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시리즈 2차전을 관람하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사진, 엑스포츠


 

왕자님이 오셨다. 하필 뵐 낯 없는 이런 때에.

삼성 라이온즈는 최근 해외 원정도박 스캔들에 휘말리며 창단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 이렇게 뒤숭숭한 때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대구시민야구장을 찾았다. 남의 집 일로만 여겼던 구설수에 주축 투수들이, 그것도 3명이나 오르며 기업 가치에 흠집을 입은 때에. 부동의 에이스와 셋업맨, 마무리 투수가 모조리 이탈하며 통합 5연패가 좌초 위기에 빠진 와중에 왕자님이 행차하신 것이다.

 

그리고 졌다. 왕자님 앞에서, 그들은 경기를 시원하게 말아먹었다.

삼성은 27일 열린 한국시리즈 2차전에서 두산 베어스의 선발 더스틴 니퍼트를 공략하지 못하며 1 대 6으로 무릎을 꿇었다. 대구구장에서의 마지막 홈 경기일지도 모르는 일전이었다. 내년 새집으로 이사 가는 삼성으로서는 한국시리즈가 6차전 이상 진행되지 않을 경우 이대로 대구구장과 작별한다. 왕자님은 아마도 그래서 잠실이 아닌 대구로 오셨을 것이다.

 

  1. 친국(親鞠)?


 

하지만 이날 왕자님은 겪어본 적 없는 일을 경험하고 말았다. 자신이 직접 경기장을 찾는 날엔 반드시 삼성이 이기는 ‘직관 불패’의 기록이 중단된 것이다. ‘승리 요정’이던 왕자님이었다.

 


왕자님은 LG를 땅으로 만드셨다. SBS ESPN(현 SBS스포츠) 중계화면


 

TV 전쟁을 치르던 때 LG 트윈스가 ‘보라! 누가 하늘이고 누가 땅인지’라는 플래카드로 도발하자 왕자님은 친히 경기장을 찾았고, 경쟁사는 2 대 8로 묵사발이 됐다. 궁전에서 중계를 보다 느닷없이 야구장에 나타났을 때는 거짓말 같은 역전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리고선 류중일 감독에게 “요즘 야구가 너무 재미있다”며 태블릿PC와 금일봉을 하사했던 왕자님은 요즘도 야구가 재미있을까.

 


왕조를 이룬 류중일 감독과 왕자님. SBS ESPN 중계화면


 

이 부회장이 어린 시절 김시진 전 롯데 감독(당시 삼성 투수)에게 꿀밤을 맞아가며 야구를 배운 것은 유명한 일화다. 삼성이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는 순간을 야구장에서 함께하기도 했던 그였다. 야구단을 소유한 기업 오너들 가운데 이 부회장의 야구장 방문이 유난히 잦은 데엔 각별함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삼성전자가 글로벌 1류 기업으로 거듭나는 기간에 삼성 라이온즈 역시 KBO리그에서 왕조를 구축하며 궤를 같이 했다.

때문에 이 부회장의 한국시리즈 관람은 평소와 다르게 의미심장한 면이 있다. 사무실과 가까운 잠실이 아닌 대구까지 내려가서, 시리즈 클린치 상황도 아닌, 상대팀 에이스가 선발로 예고된 경기를 지켜봤다는 점이다. 윤성환, 안지만, 임창용에 대한 구단 차원의 징계가 아무 것도 결정되지 않은 상황이지만 “내 다 지켜보았노라”는 강력한 메시지는 아니었을까. 자신의 등장에 어떤 의미가 부여될지 모를 리 없는 그다.

 

  1. 무색해진 ‘믿을 맨’이란 이름


 

삼성 그룹이 사실상 이 부회장 체제의 닻을 올리면서 감지된 가장 큰 변화는 사업 재편과 구조조정이다. 한계에 직면한 사업에선 과감히 발을 빼기 시작했고 신사업에 투자를 집중했다. 돈이 되지 않는 마케팅을 중단했고 인사제도 개편과 인적 구조조정도 예고했다.

2014년 순손실 171억원을 기록한 삼성 라이온즈 역시 예외가 될 수 없었다. 경쟁사 광고를 유치해서라도 5년 뒤엔 자립형 구단으로 만들겠다는 목표다. 하지만 오너가 헛돈을 쓰지 않겠다는데 계약 총액 155억 트리오는 해외에서 헛돈을 썼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이 가운데 윤성환과 안지만은 5년 전 ‘카지노 출입 및 도박을 절대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쓴 바 있다. 이들이 서명한 각서엔 ‘어길 경우 임의탈퇴 처분을 받는다’는 조항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사실이라면 가장 불명예스러운 시즌 아웃으로 기록 될 윤성환, 안지만, 임창용.


사진, 엑스포츠


 

이 도덕적 치명타는 삼성의 최근 행보에 완전히 역행하는 것이기도 했다. 삼성병원 메르스 사태 관련 초유의 대국민 사과,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의 주주가치 훼손 논란에 대한 주주친화책 발표, 청년희망펀드 기부 등 도덕적 기업으로 변모를 꾀하는 삼성의 시도를 희석시켰기 때문이다. 의외의 장소에서 터진 대형 스캔들에 삼성은 당혹스러워 했다. 당사자들 또한 비로소 자신이 고액 연봉의 운동선수이기 전에 삼성맨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모른다.

 

물론 이들이 불법을 저질렀다 해도 ‘어떤 편법’만큼 모기업의 이미지를 훼손하진 않았을 것이다. 다만 실수를 만회할, 아니 세탁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뿐이다. 그리고 사회적 약자이신 왕자님께서 이들의 공백으로 인한 패배와 비난을 목도하셨을 뿐이다.

그나마 해피 엔딩에 대한 일말의 희망이라도 보이는 것은 “억울하다고 항변했다”는 인용의 인용을 통한 소식이 들린다는 점이다. 이들이 정말 억울한 상황이기를, 왕자님의 왕국도 부디 평화롭기를 바란다. 아니라면 돈이라도 땄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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