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깡패 시대가 열렸더군. 재미있던데. 사람들이 좋아할만한 요소를 잘도 모았잖아"


잘 아는 출판계 대가 한 분의 `조폭 마누라`에 대한 평이었습니다. 불문학 전공의 출판인답게 독서와 영화광인 이분의 말씀은 제게 상당한 충격을 안겨줬습니다. 솔직히 저는 관람 도중 내내 마음이 무거웠거든요.




`조폭마누라`를 보는 도중 객석에선 자주 20대 여성들의 웃음소리가 들렸습니다. 나이가 웬만큼 든 저도 민망스럽게 여겨지는 대목에서조차 깔깔 대고 웃는 걸 보고 묘한 감정에 사로잡혔습니다. "뭘 몰라서 그러나, 아니면 저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건가"




여자깡패라는 설정은 확실히 새롭습니다. `꽃미남`이라는, 제게는 상당히 거북스럽게 들리는 단어가 신문지상에 공공연히 등장하고 `강한 여자, 부드러운 남자`가 당연시되는 사회 분위기에 이 영화가 잘 맞는 것도 분명합니다.




그러나 과연 이 영화가 `강한 여자`를 보여주고 있는 건지요. `형님` 소리를 듣는 여자가 언니의 말 한마디에 평범한 남자와 결혼을 결심하고,남자한테 잘 보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술집아가씨에게 물어보고, 아이를 갖겠다며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남자에게 덤비고.....




뿐인가요. 임신한 채 적진에 뛰어들어 목숨을 걸고 싸우는 마당에 "배는 때리지 말라"고 애원하는 건...... `천하없는 깡패라도 여자는 여자다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일까요?




영화가 도덕적이어야 한다고는 믿지 않습니다. 오히려 영화 속에서 관객을 향해 설교하거나 억지로 교훈적인 내용을 전하려 드는 건 딱 질색입니다. 영화든 연극이든 소설이든 하고 싶은 얘기를 그냥 풀어놓으면 된다고 믿습니다. 뭘 느끼느냐, 뭘 얻느냐, 뭘 생각하느냐는 모두 관객과 독자의 몫이라고 보는 거지요. 그러나 `15세이상 관람가` 등급영화에서 손가락을 빠는 식의 장면이 무시로 등장하는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관객이 많이 드는 영화는 그야말로 `뭔가`가 있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입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조폭마누라`는 아무래도 씁쓸했습니다. 글쎄요. 두고 봐야겠지요. 얼마전 TV에서 `투캅스 2`를 다시 볼 기회가 있었는데 `너무 도덕적`이라는 느낌이 들었으니까요. 처음 봤을 땐 그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말입니다. 참!!




21세기초 우리 사회가 조폭과 킬러를 너무도 필요로 하는 걸까요. 물론 `킬러들의 수다`는 `조폭마누라`와는 많이 다릅니다. 그다지 불쾌하지도 않고, 극장문을 나서면서 나름대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대낮에 사람을 총으로 난사해 죽이고, 대한민국 최고의 공연장인 예술의전당에서 공공연히 죽이고, 그런 걸 뻔히 아는 현직검사가 "그냥 가라. 기물파손비 5만원만 내고 가라"고 한다는 설정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젓가락을 던져 남자의 눈밑에 바로 꽂히게 만들 수 있는 대담함과 무서움을 지닌 여자가 언니가 원하는 아기 때문에 "배는 때리지 말라"고 애원하고, `I never miss you`를 해석할 수 없는 일자 무식 킬러들이 예술의전당 설계도를 분석할 줄 안다는 식의, 비현실적이고 황당한 설정을 우리는 과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어차피 영화는 오락이고, 그것도 만화에 가까울수록 인기있는 마당에 사실성이 무슨 소용이냐고 한다면 할 말이 없겠지요. 재미있고 그래서 한국영화가 외화를 밀어내고 관객점유율 50%에 육박하는데 "기자 아니랄까 봐 흠 못잡아서 야단이냐"고 한다면 더더욱 입을 다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소재야 어떤 경우에도 사회현실을 반영한 것일테니 이해한다고 해도 `구성과 전개는 세련돼야 하지 않을까`라고 한다면 너무 지나친 요구일까요?




영화 `스코어`를 보면 범죄자가 판치는 건 우리 사회뿐만은 아닌 것같습니다. 캐나다 안의 프랑스라는 퀘백주 몬트리올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에선 또 도둑이라도 완벽하면 된다고 말하고 있으니까요. 뛰어난 도둑 얘기는 서양영화의 고정레퍼터리중 하나긴 합니다만.....




글쎄요. 평범한 술집 사장이 알고 보면 도둑이고, 도둑질하는데 친아들까지 동원한다는 설정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건지요. 도둑질도 들키지만 않으면 되는 건가요, 정말!!




`달마야 놀자`에 이르면 조폭은 더욱 멋있어집니다. 의리있고, 머리도 괜찮고..... 드디어 깡패보다 싸움을 더잘하는 스님까지.... `약속`에서 지적인 깡패로 나온 박신양은 이번에도 역시 멋진 깡패로 등장하더군요. 달라진 점이 있다면 최근 국산영화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인, `푼수같은 남자`에 한층 가까워져 있다는 겁니다.




조폭이든 킬러든, 남자든 여자든, 한편으론 강하고 한편으론 마냥 푼수(순수를 가장한)처럼 그려내는 한국영화는 과연 무엇을 대변하는 것일까요.




스물네시간 바짝 긴장하고 누군가 나를 공격할까 물먹일까 얼굴 근육 한번 제대로 못풀고 살면서도 주먹 한번 못 휘두르는 한국의 남녀들이 어딘가 모자라는 듯하면서도 필요할 땐 주먹도 칼도 마음껏 휘두르는 영화속 조폭과 킬러를 통해 잠시나마 시원함을 느끼는 것일까요.




살기가 너무 어렵다 보니 자기 대신 누군가 흠씬 두들겨 패준다는 것만으로도 카타르시스를 만끽하는 것일까요. 그냥 요즘 우리 대중문화의 코드라는 "엽기,과장,순수(?)"를 잘 보여주기 때문일까요.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이제 겨우 빛을 보고 있는 한국영화에 찬물을 끼얹을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습니다. 다만 영화란 어떤 경우에도 `재미`와 함께 `꿈`과 `감동`도 좀 줘야 되는 것 아닐까라는 `보수적이고 전통적이고 순진한` 생각을 지울 수 없을 따름입니다.




조폭과 킬러, 도둑이 판치는 세상에서, 안들키면 되고, 무조건 이기면 된다고 말하면서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어떻게 `지킬 건 지켜야 한다`고 얘기할 수 있을까 싶기도 하구요.




아, 혹시 아직 안보신 분들을 위해 참고로 말씀드리면, `달마`는 부담없이 재미있고, `킬러`는 황당하지만 불쾌하진 않고, `스코어`는 지루하고, `조폭`은 ........입니다. 선택과 판단은 전적으로 독자 여러분께 달려 있습니다. `달마`는 12세이상 관람가이고 나머지는 15세이상 관람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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