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다시 한 번’, 보스턴 레드삭스의 꿈




        매일 아침마다 규칙적으로 운동을 하려 하는데, 아무래도 일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는 과음으로 그 전날 늦게 들어오면 아침 운동을 거르는 것은 당연하고, 제 시간에 출근하는 것조차도 겨우 맞추곤 한다. 일요일이 그런 전날의 늦은 귀가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날인데, 운동하는 곳이 늦게 문을 열어, 다른 행사와 겹치면 빼먹기 쉽고 해서, 월요일 아침이 심신이 그래도 정상적인 가운데 운동 시설을 정기적으로 찾는 유일한 날이 되었다.




        운동이라고 해봤자, 스트레칭 좀 하고, TV보면서 런닝머쉰에서 약간 빠르다 싶은 속도로 4Km정도 걷는 것이 고작이다. 주로 미군 채널에서 방영하는 CNN 헤드라인뉴스와, 6시부터 정말 미국에서 하듯이 시간대만 맞추어 내보내는 ABC TV의 ‘굿모닝 어메리카(Good Morning America)'를 15분에서 20분 정도 보게 된다. 꼭 그 놈의 미군 채널과 그를 통해 방영되는 미국 애들의 방송 프로그램을 보아야 한다는 규정은 없지만, 내게는 그래도 그 짧은 시간이 해외 정보를 상대적으로 생생하게 접하게 되는 주요 통로 중의 하나이기에, 제법 열심히 헉헉거리면서 런닝머쉰 위에서의 시간을 그렇게 보낸다.




        TV 시청 측면에서 월요일 아침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뉴스 프로그램 대신에 미국 시간으로 일요일 저녁에 진행되는 스포츠 프로그램을 주로 중계하는데, 5월말 NBA 결승이 끝난 후는 한동안 내가 썩 즐겨 보지 않는 자동차 경주인 NASCAR만 중계를 해서, 월요일 아침 운동을 하러 갈 때는 거의 런닝머쉰 위에서 읽을 요량으로 책을 가지고 갔었다. 오늘도 책을 가지고 런닝머쉰 위에 올라, 습관적으로 헤드폰을 끼고, TV를 켜고, 책을 머쉰 위에 아슬아슬하게 펼쳐 놓은 후 속도를 맞추며 건성으로 채널을 돌리는데, 미군 채널에서 보스턴 레드삭스 경기를 방영하고 있었다.




        올 초에 2005년의 보스턴 레드삭스는 어떻게 될 것인가가 궁금하다는 글을 이 지면을 통하여 쓴 이후, 처음으로 보는 레드삭스의 경기이기에 채널을 고정하고 보니, 레프트 필드에 눈에 익은 거대한 담장인 그린 몬스터가 한 눈에 들어오는 레드삭스의 홈구장인 펜웨이 파크에서 경기가 진행되고 있었다. 경기는 바야흐로 막바지에 거의 다다른 8회말이었는데, 3대 3으로 그 때까지의 진행 상황은 어떠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상황만 확인하고, 그냥 열심히 걸으면서 책을 읽었다. 2사 후에 레드삭스의 한 친구가 2루타를 쳤고, 이후 타자가 어떻게 되었는지도 모르게 책만 읽고 있었다.




        갑자기 ‘와’하는 관중석에서의 함성과 함께, 아나운서와 해설자가 함께 흥분하기 시작했고, 낯익은 얼굴의 선수가 천천히 방망이를 연습 삼아 휘두르며 타자석을 향하여 가기 시작했다. ‘메이저 리그의 타점기계’라고 일컬어지는 매니 라미레즈(Manny Ramirez)였다. 지난 한 달간 시카고에서 시카고 컵스의 광적인 팬을 자처하는 친구와 가깝게 있느라, 컵스 이외의 팀에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몰랐는데, 이맘때면 도지곤 하는 라미레즈의 병이 재발하여, 지난주에 공개적으로 라미레즈가 다른 팀으로 트레이드 해 줄 것을 요청했다고 한다. 당연히 금요일 경기에서 보스턴 팬들의 야유가 그에게 집중되고, 토요일 경기에 나서지 못하고, 이 경기 전에 보스턴에 남겠다고 기자들에게 발표하는 해프닝을 벌였지만, 벤치를 줄곧 지키고 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나타난 것이다.




        그런 얘기를 들어서인지 그의 배트 돌아가는 것이 예전보다 못해 보였다. 그리고 상대편인 미네소타의 투수의 공이 무척 좋았다. 투 스트라이크 원 볼로 일방적으로 몰렸다. 몰리는 도중에 카메라가 보스턴의 불펜에서 몸을 풀고 있는 커트 실링(Curt Schilling)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우연히 시청하게 된 경기에서 매니 라미레즈와 실링을 함께 본다는 것은, 꼭 보스턴 팬이 아니더라도 ‘Must-watch'의 경기가 된다. 절대절명의 순간 투수의 회심의 공을 겨우겨우 파울로 커트 해냈지만, 라미레즈는 역부족인 것 같았다. 그 투수와의 그 때까지의 다섯 번의 대결에서도 겨우 하나의 안타를 쳐낸 상대타율까지 그런 인상을 뒷받침해 주었다. 역시 날카로운 커브가 떨어지는데, 라미레즈가 도끼로 장작 패듯이 스윙을 했고, 투수 앞에서 크게 튀긴 공은 투수의 머리를 넘어, 2루를 가르며 중견수 앞의 안타로 2루 주자를 홈으로 불러 들였다.




        “Just Manny being Manny". 경기 후 인터뷰에서 매니 라미레즈가 한 말 그대로이다. 타점기계로서 그다운 일을 한 것뿐이었다. 보스턴 팬들 역시 그들대로 라미레즈가 벤치에서 나올 때부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함성을 지르고 발을 구르기 시작하여, 라미레즈의 결승타가 터지면서는 왜 보스턴 팬이 가장 열광적이란 평을 듣는지 보스턴 팬다운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약간 흔들거리고 위태롭기는 했지만, 실링 역시 그 무표정하면서도 단호한 얼굴로 경기를 마무리지면서 세이브를 따냈다.




        시카고에 머무는 동안 지역 내 비행기를 탔는데, 그 기내에서 본 영화를 귀국 비행기에서 다시 보게 되었다. 너무 열광적이라 사랑까지도 위태롭게 만드는 보스턴 레드삭스 팬들의 모습을 그린 드류 배리모어(Drew Barrymore)와 지미 팰론(Jimmy Fallon) 주연의 “Fever Pitch"란 영화였다. 원래 시나리오는 해피엔딩이 아니었는데, 작년에 레드삭스가 우승을 하면서 결말 부분이 바뀌었다고 하는데, 그 부분이 어색하기는 하지만, 보스턴 팬들의 모습은 잘 표현해 주었다. 그런 팬들이 있는 한 2005년의 보스턴 레드삭스가 또 다시 우승하지 못하란 법은 없을 것 같다. 구단에서 운영하는 공식 팬 사이트에 걸린 다음의 문구가 이제 자신에 넘쳐 보이기 시작했다.

 

”레드삭스에서 믿음은 보상 받는다(Faith is rewarded in Red Sox Nation."

 

수백개의 비공식 팬사이트 중의 하나에는 큼지막하게 다른 구호가 걸려 있었다.

“올해도 다시 한번(Let's Do It Again)!"




        라미레즈가 라미레즈답게, 실링이 실링답게, 모든 선수단의 일원들이 그들답게, 팬들이 팬들답게 하면 무엇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겠는가? 보스턴 레드삭스의 브랜드는 더 이상 ‘한풀이’가 아니었다. 라미레즈에 끌려가는 브랜드가 아니라 라미레즈를 포용할 줄 아는 넓이와 깊이를 갖춘 브랜드가 되었다. 내년 이맘 때 쯤이면 우리는 작년까지 자주 보았던 ‘뉴욕 양키즈 브랜드 성공의 비결’과 같은 책 대신, ‘보스턴 레드삭스 식 경영’, 혹은 '레드 삭스 브랜드 만들기‘와 같은 책들을 서점에서 발견하게 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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