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이 왔습니다. 저녁 뉴스에서 눈이 올 거라고 했지만, 하늘이 하도 총총해 믿지 않았는데 새벽에 보니 바람에 여기저기 흩어지긴 했어도 틀림없이 왔더군요.




"까마득하게 잊어버렸던 이름 하나가


시린 허공을 건너와


메마른 내 손등을


적신다"




시인 김용택씨의 이라는, 아주 짧은 시입니다. 첫눈을 보면서 문득 아득히 잊었던 사람을 떠올리는, 삶에 지쳐 팍팍하고 삭막해진 이의 모습이 이보다 더 절절하게 그려질 수는 없을 듯합니다. 쓸쓸하고 서글프긴 하지만, 그래도 첫눈은 이렇게 가슴에 묻었던 젊은 날과 정신없이 사느라 잊고 지낸 그리운 얼굴들을 생각나게 합니다.




첫눈에 관한 시 가운데는 정호승씨의 라는 것도 있습니다. 내용은 이렇지요.




"사람들은 왜 첫눈이 오면 / 만나자고 약속을 하는 것일까.


사람들은 왜 첫눈이 오면/ 그렇게들 기뻐하는 것일까.


왜 첫눈이 오는 날 누군가를 만나고 싶어하는 것일까.




아마 그건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첫눈이 오기를 기다리기 때문일 것이다.


첫눈과 같은 세상이 두 사람 사이에 늘 도래하기를


희망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도 한때 그런 약속을 한 적이 있다/ 첫눈이 오는 날 돌다방에서 만나자고.


첫눈이 오면 하루종일이라도 기다려서/ 꼭 만나야 한다고 약속한 적이 있다.




그리고 하루종일 기다렸다가 첫눈이 내린 밤거리를


밤늦게까지 팔짱을 끼고 걸어본 적이 있다.


너무 많이 걸어 배가 고프면


눈 내린 거리에 카바이드 불을 밝히고 있는


군밤장수한테 다가가 군밤을 사 먹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약속을 할 사람이 없다.


그런 약속이 없어지면서 나는 늙기 시작했다.


약속은 없지만 지금도 첫눈이 오면/ 누구를 만나고 싶어 서성거린다.


다시 첫눈이 오는 날 만날 약속을 할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첫눈이 오는 날 만나고 싶은 사람, / 단 한 사람만 있었으면 좋겠다"




시보다는 산문에 가까운 듯하지만 보통사람들의 생각을 잘 전하고 있는 듯보입니다.




여러분은 첫눈 오는 날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으신지요?? "첫눈 왔으니 만나자"고 하면 화들짝 반가워 하며 만사 제치고 달려나올 사람은요?? "애들처럼, 무슨" 하며 피식 웃거나 "그러고 싶긴 하지만 바빠서" 라며 뒤로 빼지 않고 말입니다.




나이 들면 단순한 생각이나 말도 상대방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몰라 선뜻 하기 어려워지는 일이 잦아집니다. "첫눈이 왔으니 보자"처럼 간단한 말을 하기 힘들어지는 게 대표적인 경우인 것같습니다.




국회의장을 지낸 서울대 총동창회의 김재순회장님께선 지금도 첫눈이 오면 수필가 피천득선생님을 만나신다고 합니다. 함께 만나는 다른 분이 또 계신 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두 분은 첫눈이 오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전화해선 만나 경복궁이든 어디든 걸으신다는 겁니다. 김재순회장님은 올해 일흔아홉, 피천득선생님은 아흔둘이시지요.




여러분도 오늘 한번쯤 이렇게 나이 한참 들어서도 첫눈 온 것 핑계로 만날 수 있는 사람을 떠올려 보시면 어떨른지요?? "아이고, 먹고 살기도 바쁜데...." 하지 말고 말입니다.




눈 얘기 나온 김에 황동규씨의 `눈내리는 오천성`도 소개합니다. 여러 가지로 심란하고 어지러우시더라도 잠시 시 속의 고요함과 정결함에 빠져 보실 것을 권합니다. 그리고 나면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고 맑아지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언덕이 사라지고/ 성문이 묻힌다.


아 손바닥들이 하얀 돌계단/ 조심조심 짚고/ 돌성 속에 몸 들이민다.


솔솔 눈 뿌리는 소리.




눈발 속에 덤불들이 사라지고/ 해송 머리칼들이 사라지고/


드디어 자욱이 바다가 사라진다


종이상자 껍질로 창 막은 교회 하나/ 하얀 어깨가 자란다.


솔솔 눈 뿌리는 소리.




멧새 한 마리 눈앞에서/ 눈 털며 날아.


또 한 마리/ 눈 털며 따라 날아.


떠다니는 저 따뜻한 피들.




눈발이 굵어지고 새들이 사라지고


적막!




내 슬그머니 사라져도


저 눈 뿌리는 소리 그대로 들리겠지.


아 청결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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