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충일 풍경의 변화




        현충일 전에는 무엇을 할 것이냐, 후에는 무엇을 했느냐는 질문에 ‘국립묘지에 갈 것이다’, ‘다녀왔다’라고 대답을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깜짝 놀란다. 어느 해변의 휴양지로 놀라 갈 자신의 계획을 침을 튀겨가며 얘기했던 사람은, 그래도 뭔가 찔리는 구석으로부터 넘겨짚어, ‘나도 참 애들 데리고 그래야 하는데....’하기도 하고, 많은 사람들은 ‘친지 중에 혹시?’하면서 물어본다. 대수롭지 않은 듯, 막내삼촌께서 1971년 대간첩작전 중에 전사해서 국립묘지에 계시다며 대답을 하고는, 어색해진 분위기를 추스르려 다른 가벼운 화제로 옮기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궁금한 표정을 애써 감추면서 본인들도 약간 부담스러운 듯, 화제 전환에 협조를 해준다.




        나는 1971년 이른 장마가 끝나가던 초여름의 어느 날, 막내삼촌의 전사통지서가 도착했던 그 날, 학교에서 돌아와 집안 곳곳에서 한둘씩 부둥켜안고 쓰러지며 통곡하던 어른들의 모습을 보고 어찌 할 바를 모르고 너무나도 압도적인 어른들의 울부짖음에 울음조차 터뜨리지 못하고 당황했던 기억을 지금도 생생히 하고 있다. 제대로 나를 붙잡고 설명을 해줄 어른도 없었고, 내가 여쭈어 볼 분위기도 아니었지만, 어리둥절하면서도 눈치껏 청천벽력과 같은 사정을 알게 되었다.




        슬픔보다는 삼촌의 편지에 대한 답신을 한 달 가까이 차일피일 미루고 결국 보낼 수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덜컥 겁이 났다. 어른들이 이 사실을 아시면 혼을 낼 것 같았고, 삼촌이 하늘로 올라가며 먼저 꾸짖고 원망할 것 같았다. 게다가 지난 번 편지를 소대원들 모두와 돌려가면서 읽었다고, 모두 즐거워 하니 바로 또 편지를 보내라고까지 당부를 하신 편지지의 글자 하나하나가 살아나는 것 같아, 상당히 오랜 기간동안 그 죄책감은 어린 나를 짓눌렀고, 지금도 생각할 때마다 가슴 아픈 기억 중의 하나이다. 다음 날 숙제 못한 사람 손들라는 선생님 말씀에 약간 속으로만 억울해 하면서 쭈뼛쭈뼛 손을 드는데, 똘똘한 여자 친구 하나가 나서서 우리 집에 이런 큰 일이 일어났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고맙기도 했지만 부끄럽기도 하고, 건방지고 괘씸하게까지 여겨졌다. 그 기억 이후로 아마 나는 정상적인 어린 시절로 돌아갔던 듯 삼촌의 전사와 관련된 특별한 기억은 없다. 현충일이 있는 6월의 마지막 날 돌아가셨기에, 우리는 6월에 두 차례씩 국립묘지에 갔다. 세월이 흐르다보니 현충일에만 찾아뵙는 것으로 자연스레 정착했다.




        어른들과 함께 국립묘지를 다니던 70년대 국립묘지의 주인공은 월남에서의 전사자들이었다. 숫자도 많았을 뿐만 아니라, 20대초의 꽃다운 나이의 장병들이 많았으니 다 키워놓은 아들을 잃은 장년에 갓 접어든 어머니들의 울부짖음이 무서울 정도였다. 더욱 가슴 아픈 것은 소복 입고 젖을 겨우 뗀 듯한 아이를 데리고 오는 젊은 미망인들의 모습이었다. 어른들도 그런 미망인을 멀리 보시면서 한숨을 더욱 무겁게 쉬셨고, 당신네들끼리 위안 삼아 우리의 삼촌은 저런 애라도 없으니 차라리 낫다고 하셨다가 바로 ‘장가도 못가고 총각으로 죽은 불쌍한....’의 사설이 곧 통곡으로 변할 눈물 몇 방울과 함께 시작되곤 했다.




        90년대를 거치면서 현충일과 국립묘지의 풍경도 많이 변했다. ‘세월이 약이겠지요’라는 노래처럼, 소복 입은 엄마에게 업혀 와서 칭얼대던 어린이들이 그보다도 더 큰 자녀들을 데리고 참배, 교육, 피크닉 겸하여 오고, 어머니 힘겹던 시절과 한 맺힌 세월, 야속하게 먼저 간 남편에 짙은 한숨이야 한번씩 나오지만, 손자들 먹고 뛰어 노는 모습에 애써 미소도 한번씩 띄울 여유를 갖게 되셨다. 마냥 엄숙하기만 했고, 그걸로 국민들 군기 한번씩 잡는데 쓰곤 했던 권위주의적인 군사정권의 시대가 물러간 것도 풍경 변화의 큰 이유이다.




        2000년대 들어서 눈에 띄는 가장 큰 변화 중의 하나는 아마 군복 입은 예비역들 모습의 급격한 증가이다. 삼일절이나 광복절에 시청 앞에서 집회할 때처럼 세를 과시하면서 주로 월남전 참전자를 중심으로 월남전 묘역 바로 앞에서 집회를 가졌다. 바로 묘역 앞에서 마이크를 켜고 집회를 하다보니, 젯술에 약간 취기까지 오른 역시 왕년의 참전용사 출신의 참배객 하나가 ‘살아 돌아온 자들이 무슨 말이 그렇게 많냐’고 소리를 지르며, 집단 린치에 가까운 풍경이 펼쳐졌다. 소리 지른 양반을 가족들이 사정사정하면서 끌고 가고, 그것을 군복 입은 분들이 쫓아가면서 주먹질과 발길질을 하다가, 갑자기 옆에 있던 젊은 친구 하나로 대상을 바꾸어 주먹질을 했다.




        얻어  맞아 피가 흐르는 귀를 어루만지며 서 있는 그 친구를 에워싸고, 팰 듯한 자세로 훈계를 하였다. 문제는 그 친구가 사진을 찍었다는 것이다. 글쎄, 요즘이야 지하철 안에서 ‘개똥녀’도 찍는 판국이긴 하지만, ‘어느 빨갱이 신문 기자냐’는 말부터 시작하여, ‘너희가 지금 누구 때문에 이렇게 사는 줄 아느냐’, ‘김정일이 내려오면 만세 부를 놈’, ‘노무현이 찍었지’하는 소리까지 나왔다. 초등학교 다니는 조카와 우리 애들이 왜 싸우냐고 묻는데, 해 줄 말이 궁색했다. 그리고 내년 현충일에 국립묘지에 와야 하는가 잠깐 회의가 들었다. 그러다가 내려오면서 현충문 정면의 잔디밭에서 돗자리 깔고 한가하게 그늘 밑에 앉아 있는 가족들과 그 옆에서 공놀이하는 애들을 보면서 내년에도 와야 할 이유를 찾았다.




        미국에서 다니던 교회의 게시판에 선배 한 분이 2002년 월드컵 열기가 한창일 때, ‘작년 서해교전에서 전사하신 분들을 생각합시다’라면서 애국심을 촉구하는 글을 올리셔서, 내가 위에 쓴 삼촌 얘기와 함께 ‘애국심’을 근엄하게 강요하지 말라는 반박을 한 적이 있다. 그 반박 글에서 나는 우리 애들에게 ‘나의 삼촌, 애들에게는 막내 할아버지가 국가를 위해서 돌아가셨다고 가르치지 않고, 군인으로서 자기 일을 열심히 하시다가 돌아가셨다고 얘기하겠노라’고 하면서, 기타 잘치고 초등학교 꼬마 조카 데리고 실없이 놀기 잘했던 분으로 얘기해 줄 것이라고 했다.




        제발 혼내듯이 규격에 맞춘 애국은 안했으면 좋겠다. 더 멀리로는 국가라는 한계를 넘어서 생각했으면 하는데,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조심해야 될 얘기이다. 어쨌든 광고하면서도 경쟁이나 제품 카테고리의 한계에 묶이지 말고, 넓게 생각하라는 얘기를 자주 하는데, 거의 같은 맥락이다. 그 애국심을 주제로 1998년에 내 눈을 번쩍 뜨게 만든 광고 하나 소개한다. 제작팀 중의 하나가 나중에 알고 보니 나의 사촌 처남뻘 되는 친구여서 더욱 인상 깊었다.

 

★ 유감스럽게도 광고 이미지 파일이 제대로 올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곧 조치하겠습니다. 일단 광고부터 말로라도 설명하면, 안중근 의사의

단지한 손가락과 기름때 낀 목장갑을 비교하며, '예전에는 애국하기 힘들었습니다. 이제는 애국이 가까운 데 있습니다'라는 공익성 광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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