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5월이면 사랑, 감사, 존경의 마음들이 풍성하고 따사로운 햇살만큼이나 우리들의 구석구석을 밝혀주고 채워준다. 특히 올해는 사회 곳곳에서 아버지라는 이름이 화두가 되어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것을 보고 ‘대나무’가 떠올랐다. 대나무는 씨앗을 심은 후 처음 4년 동안은 하나의 죽순 빼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며 4년 동안의 치열한 성장과정이 오로지 땅속에서만 이루어진다. 우리 아버지들의 치열한 삶의 궤적도 대나무처럼 서서히 땅속 깊이 넓게 퍼져 나간다. 그리고 나서 5년째 되는 해 대나무는 25미터 높이로 훌쩍 자란다. 이런 대나무의 치열한 성장을, 치열한 노력을 땅위의 누가 알까? 이러한 경이로운 대나무의 성장은 땅속에서 탄탄하게 뿌리내린 4년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처럼, 오랜 기간 동안 보이지 않는 곳에서 쏟아 부은 아버지들의 수많은 땀과 눈물이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 가정이, 사회가 존재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자리가 위기라고 하는 이 때, 텅 빈 대나무의 속처럼 비어버린 우리 아버지들의 이름을 찾아 드리고 싶다.  

 작년 7월 고홍주(Harold Hongju Koh) 미국예일대 법대 학장 초청 강연회에 참석했던 기억이 새삼 떠올랐다. 고 학장은 법, 인권, 민주주의의 가치와 더불어 인간, 가족, 교육의 중요성을 강연 내내 강조했다. 공식행사가 끝나고 많은 이들이 고 학장 주변으로 몰려들었는데, 고 학장과 인사를 나누고 돌아보니 미국에서 함께 참석한 그의 부인 메리 크리스티 피셔 변호사와 아들에게 궁금증이 생겼다. 

 리처드 레빈 예일대 총장은 고 학장을 “학자이자 변호사, 공직자로서 지식에 대한 애정과 정의에 대한 열정을 구현한 사람”이라고 평가한바 있는데,  1000명이 넘는 사람들 앞에서 법과 세계화, 인권을 주제로 강의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지켜보는 아들은 과연 어떤 마음일까 몹시 궁금했다. 아무도 자신에게는 말을 걸어오지 않던 차에 나의 질문이 반가웠을까? 아버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어떤 점이 가장 존경스럽고 닮고 싶으냐고 물었다. 평범한 아버지가 아니기에 무언가 거창한 대답을 기대하던 내게, 환한 미소와 함께 아들은 아버지의 성실함과 정직함을 최고로 꼽으며 아버지는 바쁘신 가운데에도 항상 성실하게 생활하신다며 그 모습이 존경스럽다고 했다. 아들은 그 중에서도 아버지의 정직함을 가장 닮고 싶다고 했다. 아버지와 똑같은 길을 걷고 싶으냐는 물음에는 아버지처럼 살고 싶긴 한데 미래 직업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지 않았다며 쑥스러워 했다.

 ‘북구의 쇼팽’이라 불리는 노르웨이의 작곡가 그리그가 죽은 지 올해로 100년째다.
그리그는 부모와 매우 다정하게 지냈는데 어머니는 그리그의 음악적 재능을 북돋워 주었으며, 아버지는 일생 동안 그리그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그의 음악가로서의 활동을 격려했다.

그리그가 25세 때 작곡한 이 단 하나 뿐인 피아노 협주곡은 결혼해서 갓 태어난 딸을 데리고 아내와 덴마크에 있는 시골집에서 행복한 생활을 보내고 있던 중에 쓴 곡이라서 밝고 발랄한 정서를 담고 있으며 그의 작품 중 최대 걸작으로 손꼽힌다. 초반 팀파니와 피아노의 격정적인 대화가 화려하고 극적으로 시작되면서 목관악기의 차분함이 모두를 감싸 안는 부드러움과 풍요로움이 넘치는 곡이다.

 이민 2세대로 미국 사회에서 교육자, 변호사, 공직자로 성공한 이로만 고 학장을 알고 있던 나는 그 아들의 대답에서 진정한 그의 성공을 엿볼 수 있었다. 우리가 말하는 성공의 많은 의미 중에서 가족을 빼고 어찌 말할 수 있겠는가 싶다. 가족에게 인정받고 사랑받지 못하는 성공은 너무 허망하지 않은가.

Grieg, Piano Concerto in A minor, Op. 16 1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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