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국립현대미술관은 광복 70주년을 기념하여 “거장 이쾌대 :해방의 대서사”라는 제목으로, 해방기 우리 민족이 처한 현실과 예술가의 사명을 붓으로 끌어안었던 화가 이쾌대의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가기 전에 제목만 봤을 때는 해방 전후의 복잡한 시대적 표현과 좌우이데올로기가 표현된 작품들이 많을 거라는 생각을 가지고 갔었다.


그리고 팜플렛에서도 “식민지하에서 새로운 해방국가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이 민족의 수난을 직시하고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담고 있다...... 전시를 통해 이쾌대가 품고 있었던 민족에 대한 뜨거운 애정 , 역사를 증언하고자하는 예술가의 사명을 느낄 수 있다.” 이런 문구들이 있어서 그런 생각을 더 많이 했고 < 군중>이라는 작품을 본 적이 있어서 더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가서 보니 우선 그가 유화발표전 당시 방명록이 있었는데 많은 문학가들의 친필 싸인이 눈에 들어 왔다. 임화 , 오장환 , 설정식 등을 볼 수 있었다. 그들과 활발한 교유를 했던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당시 출판되었던 < 신가정>, < 춘추> ,< 민성 >, < 아동구락부>의 표지를 그렸다고 한다. 가끔 그 잡지들을 살펴보았었는데 표지가 늘 촌스럽다고 생각했는데 거기서 보니 새삼스러웠고 그 표지 디자인도 하나의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친필편지들을 보면서 글씨가 그림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은 손글씨를 별로 안쓰다보니 학생들 글씨를 보면 이게 글씨인지 낙서인지 구분이 안될때가 가끔 있는데 이쾌대의 글씨는 글씨자체만으로도 뭔가 이야기가 있을 것 같았다.


이쾌대는 휘문고보를 나왔고 그 졸업반이었던 때 유갑봉을 만나 결혼을 한다. 이쾌대는 아내를 모델로 한 그림을 수없이 그렸는데 사랑하는 아내 유갑봉은 이쾌대에게 예술적 영감을 불어 넣는 뮤즈와 같은 존재였다고 한다.


그의 연애편지를 보면 “ 이 세상 만물을 하느님이 창조해 낼 적에 어떤 해 며칟날 유씨따님 ( 유갑봉) 과 이씨 아드님 ( 이쾌대 )이 서로 만나서 그날부터 두 사람의 사이에 온전하고 행운한 사랑이 싹터 영원토록 즐겁게 살라는 것을 미래의 두 젊은이들에 약속하셨나 봅니다. 라는 구절이 있다. 그 당시에 아마 유난스런 사랑을 했던 두 사람이었던 것 같다. 소설속에서나 할 수 있었던 말들을 이렇게 하다니 ,


그는 휘문고보를 졸업하고 유갑봉과 함께 일본 유학을 갔다가 와서 1939년 초 귀국해 궁정도 16-3에 자리를 잡는다. 그리고 그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던 형 이여성은 1938년에 옥인동 56으로 이사를 한다. 지금은 이여성의 집터에는 단독 아파트 건물이 들어서 있고 이쾌대가 거주하던 궁정동 집은 지금의 청운동 사무소 앞 사거리에서 청와대 앞 분수대로 이어지는 도로 상에 있었는데 1910년대 초 이곳에 직선도로가 나면서 헐렸다고 한다. 그곳에서 예술에 대해 종래의 것들을 뛰어넘는 작품들을 많이 그렸다고 한다.


그러나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어머니의 병환 때문에 서울을 떠나지 못하여서 조선미술동맹에 가입을 하는데 다시 상황이 바뀌어 유엔군이 상륙하고 서울수복이 임박한 9월 20일경 이쾌대는 북행길에 오른다. 그러나 이쾌대는 얼마 지나지 않아 국군에게 체포되어 거제도 포로 수용소에 수감하게 된다. 그 경위는 나중에 거제도에서 미술지망생 이주영을 만나서 이야기를 하였는데 나중에 이주영의 후손에 의해서 밝혀졌다고 한다.


이쾌대는 자발적으로 북행을 선택했던 것이 아니라 부역을 하다가 북쪽으로 끌려가게 되었고 북행길에 국군에게 체포되어 의용군으로 오인돼 수용소로 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수용소 안에서 죄우 포로들 간에 대립이 극심할 때 주변 사람들의 신망을 얻었던 이쾌대를 다른 막사의 반공포로들이 좌익 제거 대상으로 찍었다는 것이다. 결국 그는 포로심사에서 남쪽을 선택할 경우 풀려나기도 전에 죽을 것을 우려하여 북한행을 선택하였다고 한다. (최종현, 김창회 , 『오래된 서울』 ,동하, 305쪽 -306쪽)


그런 사연을 보았었는데 마침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가 전시되어 있었다. 편지속에서는 내가 아는 자세한 정황은 쓰여 있지 않았지만 “한민 모 보오 ”라는 글로 이 편지는 시작된다. < 9월 20일 서울을 떠난 후 5.6일동안 줄창 걷다가 국군의 포로가 되어 ..............나의 생사를 모르는 당신에게 이 글월을 보내게 되니 ..... 그리고 우리 꼬마 한우 생각할수록 보고 싶소 그려 아 !........아껴둔 나의 채색 등은 처분할 수 있는 대로 처분하시오 그리고 책, 책상 , 헌캔버스 그림들도 돈으로 바꾸어 아이들 주리지 않게 해 주시오 . 전운이 사라지어 우리 다시 만나면 그때는 또 그때로 생활설계를 새로 꾸며 봅시다. 내 마음도 지금 안방에 우리 집 식구들과 모여 앉아 있는 거 같습니다. 다음 또 쓰기로 이만 줄입니다. 11월 11일 이쾌대 >


이 편지글을 읽는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월북 가족들의 고초는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 가족도 예외는 아니었다고 한다. 늘 집 주위에는 사복 경찰이 맴돌았고 유갑봉 여사는 수차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는데 그런 상황에서도 남편의 작은메모에서부터 대작들까지 그의 그림을 고이 간직하였다. 그리고 그녀가 지켜내었던 그림과 이야기들이 지금 세상에 빛을 보게 되는 것을 보며 사랑의 힘은 어떤 이데올로기보다 더 큰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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