 세우는 것이다. 요즘 같으면 인터넷 로맨스 판타지 소설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이다.




        전쟁은 그에게도 시련이었다. 특히 교회 활동에 열심인 평화주의자로서 참전을 해야 할 것인가가 그에게는 심각한 결정으로 다가왔다. 1940년 대학에 입학하면서 그는 고심 끝에 ROTC로 들어가지만, 군사학에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그런 갈등 속에 지내다가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미국의 참전이 공식화되자 어쩔 수 없이 장교로 그도 참전을 하게 된다. 중국과 관련된 그의 배경을 인정받아서, 중국 국민당 군대를 위한 포병학교의 교관으로 임명을 받는데, 국민당의 부패와 공산당에 대한 잔악한 고문, 그런 현실에 무기력하기만 한 자신에 대한 실망만을 안고 그는 미국으로 잠시 돌아온다. 전쟁 중에 미국 내에서 동화처럼 만났던 여배우 잉그리드 버그만의 미모에 지성적인 면을 더한 것만 같은 애인과 결혼을 하고 안정을 찾는 듯 했지만, 곧 일본으로 발령이 나게 된다. 일본의 요코하마 항구에 닿을 때부터 미국의 무지무지한 폭격이 초래한 재앙을 보고 괴로워하며 ‘국가’와 ‘평화’ 사이에서 갈등을 하던 그는 결정적으로 히로시마의 원폭 참상을 보고,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자살을 한다. 갓 결혼한 부인과 남은 가족들에게 남긴 유서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기적인 내 자신은 여러분들과 이 사회에 아무 쓸모가 없겠군요. 여러분들만은 꼭 지금까지 잘 해왔던 대로 정진하여 주십시오. 프랭크.”




        동생인 제임스 릴리는 그의 형은 평화주의자로서 전쟁이 인간, 특히 일본인들에게 끼친 피해를 견딜 수 없어서 겪은 갈등을 자살의 원인으로 뽑는데, 비슷한 맥락이기는 하지만, 나는 완벽함을 추구했고, 그를 실현했던 그의 완벽주의자로서의 모습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공부, 운동, 가족생활 등 모든 부분에서 완벽함을 이룩했던 그에게 전쟁은 자신의 능력을 벗어나는 세계였다. 그가 갖고 있던 종교적 신념과도 배치되는 일이었고, 자신이 자기의 신념에 맞추어 할 수 있는 일도 극히 제한되어, 자신이 거기에 발을 담근다는 사실 자체를 너무나 괴로워했다. 그런 상황을 견딜 수 없었던 그는 성급하고 이기적이게도 자신을 그렇게 자랑스러워했던 부모와 동생들, 갓 결혼한 아름다운 신혼의 신부를 남겨 두고 이기적으로 이 세상을 떠났다.




        제임스 릴리의 자서전에서 그의 형 프랭크가 자살하기까지 전혀 죽음에 대한 암시가 없었다. 나는 그 때까지 그렇게 엄청난 친구가 커서는 무엇이 되는가를 궁금해 하면서 책을 읽고 있어서, 독자로서의 나에게도 그의 죽음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 충격으로 한동안 책을 놓고 그의 죽음을 되씹고 있자니, 비슷한 죽음이 생각났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전기작가(傳記作家)이자 문화비평가인 슈테판 쯔바이크(Stefan Zweig)의 죽음이었다.




        그는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함께 밀어닥친, '애국'이라는 이름 아래 인간성을 짓밟는 광풍에 몸서리치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반항, 인간의 근본으로 근본으로 파고 들어가는 사고와 저술, 그리고 소위 적국인사로 분류된 로망롤랑과 같은 작가들과의 정신적인 교류를 통하여 저항했다. 그런데 1차 세계대전만 해도 여유가 있던 시절이었다. 나찌 독일과 2차 세계대전은 그런 소극적인 저항마저도 설 자리를 없애버린다. 유럽 최고의 장서가 및 문화비평가이자 전 유럽 문화계의 고매한 사교인으로 이름 높았던 인사가 책 한 권 없이 브라질로 쫓겨 가다시피 도망가서, 아무 자료 없이 자신의 기억에만 의존하여 쓴 회고록이 바로 "어제의 세계"라는 책이다. 이상이 높고 곧았던 만큼 비뚤어진 이 세상을 견딜 수 없었던, 자신의 표현에 의하면, ‘성급한 이 사나이’는 이 회고록을 탈고하고 바로 권총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한 친구와 프랭크 릴리의 죽음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 일과 연결하여 이런 말을 했다. “우리 사회에서 기상 예보할 때처럼 통계를 많이 쓰고, 거기에 의존하는 분야가 없을 거야. 그런데 말이지, 이 지구가 태어났을 때부터 따지면, 우리가 의존하고 있는 최근 몇 백년, 아무리 잘 봐 주어도 기껏해야 역사 시대 이래의 몇 천 년의 기상 관련 자료는 통계적으로 아무 의미가 없다고. 우리가 통계로 광고 효과나 나갈 방향을 얘기한다고 하더라도, 인간 정신의 얼마 정도를 통계 수치로 나타낼 수 있을까?” 그리고 나아가 광고에 맞추어 인간의 모든 행동양식이 변할 수도 없다. 그런데 과학이라는 단맛 코팅을 한 조사, 그 결과로서의 통계 수치, 내 광고라는 자부심과 지나친 집중력이 어울리다 보면, 그 한계를 잊고 내가 모든 것을 조정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착각에 휩싸인다. 꿈은 분명히 완벽을 추구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수반되지 않는 꿈은, 사람을 좌절하게 만들고, 극단적인 결말을 초래하기 쉽다. 광고로 치면 시장과 고객을 무시하고, 극단적으로 자기 속으로만 파고들게 이기적으로 만들거나, 성급한 행동을 촉구하게 된다.




        쯔바이크의 자서전인 “어제의 세계”는 근 50년이 지나 히트를 친다. 유럽공동체를 정신적, 문화적으로 꿈꾸고 구현했던 삶을 유럽인들이 이 책에서 발견한 것이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도 이런 외침은 어느 한 군데서는 비록 그곳이 황야라도 있어야 한다. 외치는 자가 그 곳이 황야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언젠가는 그것이 올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면, ‘성급’해지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예전에 학생운동하는 친구들이 열발짝 우로 갈 것을 그래도 아홉 발짝만 가게 하는 외침이라도 있어야 한다고 얘기한 것을 기억한다. ‘모 아니면 도’ 식의 광고는 광고주를 도외시하는 그야말로 프랭크 릴리가 유서에 쓴 표현대로 ‘이기’적인 접근이다. 꾸준히 ‘개’나 ‘걸’로라도 전진하는 그런 광고계획이 어떻게 보면 광고주를 위한 가장 진취적이고 효과적인 것일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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