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초 미국 출장의 마지막 예정지는 뉴욕이었다. 날은 매섭게 춥지만, 햇빛 짱짱한 시카고의 하늘을 뒤로 하고 미국에서 가장 붐빈다는 오헤어(O'Hare)공항을 향하는 택시 안에서 뉴욕 친구가 좋지 않은 전조를 알려 주었다. 동부 지역에 폭설이 내리고 있는데, 그때까지 항공기가 결항되었다는 소리는 듣지 않았지만 사태가 어떻게 발전될지 모르겠다는 얘기였다. 공항은 예상외로 한적했다. 카운터에서 농담까지 주고받으며 기분 좋게 수속을 끝내고, 게이트 앞에 서자 분위기가 일순 심상치 않더니, 출발이 한 시간 연기되고, 곧 이어 세 시간 연기 표지가 걸리더니, 결국 비행기가 결항이란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줄을 몇 번에 걸쳐 선 끝에 우리 일행은 서부 LA로 피신하여 한국행 비행기를 타기로 했다. 겨우겨우 비행기를 잡아탔지만, LA에 내리는 순간 얼굴에 불어오는 봄의 향취를 넘어서 여름의 기운까지 느껴지는 푸근한 섭씨 20도의 바람과 반팔 차림으로 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에 피로가 싹 가시는 것 같았다.




        서울행 비행기 좌석 사정과 마침 LA에 역시 촬영차 출장을 온 멤버들과 다음 날 저녁 약속이 잡혀서 뜻하지 않게 하루 나절 쉴 수 있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동행의 죽마고우가 마침 LA에 있어서 합류하였는데, 해변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달려 ‘한미 우정의 공원’이라는 곳을 갔다. 미국 서해안을 달리는 1번 도로변의 확 트인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종각이 자리 잡고 있었고, 그 입구에 ‘전두환 대통령 각하 방미 기념식수(植樹)’라는 팻말이 작달막한 소나무 앞에 서 있었다. 기념식수를 한 때가 팻말을 보니 1981년 초였다. 어렴풋이 TV에서 역시 ‘전두환 대통령 각하 방미 특집’ 어쩌고 해서 보았던 기억이 났다. 그리고 그 때의 귀국 퍼레이드에 ‘연도에 도열한 학생, 시민’으로 동원되어 나가서, ‘살인의 추억’에 나오는 한 장면처럼 마포 어귀에서 오들오들 떨다가 박수 한번 치고, 근처의 친구 집으로 몰려가서 좁은 방에 엉켜서들 놀던 기억까지 또렷이 되살아났다.




        LA 남쪽의 ‘우정의 동산’에서 시내로 달리며 점심 식사 겸 간 곳이 게와 바다가재 요리로 유명한 레돈도 비치(Ledondo Beach)에 갔다. 평일이라서 관광객이나 방문객들은 별로 없고, 일본의 어느 중학교에서 온 수학여행단만이 잠깐 자기네들끼리 북적거리다가 햄버거들 사먹고 떠난 후, 모래 깔린 해변이 한 눈에 들어오는 널찍한 창을 갖춘 식당에 앉아서 게를 먹기 시작

했다. 그런데 한가롭기만 했던 해변에 갑자기 예사롭지 않게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들이 닥쳤다. 처음에는 결혼식 야외 촬영을 하는가 싶었는데, 하객들이 둘러서고, 똑같은 남방셔츠를 맞추어 입은 꼬마 들러리들에, 식을 집전하는 여자 목사까지 실제로 결혼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헐렁한 알로하 스타일 차림의 신랑과 대비되게, 깨끗하고 단순한 웨딩드레스를 맵시 나게 차려 입은 신부는 사진에서는 잘 보이지 않지만, 주인공답게 바닷바람과 딱 어울리는 건강하고 행복한 내음을 담은 미소가 온 얼굴에서 떠나지 않았다.

 

한 꼬마 들러리가 털썩 주저앉아 있는 모습은 결혼식장에서 비비 꼬며 어찌할 바를 모르는 우리네 애들과 별다를 바가 없다. ‘신랑은 신부를...’, 또 ‘신부는 신랑을 평생....’ 어쩌고저쩌고 하는 결혼서약에 둘이 "I do'라고 답하고, 식의 집전자로서 엄숙히 성혼선언을 하자마자, 여자 목사님은 예복을 벗어 던지고, 사진사로 돌변하여 이 신혼부부를 발끝에 물이 찰랑찰랑하는 데까지 끌고 가서 연신 작품사진을 찍어댄다. 고삐 풀린 듯한 꼬마 들러리들까지 합세하여 뛰어 놀고, 하객들은 가끔씩 고개 돌려 촬영에 여념이 없는 신혼부부를 보면서 자신들만의 추억만들기를 하는 듯 두서명씩 혹은 홀로 해변을 거닐고 있었다.




        가끔 신문이나 방송의 해외화제로 이색결혼식이 소개된다. 비행기에서 뛰어내리며 공중에서 도킹하여 반지를 교환하는 스카이다이버의 공중결혼식, 반대로 물 속으로 들어간 스쿠버들의 수중결혼식, 신혼부부는 물론이고 하객들까지 나체로 참여하는 누드 결혼식 등등. 그렇게 매스컴을 탄 대부분의 결혼식들은 억지로 화제꺼리를 만들기 위하여 지나치게 노력한 느낌이 들어 부담스럽다. 초점이 또한 지나치게 퍼포먼스 그 자체에 쏠릴 수밖에 없다. 화제에 오르고, 더 많은 하객을 모으는 것이 결혼식의 목적이 될 수는 없지 않은가? 새로운 부부의 탄생을 축하하고 그들의 행복을 빌어 주고, 신혼부부는 지인들에게 자신들의 사랑을 서약하는 결혼식의 본분에 우선 충실하여야 한다. 그런 면에서 레돈도 비치의 결혼식은 본분에 충실하면서, LA다움을 반영한 신선한 퍼포먼스였다. 바닷가 풍경과 잘 어울렸던, 예기치 않은 즐거움을 준 그 신혼부부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기를 자연스럽게 지켜보던 우리들도 기원했으니까.




        광고에서도 재미나 눈길을 끌만한 요소가 있어야 하지만, 자칫하다가는 본말이 전도되어 어떤 제품인지 브랜드인지 기억이 나지 않고, 기억을 한다고 하더라도 사고 싶은 마음이 전혀 일지 않지만, 광고만 기억에 남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응용은 한 번으로 족하다. 그것도 본질과 연계된 선상에서.

ⓒ 한경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