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를 하면서,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고 이것 저것 시도를 하면서 '끌로 판다'는 표현을 하곤 한다. 그런데 자꾸 끌로 파다 보면 제일 먼저 사람이 사라지고, '소비자'라는 이름의 객체만 남고, 어떤 때는 그것조차 사라지고 제품이라는 물체만 남았다가, 결국은 그것조차 없어지고 끌만 남는 경우가 종종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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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트레이드센터 테러 뒤편의 멕시코




멕시코공항 입국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중의 하나. 특히 미국으로부터 항공기가 들어 왔을 때. 남북한 이산가족 상봉과도 같은 장면이 곳곳에서 펼쳐진다. 전자제품 박스를 비롯하여 이민백을 카트가 모자라게 싣고 나오는 멕시칸 남자의 눈자위는 세관을 통과하면서 이미 붉어지기 시작하여, 입국장 로비에 서 있는 가족들을 확인하는 순간 눈물이 줄줄 흐르기 시작한다.

 

나이보다 훨씬 늙어 보이는 부모를 껴안고 한바탕 눈물을 흩뿌리는데, 그 부인은 예전 조선의 아낙마냥 한 발짝 떨어져 어리둥절해 하는 아이의 손을 잡고 조용히, 그러나 연신 눈물만 훔쳐 댄다. 눈물이 약간 잦아들 즈음 마침 생각이 난 듯이 부인을 향해 손을 벌리고 다시금 눈물이 샘솟는 귀국한 남편에게 부인은 반발짝만 다가서는데 이제는 눈물을 훔칠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런 남편에게 이제는 부인이 마침 생각난 냥, 그 반발짝의 틈새로 아이를 끌어 들인다. 이미 어리둥절하고 상황이 어색하기 짝이 없는 아이는 자꾸 뒤로 내빼려 하면서 움츠려 들지만, 그런 행동이 아빠의 눈물샘을 더욱 자극하며, 아빠는 왜소한 덩치에 비하여 억센 팔로 아이를 번쩍 안아 들고 기쁨, 회한, 고마움이 교차되는 표정의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된 얼굴을 아이의 얼굴에 마구 부비어대면서 눈물의 상봉의 클라이막스를 장식하고, 에필로그처럼 아이가 엄마 쪽으로 구원의 손길을 내밀면서 '앙'하고 참다 참은 울음을 터뜨린다.


2001년 9월 11일 월드트레이드센터의 희생자들 중에 근처 피자가게나 델리 등의 배달원들이 상당 수 있는데, 그들 대부분이 멕시코인들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멕시코인들의 대부분이 불법체류자임은 불문가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그들에 대한 정확한 집계가 되지 않고 있다. 그 동네의 가게들에서 자기네 배달원 중 몇 명이 사건 이후 실종되었다고 얘기하곤 한다지만, 그들에 대한 아무런 기록이 정부 쪽은 물론이고, 고용자인 가게측에서도 거의 알고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란다. 어느 한 가게 주인의 말처럼 그들이 어디에 사는지, 가족 관계는 어떻게 되는 지는 고사하고, 성(姓)조차도 모르고 이름만 알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란다.

 

언젠가 멕시코 공항의 입국장에서의 감격적인 상봉을 그리면서 살았을 그들이었지만, 맨하탄에서는 단지 배달기계에 불과했을 뿐이다. '호세', '후앙' 등의 이름들도 기계에 붙여진 번호의 변형일 따름이었다. 국경 너머에서 똑같은 상봉의 꿈을 키웠을 사람들에게 그들은 부모를 봉양하고 가정을 이끌어 가는 믿음직한, 어쩌면 이웃들의 부러움을 사는 가장이었을 터이지만, 일방적으로 그 자랑스러운 가장으로부터의 소식이 끊긴 지금, 그들은 맨하탄의 또 다른 '호세'를, '후앙'을 가장으로 둔 이웃을 통해 그들의 '호세'를, '후앙'을, 실날 같은 희망으로 그들을 뒤덮은 절망을 애써 삭이려 노력하면서 찾고 있을 것이다. "천국과는 너무 멀고, 미국과는 너무 가까운 불쌍한 멕시코여!"라고 멕시코인들은 한탄하지만, 미국이 결코 가깝지 않다는 것을 절감하면서.





인터넷 ID로만 존재하는 인간




월드트레이드센터 사건 직후 멕시코로 출장을 가 주말을 보내며, 호텔방에서 96년에 보았던 영화 한 편을 거의 시작하는 부분부터 끝까지 다시 보게 되었다. 실베스터 스탤론, 안토니오 반데라스, 줄리안 무어가 주연한 "암살자(Assassins)"란 그렇고 그런 액션과 서스펜스가 잘 조화되기는 하였지만 좀 허무맹랑한 내용의 영화였다. 이런 영화를 거의 전편을 다시 보게 된 데는 세 가지 이유가 있었다.




뒤에 가서 두 번째로 들 이유 때문에 이런저런 자리에서 이 영화 얘기를 자주 했는데, 무엇에 홀렸는지 계속 여자 주인공을 샌드라 블록이 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정작 줄리안 무어가 그 역을 맡고 있었던 것이 사소하기는 하지만, 첫 번째 이유였다. 해커로 나오는 여자 주인공이 호텔방의 환기통을 통하여 자신에게 전해지는 돈을 보면서, 앙큼하면서도 귀여운 표정을 지으려 노력하며 "Come on, come on"할 때의 어색함이 샌드라 블록의 모습으로 깊게 각인되어 있는 것을 비롯하여, 여자 주인공이 출연하는 모든 장면에서 갈색 머리에 약간 각진 턱을 보완하는 큰 입을 가진, 장난기 어린 눈매의 샌드라 블록이 어떤 표정으로 연기를 했는지 기억에 선명한데, 막상 이번에 보니까 전혀 다른 생김새의 줄리안 무어가 그 역할을 했던 것이다. 심리학적으로 이런 착각과, 그 착각이 점차 심화되는 이런 현상을 일컫는 용어가 있는 것 같은 데, 심리학을 전공한 친구들에게 물어보았지만 아직 속시원한 대답을 듣지 못했다.




두 번째 보다 중요한 이유는 해커로 나오는 여자 주인공은 가족도 친구도 우리의 주민등록번호와 같은 소셜시큐러티 번호(SSN)도 없으며, 자신의 원래 이름까지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며, 오로지 인터넷 ID로만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상황 설정이었다. 96년 처음 이 영화를 볼 때는 그렇게 되는 경우도 영화에서야 가능하겠지 정도로 생각을 했었는데, 인터넷이 확산되고, 사람들이 온라인에서 활동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이런 상황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현실에서의 자신에 대한 욕구불만을 인터넷 상에서 또 다른 나를 만들어 푼다는 기본적인 개념까지 걱정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문제는 자신의 실체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오로지 인터넷 상에서만 존재하는 또 다른 '나'가 자신을 정의하고 행동을 규정하여 실제의 나를 잃어버리는 그런 결과를 가져 올 수도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또 다른 '나'의 속성상 이 영화에서의 여자 주인공처럼 정보를 빼내서 그것을 팔아 먹거나 어느 시스템을 무력화시킨다든지 또는 평범한 학생이 '조폭사이트'나 '폭탄사이트'를 만드는 식으로 폭력, 공격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기 쉽다는 데서, 기존에 우리가 얘기하던 '자기소외'나 '자아상실' 등의 개념보다 훨씬 심각한 문제를 야기시킬 것이다. 그럼 이러한 문제를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인터넷에 욕설이 난무한다면서 개탄과 함께 '건전한 인터넷 문화 조성'을 주창하는 시리즈를 게재한 신문도 있었지만, 그야말로 근본적인 원인은 도외시한 지엽적인 미봉책에 불과한 얘기다.

 



열린 접촉의 인간 관계를 기원하며




거시적인 안목으로 보면 인터넷 ID로만 존재하는 인간이나, 번호와 다를 바 없는 퍼스트 네임으로만 존재하는 대척점의 인간, 둘 다 극도로 상업화된 현재 사회의 어두운 면이 약간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

 

제러미 리프킨(Jeremy Rifkin)은 2000년에 펴낸 "The Age of Access(한국판 제명: 소유의 종말)"-나는 왜 이 책의 제목이 "소유의 종말"로 번역되어야 했는지 모르겠다. 저자는 '소유'라는 개념의 변화와 종말에 대해서 얘기를 하기도 했지만, 접속의 시대에 나타난 하나의 주요한 현상으로만 다루었을 뿐이다-에서 상업적 가치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현재 사회에서 지난 시절의 공동체적 유대를 가진 인간관계가 파괴되는 모습을 예전의 '광장'과 현재의 '쇼핑몰'의 비교를 통하여 보여 주었다. 의사를 소통하는 열린 광장이, 더욱 넓어지고 화려하지만 무대장치처럼 꾸며진 현대의 쇼핑몰로 대체되면서, 인간들은 그 소도구 또는 엑스트라로 바뀌어 버리며, 진정한 인간간의 관계는 파괴된다는 것이다. 그런 인간 관계의 단절은 함께 공유하는 가치로서의 문화를 말살하게 되고, 결국은 상업 가치가 존재할 수 있는 기반까지 없애 버리게 된다. 그의 결론은 의외로 간단하다. 서로 얼굴을 맞대고 몸을 부비며 더욱 많이 접촉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접속의 시대에!

 

인류의 희망은 인터넷망이 조밀하게 깔려 무수한 ID들이 난무하고, 호세와 후앙이 그 미로 속을 뛰어다니는 맨하탄보다는 차라리 멕시코 공항 입국장의 그 눈물바다 가운데 있다 하겠다.




영화를 본, 그것도 끝까지 보게된 세 번째 이유. 영화 제목을 잊어 버렸었다. 제목을 보기 위하여 'The End" 사인이 뜬 후에도 5분간이나 더 TV 앞에 앉아, 그 긴 크레디트를 다 보아야만 했다. 제목, 완전한 형태의 이름, 브랜드의 중요성을 다시금 절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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