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부산과 이순신의 격포  




        연초부터 부산 출신 동료의 발의로 몇몇 친구들과 부산에 한번 놀러 가자는 계획을 꾸며, 몇 차례나 성사 일보 직전까지 갔다가 갑작스러운 회사 일이나 일원 중의 몇몇이 동시에 개인적인 일들이 생겨서 연기에 연기를 거듭하는 중에, 부산으로부터 온 전화를 받았다. 부산시공무원교육원에서 강의를 해달라는 요청이었다. 강의를 떠나서 워낙 연기에 연기를 거듭해온 아쉬움에 그리고 부산에서 교수를 하고 있는 가까운 선배를 볼 수 있다는 기대에, 강의 일정과 그 날의 내 다른 일정이 있는지의 여부만 확인하고 앞뒤 가리지 않고 선뜻 수락을 했고, 휴가까지 내어 지난주에 다녀왔다.




        당연하다 싶게 고속철 KTX를 탔고, 내 자신부터 시작하여 승객들 대부분에게서 이제 더 이상 신기해하고, 역방향 좌석에 탔다고 당황스러워하는 모습은 보기 힘들다. 고속철 초기에 역방향을 가지고 얼마나 말들이 많았는지 기억나시는가? 우리나라 언론의 침소봉대(針小棒大)형 보도와 호들갑의 전형적인 사례라고 생각한다. 물론 어느 나라 언론이든지 그런 경향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고속철 역방향 좌석은 좀 심했다. 어쨌든 작년부터 세 번째 부산을 가는 것인데, 앞선 두 차례는 모두 문상 때문이어서, 저녁 무렵에 도착해서 얼굴 비추고 바로 가는 식이어서, 역에 도착해서 역사 내부나 역 앞 광장을 포함하여 상가에 가는 길거리조차도 맘 놓고 바라 볼 수 있는 여유를 지니지 못했다.




        고속철 안에서 강의 준비를 마치고, 마중 나온 분도 쉽게 만나 광안리 가는 길에 자리 잡은 공무원교육원까지 가는 길 풍경에서 세월도 그렇지만 부산의 변화를 실감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질의응답이 활발했던 강의를 마치고, 광안리로 가서 회와 함께 이어서 광안대교를 바라보며 맥주까지 걸치면서 보고 느꼈던 변화는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었다. ‘여유’와 ‘국제화-글로벌’. 내가 러쉬아워를 피해 다니고, 극심한 혼잡 지역을 지나지 않아서 그런지, 예전에는 바다와 교통난이 부산 관련 제 1 연상을 두고 다투었는데, 전혀 그런 정체 상황을 만날 수 없었다. 그리고 손님들이 뜸한 시간에 가서 그런지 선배와 함께 정말 여유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고, 공무원교육원의 분위기도 보통 공무원이라고 했을 때 우리가 갖는 그런 고정관념으로부터 자유로운 느낌을 주었다. 그리고 ‘글로벌 교육’이라는 명칭 자체가 처음에는 어색하게, 대화를 나누면서는 신선하게 다가왔다.




        사실 우리의 근현대 역사에서 ‘글로벌’이란 단어가 가장 잘 어울리는, 강제된 첨병 도시가 바로 부산이었다. 어쨌든 지리적 여건에 의하여 임진왜란때부터 815 해방 때까지 일본인들의 대륙을 향한 침략의 관문이었고, 해방 이후에는 미군들과 그들이 쏟아 붓는 각종 군사물자와 원조품들이 내려지는 곳이었다. 또한 영화 ‘친구’에서도 나오는 것처럼 일본문화의 그늘이 계속하여 가장 짙게 드리운 곳도 부산이었다. 이런 사실들에 대하여 부끄러워하는 부산 친구들을 본 적이 있다. 부끄러워하는 것까지야 괜찮지만 애써 부정하려 해서는 오히려 역작용만 불러일으킨다. 차라리 그런 어떻게 해석하면 부정적인 사실마저도 인정하면서 현재의 그리고 앞으로의 ‘글로벌 부산’으로 나아가는 지렛대 역할을 하도록 해야 한다. 과거의 역경까지도 거름 삼아서 새로운 21세기 글로벌 부산을 여는 자산으로 만들어야 한다. 작년초 올해 11월 부산에서 열리는 APEC정상회담의 기획 작업에 참여했었다.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관여한 것은 아니었지만, 부산의 모습은 우리의 기획 방향이 틀리지 않았고, 그것들을 충분히 소화할 수 있는 역량을 보여 주고 있어서 자뭇 고무된 여행이었다.




        부산에서 돌아온 다음 날 변산반도의 격포, 채석강으로 워크샵을 떠났다. 1988년 학부의 과행사로 다녀온 이후 처음이었다. 워크샵의 토론에 패널로 참가해야 하는 부담도 있었지만, 얼마나 변했는지 보고 싶은 설레임이 앞섰다. 비 뿌리는 서해안 고속도로를 타고 부안 톨게이트를 나와서도 한 시간 이상을 가야했다. 예전에 길도 안 좋았던 그 시절에 이 먼 길을 어떻게 왔을까 싶었다.




        부안 톨게이트를 나오면서부터 격포 이정표 표지판보다 “불멸의 이순신 촬영지”가 몇 킬로 남았다는 표지판이 더욱 자주, 눈에 잘 띄는 곳에 붙어 있었다. 추억 속의 격포가 아니라 드라마 촬영지를 찾아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예전 민박집만이 듬성듬성 있었던 것 같은 곳에 웬만한 호텔보다 좋은 시설의 유스호스텔이 들어섰고, 그 앞으로 회집들이 줄지어 있고, 관광버스 수십대가 주차해도 남을 듯한 넓은 주차장에 초저녁부터 바다 멀리까지 꽝꽝 음악을 울려대는 나이트클럽까지 관광지의 필수요소처럼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리고 또 곳곳에 ‘불멸의 이순신 촬영지’라는 팻말이 보였다. 예정 시간보다 한 시간 이상을 넘겨 발표를 하고, 토론을 하고, 회집 하나를 완전히 빌려서 제법 거나하게 취한 참석자들은 나이트클럽으로 호텔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나는 몇몇 친구들과 함께 밤의 바다가로 나갔다. 폭죽도 터트리고 가지고 간 소주도 병을 돌려 나누어 마시고, 우리는 겁 없이 양말 벗고, 바지 가랑이를 걷어 올리고 바다로 걸어 들어갔다. 바닷물 속의 보드라운 모래로 발이 살짝 빠지면서 드디어 1988년의 격포가 되살아났다.




        들뜬 기분이 오래 가는 나이라서 길고 긴 여정을 서로 수다 떨면서, 그러다가 뻐기면서 한 소리 하느라고 길다고 느끼지도 못하고 오던 버스 안에서의 시간들, 최고 선배로서 얼굴에 반창고 붙이고-당시 교통사고 후 상처 부위 수술을 한 직후라 술을 마실 수 없었다- 술 취한 애들 장단 맞추어 주느라 고생했던 것, 아침에 일찍 일어나 벌이던 해프닝, 그 이후의 애들 얼굴의 술기까지 확 가시게 해주었던 바닷가의 바람, 어설프게 바닷가 바위위에서 취했던 포즈 등등이 만화경처럼 눈 앞에서 펼쳐지면서, 찌릿하고 미지근하면서도 잘 느끼면 차가운 서해 바닷물과 함께 내 다리를 타고 올라왔다. 그리고 우리는 또 다시 광고에서 제작과 플래닝의 역할에 대해서 서로 알아 듣든 말든 한참동안 얘기를 나누었고, 방으로 들어가 잠자리에 누워서도 서로 자면서 그 꿈만 꾼 것 같다.




        다음 날 전나무, 소나무 향기 그윽한 내소사로 들어가는 길에서 시답지 않은 농담 나누었고, 나오는 길에 어제 먹은 술이 채 깨지도 않은 채 전어구이 몇 마리와 동동주를 마셨고, 서로들 말은 안 해도 재미있게 하고 싶은 광고를 만들겠노라 선언문 하나 없어도 이심전심 다짐을 했다. 대놓고 얘기하는 것은 광고에서건 실제에서건 재미없다. 과정을 통하여 소화시키면서 듣는 자가 말하는 자가 깨닫는 것이 최선이다. 고백컨대 우리는, 대한민국의 광고인을 떠나 미국의 광고하는 자들까지 세계 각국에서 그런 여백을 없애는 광고를 하고 있다. ‘불멸의 이순신’은 격포 가는 길에 한번만 나왔으면 더욱 좋을 뻔 했다. 그렇게 한번만 나왔으면 우리 일행은 바닷물에 발을 담그고 이순신 장군 얘기를 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순신 장군 얘기가 나오면 또 격포 얘기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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