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를 연령에 따라 과일에 비유하는 우스개소리가 있습니다. 남자를 불에 비유하는 것과 비슷한 것이지요. 어느 것이든 젊음에 대한 부러움과 나이든 사람에 대한 안쓰러움을 담고 있지요. 나이란 정말 그렇게 부정적인 요소만 지니고 있는 것인지요?




저는 서너해 전 봄, 논물이 그렇게 아름다운지 처음 알았습니다. 경기도 일산 근처를 오가는 동안 봄 햇살에 반짝이며 찰랑대는 논물이 어쩌면 그리도 예쁘던지요. 누가 듣더니 "나이가 드나 보다"고 했습니다. 듣고 보니 그런 듯했지만 그것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제 경우 나이 들어 잃은 것도 많지만 얻은 것도 적지 않습니다. 뭐든 가능할 것같던 때와 달리 내몫이 아닌 걸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긴 했지만 대신 조금은 참을 줄도 알고, 사물을 좀더 폭넓게 바라보게도 됐으니까요. 젊은 시절의 패기가 그립기도 하지만 어이없던 치기는 부끄럽기만 합니다.




언젠가 TV 퀴즈프로그램에 출연한 한 주부가 "사는 동안 언제가 가장 행복했느냐"는 진행자의 질문에 "지금"이라고 대답하는 걸 듣고 좋아보였던 것도 "나이든 게 죄만은 아니구나" 싶어서였습니다.




이런 만큼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착잡하고 때로 울화통이 터집니다. 드라마 속 아줌마들은 거의 한결같이 푼수거나 속물로 그려지고 있으니까요. 전업주부와 전문직 여성 상관없이 도무지 사리판단을 제대로 못하거나 돈만 아는 허영쟁이, 그도 아니면 같은 여자에 대한 질투 덩어리로 나오는데 도대체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습니다.




MBCTV의 일일극 "인어아가씨", KBS2TV의 주말극 "저 푸른 초원 위에"를 보면 정말이지 대한민국 중년여성들이 언제부터 저렇게 게으르고 철딱서니 없이 살았나 싶습니다. "인어아가씨" 등장인물들의 캐릭터와 이야기 전개는 비상식적인 게 워낙 많지만 주인공 은아리영(장서희)과 시어머니(김용림)의 관계는 씁쓸하기 짝이 없습니다.




복수의 화신에서 어느 순간 천사표로 변한 젊은 며느리는 춤에서 요리, "남자 비위 맞추기"까지 못하는 게 하나도 없는데 나이든 시어머니는 "친구들과 며느리 흉보고, 마사지실 다니면서 노는 것 외엔 아무 것도 할 줄 모르는" 한심한 사람입니다. 며느리한테 사사건건 잔소리를 듣는 건 물론 남편과 아들에게도 타박받기 일쑤입니다.




뿐인가요. "어머니가 가족을 위해서 하는 일이 뭐가 있으세요? "라고 대드는 며느리에게 시어머니가 하는 말이라는 게 고작 "헬스클럽 다녀서 내가 건강해지는 것도 가족을 위한 일이야. 이유 상관없이, 나는 네가 나를 고치려고 하는 게 그냥 싫어"입니다.




아줌마들의 이기심과 터무니없음은 예영엄마(한혜숙)와 마린 엄마(고두심)에게도 여지없이 드러납니다. 아리영과 예영, 즉 젊은 여자들끼리는 이복자매인 걸 안 뒤 서로 이해하고 절친해지는 등 화합의 길을 가는데 예영엄마와 마린 엄마로 대표되는 아줌마들은 친구 사이면서도 끝없이 서로 헐뜯고 시샘합니다.




푼수 내지 이기심의 화신이기는 "저 푸른 초원위에"의 아줌마들도 같습니다. 성연호 엄마(양희경)는 병원장인데도 의사인 딸을 부잣집에 시집보내지 못해 안달이고, 강태웅 엄마(김자옥)는 대책없는 푼수입니다. 방 두칸짜리 집에 세들어 사는 형편에 자동차 세일즈맨인 아들에게 "기왕 차를 살 거면 중형차로 사지"라고 말하는 식입니다.




아줌마들이 한결같이 이악스럽지 않으면 천덕스럽고 모자란 존재인데 반해 젊은 여자들(성연호 성순호 성연호이모)은 순수하고 조카에게 애인을 빼앗기고도 사랑하는 사람의 입장을 존중하는 착하고 이지적인 여성으로 등장합니다.




지난해 많은 사람들로부터 호평을 받은 MBC TV "네멋대로 해라"에서도 젊은 여자들(이나영과 공효진)은 연적인데도 서로를 이해하는데 반해 아줌마(이나영 엄마)는 임신한 채 다른 남자와 결혼한 뒤 틈만 나면 옛남자를 만나는 무책임한 행동을 일삼습니다.




어째서 젊은 여자들은 순수하고, 합리적이고, 똑똑한데 나이든 여자들은 교육 직업 환경에 상관없이 욕심사납고 치사하고 비합리적일까요.




나이든 여성을 이처럼 극도로 이기적이거나 주책덩어리로 묘사하는 건 남성작가나 젊은 여성작가가 집필하는 드라마인 수가 많습니다. 김수현(내 사랑 누굴까) 김정수(흐르는 강물처럼)씨등 나이든 여자작가들의 드라마에선 아줌마나 할머니도 나름대로 역할이 있는 것과 대조적이지요.




여자고 남자고 나이들면 다소 낯이 두꺼워지는 게 사실일 겁니다. 안그러면 이 험난한 세상을 헤쳐나가기 어려울 테니까요. 여자들의 경우 살다보면 순간의 선택이 얼마나 많은 걸 좌우하는지 뼈저리게 느끼게 되고 그러다 보면 자식들에겐 되도록 시행착오를 덜 겪도록 해주려 애를 씁니다.자식중심적이 되다 보면 젊은 사람들 눈엔 돈밖에 모르는 속물로 비쳐질 수 있겠지요.




그렇긴 해도 나이 들면 젊은 여자들이 갖기 힘든 세상살이 지혜와 사물을 다각도로 이해하는 마음을 지니게 마련입니다. 제아무리 사장 회장 부인이고 탤런트고 디자이너라도 한국 여성은 집안을 간수해야 하는 만큼 중년쯤 되면 살림살이 지식도 늘어나구요.




그런데도 TV 드라마에서 나이든 여성의 연륜에서 비롯되는 지혜와 신중함 등은 깡그리 무시되고 젊은 며느리에게 "세상 똑바로 사는 법을 배워야 하는 존재"로 그려지는 건 미디어가 만들어내는 "더이상 젊고 예쁘지 않은 여성"에 대한 편견과 최근 우리 사회 곳곳에서 심화되는 "세대 가르기" 혹은 "윗세대 타파"의 또다른 형태는 아닌가라는 의구심마저 들게 합니다.




젊음과 아름다움이 소중한 건 틀림없지만 그렇다고 나이든 여자들을 모두 우스개거리나 욕심덩어리로 몰아세우는 건 가뜩이나 기성세대는 낡은 사고방식 때문에 개혁의 대상으로 여겨지는 상황 속에서 어머니의 존재마저 부정하게 만드는 건 아닌가 싶어 쓸쓸해집니다.




글쎄요. TV속 아줌마들을 그렇게 형편없이 만듦으로써 현실속 아줌마들에게 "어떻게 저럴 수가 있어" 하며 가족을 위해 더욱 열심히 봉사하게 만들려는 숨은(?) 의도가 있는 건지는 또 모르겠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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