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돌 9단. 사진, 한국경제신문


 

“당연히 내가 무난하게 이긴다.”

나이를 먹고 유해졌다는 평가를 듣고 있지만 역시 이세돌다웠다. 그는 알파고의 상대로 지목된 것을 오히려 즐기는 듯했다. 자신의 패배는 곧 인간의 무기력함을 보여주게 되는 것이라 염려하면서도 진다는 단서는 결코 달지 않았다. 그는 알파고와의 5번기 대국을 이렇게 예상했다. “5 대 0이나 4 대 1.”

바둑계도 이세돌의 승리를 낙관했다. ‘판후이 2단은 졌을지 몰라도 이세돌 9단은 다르다’는 것이다. 컴퓨터 전문가들의 의견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이들은 다음에도 같은 승부가 벌어진다면 이세돌이 절대 이기지 못할 것이라 못 박았다. ‘세기의 대결’의 핵심은 사실 여기에 있었다. 학습을 위해 패배를 각오하고 도전하는 인공지능과 ‘머신 러닝’의 실험 대상이 된 바둑기사의 대국, 즉 이세돌이 이겨도 지는 대결에 말이다.

 

네이처에 소개된 알파고.


 

  1. 조치훈은 틀렸다


 

이세돌은 지난달 22일 한국기원 기자회견에서 기자들이 고대하던 발언을 쏟아냈다. “맞대결 이야기를 듣고 결정을 내리기까지 5분도 걸리지 않았을 만큼 자신 있었다”거나, “알파고의 기력은 3단 정도”라는 말을 여과 없이 뱉어냈다. 자칫 허장성세로 들릴 수 있었지만 이세돌이기에 수긍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감을 보이긴 구글도 마찬가지였다. 구글은 국내 전문가들과 달리 승부를 50 대 50으로 예측했다.

판후이와의 대결 이후 4개월이 지났으니 알파고가 얼마나 더 무서워졌는지는 알 길이 없다. 이는 묘한 불안감의 근원이다. 이세돌의 우려대로 인간이 얼마나 무기력한지를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나중이 되리라는 이세돌의 패배를 지금 당장 목도할 수도 있지만 아무도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는 되어있는 것 같지 않다.

김대식 KAIST 교수는 한경닷컴과의 인터뷰에서 이 ‘세기의 대결’에 대해 “알파고가 당장 이 9단과 대등한 실력을 낼 것이라 보긴 어렵다”며 “구글로선 알파고가 져서 최고수의 데이터를 얻는 것이 오리혀 이득”이라고 밝혔다. 다만 그는 “알고리즘이 갖춰졌으니 AI는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할 일만 남는다”고 덧붙였다. 구글 입장에선 져도 이긴다는 것이다.

 

알파고의 심층신경망.


 

이성환 고려대 교수 역시 “결국 시간은 알파고의 편”이라고 진단했고, 박영준 서울대 교수도 “이번 승부의 최종 승자는 구글”이라고 단언했다. 이세돌은 알파고에게 이길지 몰라도 인간은 결국 AI에게 진다는 예고다.

아마도 대다수는 이세돌이 인간의 건재함을 증명해 줄 것을 바라고 있으리라. 하지만 인간조차 쉽사리 도전하지 못하는 이세돌에게 AI가 도전장을 던졌다는 것만으로도, 설령 있을지 모르는 이세돌의 패배에 대한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인간은 이미 진 것인지 모른다. 말하자면 이세돌은 기계가 아직 이기지 못한 최후의 인간인 셈이다.

“그래 봤자 바둑, 그래도 바둑”이라던 조치훈의 말은 이제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그는 바둑의 승패 따위가 세상에 아무 영향도 주지 못한다고 했다. 자신은 가장 잘할 수 있는 바둑을 둘 뿐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세돌과 알파고의 바둑은 더 이상 사소한 바둑이 아니다.

 

  1. 구글은 왜 이세돌을 택했나


 

다만 언론의 호들갑대로 이세돌이 세계랭킹 1위의 기사이거나 세계 최강의 기사인 것은 아니다. 세계랭킹은 공인 랭킹이 존재하지도 않으며, 비공인 랭킹조차 한국인 박사가 3개월마다 집계해 발표하는 수준이다. 국가별 기원에서 집계하는 공인 랭킹이 있지만 여기서도 이세돌은 한국 2위다. 1위 박정환은 27개월째 자리를 지키는 중이다(2월 기준 종전 이세돌 기록과 타이).

중국 1위 커제가 “이세돌이 나를 이길 확률은 5%”라고 도발해 화제를 모았던 올 1월 몽백합배 결승 또한 지난해 11월부터 이어오던 ‘커제 징크스’의 연속이었을 뿐이다. 이세돌은 지난해 말 삼성화제배 준결승과 금용성배 주장전에서도 커제에게 무릎을 꿇었고, 2월 하세배 결승에서도 설욕하지 못하면서 커제에게만 4개월새 7패(2승)를 당했다. 다시 말해 최고의 기사를 현존 최강으로 국한할 경우 이세돌이 아닌 커제나 박정환이 어울린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구글이 주목한 것은 이세돌의 기풍이었을지 모른다. 정상급 기사들 가운데 가장 변칙적이고 호전적인 이세돌은 ‘학습하는 인공지능’ 알파고에게 매력적인 상대다. 그와의 대국은 알고리즘에 의해 최상의 수를 찾는 것이 아니라 변수를 예측하는 학습이 가능한 것이다. 앞서 구글은 네이처 논문에서 정책망 지도학습을 통해 알파고의 다음 수 예측 확률을 57%까지 끌어올렸다고 밝힌 바 있다. 판후이와의 대결 전 4주간 학습한 결과다. 이세돌과의 대국 이후엔 크게 바뀔지 모른다.

 

판후이와 알파고의 5번기 기보. 사진, 네이처


 

이세돌이란 상징성도 무시할 수 없는 이유다. “구글이 서두르는 느낌을 받았다”는 한국기원 관계자의 말대로라면 마이크로소프트나 페이스북과의 인공지능 경쟁 때문에 상징성이 큰 이세돌이 낙점됐을 가능성이 더욱 높아진다. 전성기를 조금 지난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어도 지난 10년 바둑계에 군림한 거목이었고, 이전 10년 이창호의 시대에 종언을 고한 인물이 이세돌이기 때문이다. 세계 바둑의 왕좌가 이창호에서 이세돌로 넘어가기 시작한 것은 2003년 LG배 결승이었다. 2년 전 같은 자리에서 이창호에게 당했던 이세돌은 이를 악물고 이창호 신화를 깨뜨리고 말았다. 이창호가 입단 이후 처음으로 후배에게 타이틀을 내주는 순간이었다.

어쩌면 구글은 처음부터 알파고의 상대로 이세돌을 염두에 뒀는지 모른다. 네이처가 ‘인공지능의 경이적인 성과’로 소개한 판후이와의 대국이 사실은 모의전이었을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알파고와 판후이의 5번기는 5 대 0으로 알파고의 낙승이었지만 제한시간을 두지 않은 비공식전의 결과는 3 대 2 신승이었다. 이세돌과의 대국을 내정한 게 아닌 이상 한 번에 몇 계단이나 상대의 수준을 높이기엔 그리 만족할 만한 성적표는 아니다.

판후이 때와 다른 대국 일정도 주목할 만하다. 알파고는 판후이와 하루 만에 5번기를 치렀지만 이세돌과는 일주일에 걸쳐 승부를 가릴 예정이다. 백에게는 중국 룰대로 7.5집(한국은 6.5집)의 덤이 주어지며 제한시간은 2시간, 초읽기는 1분씩 3회로 판후이 때와 차이가 있다. 구글은 승부에 앞서 ”이세돌의 기보를 미리 입력하지는 않겠다”고 공언했지만 어쨌든 알파고는 1국과 5국 사이에 엿새라는 시간을 벌었다. 1국에서 지더라도 마지막 5국에선 인간의 214.2년에 해당하는 시간 동안 훈련을 거치고 나설 수 있는 것이다. 전력을 각오한 것도 모자라 진화까지 할 예정이다.

 

이세돌과 알파고의 ‘세기의 대결’은 3월 9일부터 15일까지 열린다.


누가 3선승을 거두든 5번기가 모두 치러질 예정이다.


사진, 한국경제신문


 

  1. 이세돌은 왜 도전장을 받았나


 

그렇다면 이세돌은 단순한 호승심에 이끌려 이 싸움에 뛰어들었을까. 그는 100만 달러가 걸린 이번 승부의 상금은 개의치 않는다고 진작에 선을 그은 바 있다. 3년 전엔 “돈 때문이라면 차라리 중국에 갔을 것”이라며 재물에 보람을 두지 않음을 밝히기도 했다.

그런데 당시 그는 중요한 말을 남겼다. 화려할 때 떠나겠다는 것. 은퇴를 시사한 이세돌은 시한을 3년으로 못 박았다. 올해가 바로 그 3년의 마지막 해다.

이세돌은 자신에게 ‘일류 기사’라는 타이틀이 더 이상 오래 붙어있을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프로기사들의 전성기 연령이 점차 내려가고 있다는 것을 선배들을 누르며 이미 체득했고, 자신을 겨누는 후배들의 눈빛으로 직감한 것이다.

다만 바둑으로 다른 것을 해보고 싶다고 밝혔다. 바로 바둑 보급이다. 그는 바둑을 보급할 적소로 미국을 눈여겨보고 있다. 화교를 통해 어느 정도 바둑이 보급돼 있는 데다 미국 사회의 중국에 대한 관심이 커져가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세돌은 기러기 아빠다. 언제든 한국을 떠나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바둑 보급을 위해 미국으로 건너간다면 캐나다의 딸과도 지근 거리에 있게 된다.

체스가 누리는 만큼의 인기를 바둑이 얻게끔 해보고 싶다는 게 이세돌의 포부다. 1인자인 자신이 나서면 아무래도 다르지 않겠느냐는 심산이다. 구리와의 10번기, 알파고와의 대결 등 최근 이벤트성 대국에 자주 나서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아 보이는 행마다. 그는 세계가 지켜볼 만한 사고를 치고 있다. 장고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속기에 능한 이 기사는 도대체 어떤 수를 봤을까. 정말 은퇴를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설마 그냥 두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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