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광고”라는 졸문(拙文)에서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전문(全文)은 아래 참조-




‘요즘 많은 호평을 받는 광고들은 확실히 메시지는 화면 뒤로 숨고, 소비자들로 하여금 숨바꼭질을 하면서 그것을 찾게 만든다. 좋은 말로 하면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고, 소비자들이 나름대로 선택한 경로를 따라서 돌고 돌아 광고가 애써 전달하려 한 의미를 스스로 찾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광고 얘기를 할 때, 동양화에서의 ‘여백의 미’를 예로 자주 든다. 갤럽과 맥나라마에게 여백이란 숫자 ‘0’으로 인식되겠지만, 실제로 그 여백은 한계가 없이 무한대수까지 담을 수 있는 공간이다.‘




        지난 3월 12일 중국서화전시회의 그림들을 보며 갑자기 위의 대목이 생각이 났다. 전시회 자체가 우선 눈물이 날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함께 간 처(妻)가 홈페이지에 실은 소감을 살짝 빌리자.

 

오오오.... 한 마디로 이건 감동적인 전십니다. 화교 학교에서 단체로 관람을 온 듯 어린 애들을 모아놓고 중국어로 설명하고 있었지만, 한가하니 좋았죠. 한국말 가이드를 따라 설명을 들으면서 보았습니다. 아...제백석 뿐만 아니라  吳昌碩, 張大千, 李可染, 徐悲鴻 등 내로라 하는 대가들의 그림을 비롯해서 서태후의 그림, 원세개의 글씨까지 있었습니다. 흐미... 두 눈이 휘둥그레해질밖에요. 

 

        정말 깜짝 놀랄 정도의 작품들이 너무나도 허술하게 진열이 되어 있었다. 그것조차도 어떻게 보면 허술함 속의 여유와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많은 작품들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리커란(李可染)의 목우도(牧牛圖)였다.




 여기서 작가는 여백의 미를 떠나, 여백으로 실체를 만들어내는 마술을 부리고 있다. 물 찬 개울을 소들이 콧구멍까지 물에 잠겨 어푸어푸하면서 건너고 있는 정경을, 물을 굳이 그리지 않고도 너무나도 실감나게 표현했다. 엷게 칠한 소잔등이 물 먹은 털과 같은 효과를 주고, 어느새 또 손잔등에 올라 탄 인물의 시선을 따라 매화 가지로 눈이 옮겨진다. 실제로 그 인물의 눈은 보이지 않고 그가 어디를 보고 있는지도 명확하지 않다. 뒤에 따라 오고 있는 소가 걱정되어 보는 것인지, 정말 개울가의 매화를 보는 것인지, 아니면 보이지 않는 언덕에 누가 소리쳐 부르고 있는 것인지, 맘대로 상상하게 만든다.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은 내가 생각하는 동양화의 미덕, 곧 ‘무위지위(無爲之爲)’가 기가 막히게 잘 구현되었다.




        광고에서도 사실 이런 꼭 ‘말하지 않아도’, 소비자가 알아서 이해하고 공감하는 그런 광고가 좋다. 얼마 전에 어느 자리에서 강의를 하며, ‘어떤 브랜드가 좋은 브랜드냐?’, ‘어떤 광고가 좋은 광고이냐?’하는 질문을 받았다. 질문도 두루뭉술하고, 시간도 많지 않아 역시 두루뭉술하게 대답을 했다. “아주 단순하게 얘기하면, 말이 적은, 카피가 간결한 광고가 보통 좋은 광고이고, 그런 광고를 하는 브랜드들이 좋은 브랜드입니다.” 브랜드가 확실히 서 있으면, 자신감이 뒷받침되면 긴 말 할 필요가 없다. 뭔가 빠진 것이 없나 조바심을 내면서 쓸 데 없는 말이 많아지고, 정말 허접스러워 진다. 그리고 없을수록 자꾸 알아줘 달라고 꾸미다 보면 허튼 소리 하게 되고, 그 때문에 또 약점이 잡히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물리학 관련 서적으로는 최고의 베스트 셀러일 “시간의 역사”란 책의 서문에서 저자인 스티븐 호킹 박사는 동료 학자가 물리학 공식이 들어가면 공식 하나마다 독자들이 반으로 줄어들 것이라 해서, 공식을 쓰지 않으려 애를 썼는데, 결국 그 유명한 ‘E=mc2'만은 쓰지 않을 수 없다고 얘기했다. 그리고 이후에 나온 “호두껍질 속의 우주”에서는 ’복잡한 수학 공식 없이도 폭넓은 개념을 전달할 수 있다고 믿는다‘고 확실한 자신감을 피력했다. 공식을 알아야 하지만,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공식을 공식이 아니게 풀어낼 수 있어야 한다. 물을 그리지 않아도 감상자들이 알아서 물 냄새까지 맡게 만드는 그런 그림이 좋은 그림이다. 광고도 마찬가지이다. 지난한 과제이기는 하지만......




        전시회를 보면서 인상적이었던 또 한 가지. 중국에 우페이푸(吳佩孚)라는 1920년대 전후에 악명을 떨친 군벌이 있었다. 그의 서예 작품 한 점이 전시되었는데, 내 자신이 잘 모르기는 하지만 한동안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글씨였다. 단순히 한 면으로만 사람을 판단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아래는 졸저 “브랜드 마인드”에 실린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의 광고’ 전문)

-----------------------------------------------------------------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광고




모더니즘의 한계와 포스트모더니즘의 대두




        1980년대 말부터 시작하여 90년대 초까지 한때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말이 우리 사회를 풍미한 적이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을 본격적으로 논할 지식과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나는 간단하게나마 모더니즘의 한계로부터 파생되었다는 데서부터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이해를 시작했다.

그럼 모더니즘이란 무엇인가? 예전에 학교에서 교수 한 분이 헤겔에 대한 강의를 하시면서, 농담조로 “헤겔은 이 세상의 모든 역사와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논리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무엇이든 내게로 가지고 와서 물어보라’라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실제 헤겔 자신은 그런 식으로 정리를 했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어찌 보면 헤겔은 모더니즘의 정점이자, 그렇기 때문에 ‘변증법’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의 길을 닦은 사람으로 볼 수 있다. 헤겔 정도의 능력을 가진 천재가 뒤를 잇지 못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이론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일들이 너무 많이 일어났던 것이다.

헤겔처럼 거대한 사유체계 속에서 나온 말은 아니지만, 갤럽의 창설자인 조지 갤럽(George Gallop)의 다음과 같은 언급에서 광고마케팅, 매스미디어 세계에서의 모더니즘의 정점을 볼 수 있다.

“나는 신(神)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 여론조사를 통하여.”

조지 갤럽에게 세상은 너무나 합리적이고, 설사 합리적이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자신은 그것을 합리적으로 재구성하여 산뜻하게 보여줄 수 있다고 느꼈을 것이다. 양차 세계대전을 자신들의 땅에서 치르면서 모더니즘의 한계를 느끼고, ‘실존주의’, ‘구조주의’ 등의 새로운 틀로써 세계를 조망하고 표현하는 것을 모색했던 유럽의 지식인들은 아마 갤럽의 그런 언급에서 천박하기 그지없는 미국의 문화적 깊이를 느꼈을지도 모르지만.

        그렇긴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용어가 본격적으로 사용된 것은 1960년대 월남전 소용돌이 속의 미국이었다. 케네디와 존슨 대통령 밑에서 국방장관으로서 월남전 개입부터 확전까지 실질적 주역으로 활동했던 로버트 맥나라마(Robert McNarama)는 자동차 회사인 포드(Ford)사의 전문경영인 출신으로 수리(數理)의 천재, 인간 컴퓨터로 불렸다. 어떤 문제든지 수리화하고, 그에 따라 역시 수리화된 명확한 답을 낸다는 평판을 들는 사람이었다. 수치(數値)에 입각한 철저한 품질 관리로 ‘품질의 포드’라는 명성을 쌓게 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에게 월남전은 정말 누워서 떡 먹기 식의, ‘전쟁’이라고 부르기도 뭐한 것이었으리라. 월맹군이 가지고 있던 무기 총량, 인구와 징집 가능한 병사의 수, 산업 생산량을 포함한 모든 수치 자료를 종합해보건대, 미국이 약간만 지원해도 압도할 수 있는 상황이라고 그는 판단했다.

몇십 년이 지나서 그는 ‘수치화할 수 없는 월맹인들의 의지, 애국심’을 간과한 것이 실수였다고 인정했다. 맥나라마는 한참이 지나서야 자신의 지나치게 모더니즘적인 태도에 대한 잘못을 깨달았다고 했지만, 미국의 지식인들에게 월남전은 그 자체로 한동안 자신들이 눈을 돌리지 못했던 미국 사회가 안고 있는 부조리, 곧 모더니즘적으로 해석되지 않는 부분에 대한 의문을 본격적으로 던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용어의 본격적인 대두 및 그에 대한 탐색으로 이어졌다. 더 큰 의미를 찾는다면, ‘철학의 대중화’라고까지 하기는 그렇지만, 자신들의 문제에서 미국이란 세계의 물질적 풍요 속에 묻혀서 바라보지 못했던 더 큰 세계로 눈을 돌려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고, 나아가 다원주의(多元主義)가 싹을 튼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케네디 대통령의 핵심 브레인 중 한 명이었던 갤브레이드 교수는 70년대의 오일 쇼크를 정확하게 예측한 석학이었지만, 결국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서구 세계를 ‘불확실성의 시대’라고 규정지었고,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론적인 지주라고 할 수 있는 이합 하산(Ihab Hassan)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여덟 가지 특성을 얘기하면서, 불확실성-그는 ‘Uncertainty’가 아닌 ‘Indeterminacy’라는 용어를 썼다-을 처음으로 제기했다. ‘Indeterminacy’라는 단어에는 쓸데없이 어떤 현상이나 사물을 정의(定義)하여 속박하지 말라는 뉘앙스가 담겨져 있다. 그러면서 포스트모더니즘 자체도 사회의 주류를 형성하는 사조, 문학과 미술을 포함한 예술 전반에 걸쳐 개방성, 해체, 반항, 변용, 다원성, 이단의 정신 등의 불확정적인 이론들을 전부 포괄하는 개념으로 느슨하게 얘기하고 있다.




단선, 직선적 사고를 탈피하는 광고




        뜬금없이 포스트모더니즘 얘기를 한 것은 요즘 광고들이 무슨 얘기를 하는 것인지 불분명하고, 관련 없는 그림을 나열하고 말장난이나 친다는 불평을 많이들 하는데, 이것 자체가  광고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란 현재의 시류를 반영하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예전의 광고는 메시지를 최소한도로 단순화시켜서 그것을 소비자들이 가장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예전에 광고회사들의 프레젠테이션에서 가끔 볼 수 있었던 장면 중 하나가 있다. 한동안 자주 보다가 너무 남용하는 바람에 요즘은 식상해졌고, 그래서 보기 힘들어진 장면이다.

프레젠터가 자기 동료나 광고주 중 한 사람에게 공을 하나 던져준다. 당연히 잘 받는다. 다음에는 두 개를 던져준다. 받는 경우도 있고, 못 받는 경우도 있다. 받는 경우 서너 개를 한꺼번에 다시 던진다. 대부분의 경우 아무 공도 못 받는다.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자명하다. 너무 여러 가지를 얘기하지 말라. 하나만 딱 잡아서 얘기해라.

그런데 문제는 광고를 만들다 보면 하나의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것을 다른 식으로 해석한다는 점이다. 점과 점을 잇는 가장 짧은 선은 직선이란 식의 메시지를 향해 곧장 돌진하는 것이다. 곧 잠재 고객들에게 다른 것을 생각할 여유를 주어서는 안 된다고 해석하고, 자신들이 하고 싶은 얘기를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경향으로 흐르기 십상이다. 그리고 곧잘 그런 흐름을 정당화시켜주는 것이 소비자 조사를 포함한 수치화된 분석, 예상치, 결과다.

문제는 어느 정도 궤도 위에 오른 기업들은 모두 비슷한 종류의 조사를 하고 해석 자체도 기본적인 현상 분석 등에서는 그리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결국 성패는 동일한 결과와 해석을 놓고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데서 갈리게 마련이며, 여기서 이른바 통찰력과 직관(Insight & Intuition)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는 수치로 확신을 심어주기 힘든 부분이다. 더 근본적인 문제점은 소비자 조사를 남용하다 보면 진정으로 소비자가 고객으로서 기업의 조직 내에 설 자리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사실 소비자 조사를 시작할 때의 목적은 누구나가 소비자의 소리를 직접 들어보자는 것인데, 어느 순간에 인간으로서의 소비자는 없어지고 숫자만 남는다. 소비자를 숫자로 객관화시켜버리는 조직에서, 주체로서의 소비자의 마음을 읽거나 고려하는 것은 기대하기 힘들다.

요즘 많은 호평을 받는 광고들은 확실히 메시지는 화면 뒤로 숨고, 소비자들로 하여금 숨바꼭질을 하면서 그것을 찾게 만든다. 좋은 말로 하면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고, 소비자들이 나름대로 선택한 경로를 따라서 돌고 돌아 광고가 애써 전달하려 한 의미를 스스로 찾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광고 얘기를 할 때, 동양화에서의 ‘여백의 미’를 예로 자주 든다. 갤럽과 맥나라마에게 여백이란 숫자 ‘0’으로 인식되겠지만, 실제로 그 여백은 한계가 없이 무한대수까지 담을 수 있는 공간이다.

예전에는 수백만 명으로 이루어진 소비자 세그먼트가, 말하자면 동일한 특성을 가졌다고 간주되는 그룹이 존재했는데, 이제는 한 사람 안에 수백만 개의 세그먼트가 존재한다는 식으로 인식이 바뀌고 있다. 그런 인식선상에서 한 사람을 어떤 종류라고 단정을 내린다든지, 수치화하여 표현하는 모더니즘적 접근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다. 어떻게 보면 포스트모더니즘의 가장 큰 미덕은 요즘 몇몇 광고의 무대 뒤편에서 볼 수 있듯이 숫자로 대표되는 이성(理性)이란 틀에서 인간을 해방시킨 것이라고도 하고 싶다.

ⓒ 한경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