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계 밖의 분들과 명함을 교환하거나, 외부 강의를 할 때 AP(Account Planning)이 무엇을 하는 것이냐고 질문하는 분들이 많다. 간략한 대답을 할 수 밖에 없는 경우에는 한 마디로 ‘광고에서 어떤 사람에게 어떤 얘기를 할 것인가’를 잡는 작업이라고 대답한다. 사실 커뮤니케이션을, 광고를 좁게 아주 근본적으로 정의하고, 그에 따라 AP의 업무 역시 아주 좁게 정의했을 때 거의 부합하는 이야기이다.




        음료의 경우 ‘갈증을 없애 준다’, ‘몸에 좋다’, ‘맛이 좋다’, ‘청량감이 있다’ 등등 얘기할 거리가 많을 수 있는데, 그 중에서 혹은 새로운 거리를 찾아내고, 그에 맞는 소비자 집단을 혹은 그 반대로 소비자 집단을 잡고 그 사람들에게 맞는 거리를 찾아내는 것이 AP의 일이다. 그런 얘기를 하려면 사람들의 취향이 어떻게 변하고 있고, 또 사람들 집단마다 어떤 차이가 있고, 혹시 미래에는 어떻게 변할 것인지에 대해 그 일단의 힌트나 현상의 씨앗이라도 찾기 위하여 항상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어야 한다.




        제일기획 AP팀은 그런 노력의 부가적인 산물로 일년에 두 차례씩 대표적인 현상을 정리하고, 사회적 영향과 마케팅 활동에서 어떻게 수용하는가에 대한 제언을 담은 “파란통신”이라는 보고서를 발간하고 있다. 2004년의 경우 상반기에 ‘웰빙 라이프’, 하반기에는 예뻐지기 위하여 노력하는 남자와 강해지는 여자의 현상을 “Mr. Beauty, Ms. Strong"이라는 제목으로 발간했다.




        이런 발간물들이 제법 언론매체에서 흥미있게 다루어지면서 트렌드에 관한 강의 요청을 무척 많이 받는다. 사정이 허락하여 강의를 갈 경우, 또 잘 나오는 질문이 ‘앞으로 뜰 트렌드’는 무엇이냐는 것이다. 솔직히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막막해진다. 대부분의 경우 ‘트렌드’의 정의가 분명치 않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는 ‘올 가을의 유행 색’, ‘여름에 인기 있을 수영복 패션’과 같이 아주 구체적인 답변을 요구하기도 하고, ‘폐인’, ‘펌킨족’과 같은 새로이 등장할 족(族)을 예측해 달라고도 하고, 반대로 이라크전의 장기화에 따라 나타날 현상을 얘기해달라는 국제정세에 관한 폭으로 확대되기도 하고, 또는 ‘2010년의 한국 사회 트렌드’와 같은 장기적인 미래 예측을 주문하는 경우도 있다. 




        사실 ‘트렌드(Trend)'라는 단어가 위에서 거론한 것들을 모두 포함할 만큼 넓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처음에는 특정한 시기적인 제한 없이 단순한 ’경향‘ 혹은 ’추세‘에서 시작하여, ’set the trend'라는 숙어로 어우러지면서 짧은 호흡의 단순한 동시대의 유행까지 포함하게 되었다. 그리고는 형용사형인 ‘trendy'라는 단어가 60년대 초에 영국에서 신조어로 등장을 했는데, 이후는 사람들의 빨라지는 생활 리듬을 쫓은 것인지, 그 의미가 급격하게 짧은 시기 동안의 특정 현상이나 경향으로 좁혀졌다. 우리나라에서는 90년대 초중반 ’트렌디 드라마‘라는 용어로 일반인들에게 익숙하게 자리 잡은 것 같다. 이 때의 ’트렌디‘는 굳이 해석을 하자면, ’새로운 유형의 젊은 층의 라이프 스타일‘ 정도일 것이다.




        이렇게 의미상으로는 좁혀졌지만, 대중 속에 성공적으로 자리 잡은 ‘트렌드’는 다시 영역을 확장하여, 지금은 장기적인 추세와 현상까지도 포함하는 개념으로 우리 시대 가장 뜨거운 용어 중의 하나가 되었다. 어느 검색엔진에서 지난 6년 동안의 나름대로의 키워드를 검색하여 나오는 기사의 수를 비교하는 아주 초보적인 실험을 한 적이 있었는데, ‘트렌드’를 앞서는 증가세를 보인 단어는 ‘디지털’ 정도에 불과할 정도로 트렌드는 범용어가 되었다. 그런 가운데 트렌드의 불확정한 범위 속에서 다기한 질문이 난무하게 된 것이다.




        이런 넓혀진 단어의 의미 앞에서, 질문을 하는 사람이나 대답을 하게 된 작자이나, 결국은 자신이 생각하는 의미 안에서 서로 질문하고 답하게 된다. 그런 경우는 많지가 않지만 서로가 완전히 빗나가는 경우도 있고, 서로의 코드를 소위 완전히 맞출 수도 있다. 그런데 시간을 길게 가지고 갈수록 서로의 코드는 맞게 된다. 그리고 어차피 짧게 우리가 시간을 잡을수록 잠깐의 파장은 길지도 모르지만 그 영향력과 파장은 곧 사위어지기 마련이다.




        우리 팀에서 대대적으로 퍼블리시티를 하지는 않았지만, 작년말 지난 2년 간에 나타난 '족(族)'들을 대대적으로 모아서 정리한 적이 있다. 줄이고 줄여서 100여개의 족(族)으로 정리를 했다. 정리를 하면서도 매스콤에 족이라는 호칭 아래 나왔지만, 거기에 우리가 족이라고 이름을 붙여야 할지 의문이 가는 그런 대상이 많았다. ‘오팔족’, ‘점오족’이란 것이 얼마나 통용이 되는 것인지 사실 의문이 간다. 그런데 이렇게 새로운 ‘족’을 다루든지, 새로운 트렌드를 조망한다 하는 언론의 특집기사나 프로그램을 보면 물론 사람들의 흥미를 끌려고 해서이기도 하지만, 그런 특별한 현상이 대세인냥 얘기한다.




        며칠 전에 트렌드 특집을 다루겠다는 어느 TV의 PD를 만나, 제발 어떤 일부분의 현상을 가지고 전체 사회가 그렇게 가는 것처럼 다루지 말아 달라는 부탁 아닌 부탁을 한 적이 있다. 현재의 거역할 수 없는, 그리고 뭉뚱그려 보았을 때 눈에 띄지 않을 수 없는 큰 흐름은 다원화이다. 예전에 사회 소수의 일탈행동이라고 했던 것들이 이제는 일정 분량 이상의 목소리를 내면서 엄연한 우리 사회 모습의 일부분으로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다. 그 모습 그대로, 그 목소리의 강도만큼만 받아들이면서 다루어 주었으면 한다. 괜한 호들갑 떨면서, 그것이 이 사회를 이끄는 대세 트렌드인냥, ‘족’인냥 다루지 말았으면 한다. 그런 차분함 속에서 정말 트렌드가 제대로 읽힐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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