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를 여행한다는 것이 보편화된 것은 오래 전의 일이 되었고, 사람에 따라서는 일 년에 몇 차례 정도는 꼭 해외여행을 즐기는 정례화의 단계에 이른 요즈음, 어떤 나라의 어떤 도시가 얼마나 친절한지는 쉽게 비교가 될 뿐만 아니라 국가나 도시의 관광수입에도 큰 영향력을 미친다. 마음에서 우러나는 친절을 경험했던 나라에 다시 가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이며, 친절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아주 예전도 아니고 불과 5년 전과 비교한다고 해도 우리 사회의 여러 분야는 참 많이 친절해졌다. 글로벌 경쟁사와 무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 사기업은 말할 것도 없이 불친절의 대명사였던 관공서들도 어느 때 부터인가 환골탈태를 한 거 같이 친절해졌다. 처리할 업무가 아주 많지 않은 경우라면 일어나서 민원인들을 맞는 동사무소나 구청들도 생겼고, 여러 번 물어봐도 짜증내지 않고 친절하게 안내를 해주는 것은 기본이 되었다. 친절을 건강한 사회의 지표로 이야기할 수 있다면 한국 사회는 많이 발전한 것처럼 보인다. 적어도 각종 증명서를 발급받으러 구청에 갔다가 아무런 설명도 없이 오래 기다렸던 기억이나, 심지어 서류 발급에 소요되는 시간을 줄여보려고 ‘급행료’를 공공연히 지불했던 일들은 아련한 옛 추억 같은 일이 되어 버렸다. 세금을 낸 국민이라면 당연히 받을 수 있는 국가의 행정서비스조차 급행료가 필요했던 시절을 생각하자니 그리 좋은 추억은 물론 아니다.

이렇게 친절이라는 덕목이 우리 사회에 어느 정도 정착화 되어 가고 있어서 인지 우리는 친절에 많이 적응되어 있다. 아니, 적응되었다는 표현보다는 익숙해졌다라고 말하는 것이 나을 거 같다. 고객을 응대하는 사람도 보다 자연스럽게 친절함을 표현할 줄 알게 되었고, 불친절에 익숙했었던 우리들도 친절함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 지를 배우게 되었다. 무엇이 진정한 친절인지도 깨닫게 되었고, 어색한 상황을 만드는 과잉 친절도 구별할 줄 알게 되었다. 친절은 동네의 작은 구멍가게에서부터 대형 마트에 이르기까지 매출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불친절을 감수하면서까지 물건을 다시 사러가는 사람은 더 이상 없기 때문이다.

사회의 분위기가 이렇다 보니 상냥함과 친절함이 조금만 없어도 금단현상 아닌 금단현상을 느낄 때가 있다. 친절 금단현상이라고나 할까. 내가 갑의 위치에 있고 상대방이 을의 위치에 있다면 금단현상은 더 심해져서 조금이라도 친절함이 없다고 판단되면 화를 내거나 각종 매체를 이용하여 항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얼마 전 용무가 있어 구청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중년으로 보이는 남자가 창구에 앉아 있는 담당 공무원에게 큰 목소리로 항의하며 책임자의 호출을 요청하고 있는 광경을 봤다. 말이 항의이지 실은 특정 직업에 대한 모역적인 욕설에 가까웠다. 담당 공무원은 아무 말도 못하고 그냥 욕설을 듣고 앉아만 있었다. 어떤 사연이 있는 지는 잘 몰랐지만 공공장소에서 그렇게 큰 소리로 언성을 높이는 것을 보면 이것도 상대방에게 받아야 한다고 굳게 기대하고 있었던 공손함과 친절함을 받지 못해서가 아니었을 까라는 상상을 해보았다.

친절함이란 결국은 상대방을 존중하는 마음에 나온다고 생각한다. 갑의 위치에 있으니 당연히 받아야한다고 생각해서도 안 되고, 을의 위치에 있으니 의무적으로 주어야한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당연함과 의무감이 존재하는 친절은 어색함을 만들어 낸다. 이런 어색함이 계속 되면 친절은 없고 친절 금단현상만이 남게 된다고 생각한다.

친절이 국가의 글로벌 경쟁력이 되는 시대다. 경쟁력은 결국 서로 존중하는 친절 속에 있을 것이다. 상대방에게 친절을 기대하기 보다는 상대방의 입장을 먼저 이해할 때 친절은 비로소 완성된다. 상대방을 존중하는 친절의 완성은 사회의 발전을 일구어 내는 원동력이 된다.




– 이 칼럼은 9월 14일자 서울신문에 게재된 본인의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