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시즌은 진짜 잘하겠습니다.’

한화 이글스가 2014시즌 마지막 홈 경기를 1 대 22 ‘눈물의 자멸 서커스’로 마치고 그라운드에 들고 나왔던 플래카드 문구다. 6시즌 동안 5번의 꼴찌를 경험한 이 팀이 늘 그랬듯 공염불을 외는 듯했다.

하지만 한화는 절치부심한 듯 정규시즌 종료 직후 기민하게 움직였다. 포스트시즌으로 뜨겁던 10월 말 ‘야신’ 김성근 감독 선임을 발표한 것이다. 성적 보증수표와도 같았던 김 감독의 KBO리그 복귀는 과정도 대우도 파격이었다. 팬들의 요청에 김승연 회장이 김 감독 선임을 흔쾌히 결정했으며, 옵션 포함 3년 연봉 총액 20억원과 팀 운영 전권을 보장한 것이다. 사실상 탈꼴찌 선언을 넘어 가을야구 출사표인 셈이었다. 적어도 올해 여름까지는.



‘지옥훈련’을 받고 쉬는 추승우. 5월 말 웨이버공시 됐다.


사진, 한화이글스 페이스북.


 

  1. 가불받은 축복, ‘마리한화’는 독약이었나


 

스프링캠프 지옥훈련을 시작으로 시즌 중엔 경기 후 야간 특타, 펑고까지. 김성근식 야구가 복귀를 신고했고 무기력했던 한화는 완전히 다른 팀이 됐다. 2014시즌 128경기에서 고작 49승을 거뒀던 팀이 2015시즌 84경기 만에 44승을 기록하며 전반기를 5위로 마친 것이다. 특히 44승 가운데 27승이 역전승이었던 까닭에 흥행에서도 우수한 성적표를 받았다. 중독성 있는 야구라며 마리화나에 빗댄 ‘마리한화’라는 유행어까지 탄생했다.

한여름 대전은 8년 만의 가을야구에 대한 기대로 들뜨기 시작했다. 또한 이와 맞물려 야신 김성근의 신화는 드디어 그 결정판을 보이는 듯했다. 그러나 8월과 9월, 불과 2개월 만에 모든 것이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한화는 후반기 리그 최다인 21번의 역전패를 당하며 무너졌고, 결국 대전에 가을은 오지 않았다. 한화의 8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 실패와 더불어 김 감독 역시 커리어 최초로 부임 첫해 포스트시즌 탈락이란 고배를 마셨다. 지난 2년간 FA 선수 영입에 300억원을 쏟아부은 이 빅마켓의 최종 성적표는 10개 구단 중 7위였다.

거의 다 잡았던 티켓을 놓친 후폭풍은 컸다. 뉴스에서 야신이란 단어가 사라졌다. 대서특필 되던 ‘야신 리더십’이 모두 종적을 감추고 무수한 논란만이 남은 것이다. 언론도 팬들도 질타와 두둔으로 대립했다. 김 감독, 그리고 그들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1. 총력전, 하이 리스크 노 리턴


 

야구의 페넌트레이스는 팀당 144경기로, 의무 휴일인 월요일을 제외하면 4월부터 10월초까지 거의 매일 경기가 있다. 때문에 소모성 자원인 투수들의 경우 투구수와 등판 간격 관리가 철저하게 이루어지는데, 대개 선발투수는 5인 로테이션을 지킨다. 구원투수들의 경우엔 경기 상황에 따른 역할을 나누고, 피치 못할 경우가 아니라면 사흘 연투를 금기시 하는 방향으로 기용된다. 경기의 패색이 짙어질 경우 이른바 패전조를 내보내고, 그동안 체력을 아낀 필승조로 다음 경기를 잡는 식이다. 이것이 현대야구 투수분업화의 핵심이다.

하지만 올 시즌 한화가 보여준 야구는 과연 2015년의 야구가 맞는지 눈을 의심하게 했다. 훈련도 작전도 선수기용도 김 감독식 그대로였지만 그가 없던 몇 년 새 야구계의 판도는 완전히 바뀌어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김 감독의 야구는 더욱 공포의 외인구단, 그리고 그 시대의 야구 같아 보였다. 차이라면 김 감독의 야구엔 엄지가 없다는 것일 뿐.

 


“그만 해, 엄지가 싫다잖아!” 


MBC에서 방영됐던 ‘공포의 외인구단’의 한 장면(엄지-까치-마동탁).


 

올스타 브레이크 직후 성적이 추락하자 김 감독은 총력전을 선언한다. 사실 감독의 입에서 나온 말이 없었을 뿐이지 한화는 개막전부터 한국시리즈를 치르듯 줄곧 총력전 모드였다. 여기서 김 감독의 총력전이란 일반적인 총력전과는 의미가 다르다. 가용전력 총동원이 아닌 정예전력 상시투입을 의미한다.

선발투수가 조금이라도 흔들리는 기색을 보이면 어김없이 조기강판됐고, 구원진은 경기 초반부터 5분 대기조처럼 몸을 풀다 출석도장을 찍듯 순서대로 등판했다. 김 감독의 전매특허 퀵후크였다. 3실점 이하의 선발투수를 6이닝 이전에 강판시키는 퀵후크가 반복될수록 구원투수들에겐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는데, 한화는 올 시즌 69회의 퀵후크로 이 부문에서 압도적 1위였다. 시즌의 절반 가까이 퀵후크를 남발한 것이다.

권혁, 박정진, 송창식 등 뒷문을 지키던 투수들에 대한 혹사 논란이 불거졌던 것도 이와 같은 이유에서다. 위기 상황에 등판시키기 위해 아껴야 했을 이들을 승패와 점수차를 가리지 않고 등판시키다 보니 정작 필요할 때 부진하거나 이미 지쳐버려 쓸 수 없었다. 구원진의 과부하는 앞서 밝혔듯 한화가 후반기 최다 역전패를 기록하며 추락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권혁의 통산 성적. 왼쪽 붉은색이 평균자책점, 오른쪽이 투구이닝. 자료=KBO


 

특히 혹사 논란의 핵심인 권혁의 경우 올 시즌 투구이닝이 최근 3년치와 맞먹는다. 전반기 막바지부터는 구위가 저하되는 모습을 보이며 평균자책점이 4.01까지 오르더니 결국 4.98로 시즌을 마감했다. 권혁은 마무리투수인지 마루타인지 모를 수치의 평균자책점 외에도 올 시즌 최다패 투수이자 역대 최다패 구원투수라는 불명예도 덤으로 얻었다. 권혁과 함께 한화 불펜의 양대 축이었던 박정진은 아예 9월 10일 이후론 등판하지 않았다. 5강 싸움 총력전에서 필승조가 경기에 나서지 않는다는 것은 그가 부상자명단에만 오르지 않았을 뿐 사실상 시즌아웃 됐다는 의미이다.

이에 대해 김 감독은 최근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선발이 5명도 안 되는 팀은 한화밖에 없었다”며 “선발야구를 할 수 없기 때문에 불펜에 무리가 왔다”고 항변했다. 그러나 올 시즌 5인 선발 로테이션이 꾸준히 돌아간 팀은 삼성 라이온즈가 유일하다. 삼성의 선발진은 역대 최초로 전원 두 자릿수 승을 달성하는 금자탑을 쌓았지만 그렇다고 처음부터 궤도에 오른 것은 아니었다. 선발투수가 부진하더라도 6회까진 믿고 맡기고(시즌 퀵후크 11회로 최소), 이후엔 철저히 휴식을 보장하는 게 류중일 감독의 전략이자 철학이었다.

넥센 히어로즈의 경우엔 한화보다 상황이 좋지 않았다. 두 명의 용병투수를 제외하곤 선발진이 전멸에 가까운 수준이었기 때문에 페넌트레이스 내내 땜빵 선발을 내세워야 했다. 토종선발의 부재는 넥센의 고질병이었다. 그런데 뜻밖에 시즌 중반 귀중한 선발 자원 얻었다. 스타는 아니었지만 한화의 프랜차이즈였던 양훈을 영입한 것이다. “선발이 없다”던 김 감독이 트레이드 카드로 양훈을 쓴 덕에 넥센은 말 그대로 투수를 주울 수 있었다. 경찰청 전역 후 한화 2군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던 양훈은 넥센으로 이적한 뒤 16경기 2승 1패 평균자책점 1.41을 기록한다. 공교롭게도 김 감독의 지시 때문에 감량했던 체중을 다시 늘린 뒤 나온 성적이다.

 


MBC스포츠플러스에서 우회적으로 지적한 올 시즌 한화의 야구.


간결하게, 그리고 모든 게 담겨있다. 


 

한화의 경우 선발로 20경기 이상 나섰던 투수 가운데 120이닝 이상을 소화한 건 미치 탈보트와 안영명 둘뿐이며, 선발을 고려해 FA로 영입했던 배영수와 송은범은 각각 101이닝과 70.1이닝을 던졌고 그마저도 불펜을 오갔다. 두 선수에게 쓴 금액은 총액 55억원.

반면 권혁은 구원으로만 100이닝을 돌파했다(박정진 96이닝, 송창식은 선발 포함 109이닝). 구원투수의 100이닝은 2010년 SK 정우람 이후 최초 기록이며, 당시 SK의 감독 역시 김 감독이었다. 경기 수가 더 많은 메이저리그에서도 구원투수의 적정 투구이닝을 70이닝 내외로 보고 있는 것에 비하면 놀라울 정도다.

하지만 김 감독은 “내부 사정이란 게 있는데 남의 일에 대해선 말하기 쉽다”며 여전히 혹사라는 단어를 입에 담지 않았다. 해설위원 시절 “선수는 소모품이 아니기 때문에 감독은 장기적 안목으로 팀을 운영해야 한다”며 감독들에게 일침을 날렸던 김정준 한화 전력분석코치도 조용하다. 그는 김 감독의 아들이다.

(투수의 과도한 이닝 소화가 가져오는 비극은 이전 글 ‘아무도 말하지 않는 류현진의 재기 가능성 5.6%’ 참조.)

 

  1. “이럴 거면 차라리 탈락했으면 좋겠어요”


 

“김성근 감독님을 모셔와야 한다”며 김 감독 선임에 앞장서던 한화 팬들이 “제 발로 나가라”며 등을 돌린 것은 시즌 막바지가 도화선이 됐다. 송창식과 김민우에게 제대로 된 휴식을 주지 않고 각각 구원 연투 후 선발등판-선발등판 후 구원 연투를 시키는 상식 밖의 기용을 한 것이다. 송창식은 희귀병인 버거씨병을 앓았던 데다 전임 김응용 감독 시절부터 혹사 논란의 당사자였다(물론 2015년 김성근 109이닝 > 2013년 김응용 71이닝). 그리고 김민우는 올 시즌 한화에서 유일하게 두각을 나타낸 신인.

한화 이글스 공식 홈페이지와 야구 커뮤니티 MLB파크에선 “무리해서 5강 경쟁을 하느니 내년 시즌을 준비해야 한다”, “이러다 곳간이 다 거덜나겠다”며 김 감독을 질타하는 목소리가 거셌다. 그가 ‘남은 시즌 올인’ 선언 대신 팀 리빌딩과 내년 시즌 기약을 병행했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메이저리그에서 한화와 비슷한 시기 암흑기를 보낸 휴스턴 애스트로스가 올 시즌 10년 만에 포스트시즌에 다시 진출한 배경엔 인고의 리빌딩이 있었다.

 


김인식 감독 시절 한화 팬들이 플래카드를 걸고 항의하던 모습.


 

김 감독은 팀의 큰 그림을 그리기보다 임기 중 성과에 과도하게 집착한 대가를 내년 시즌 치르게 됐다. 투수들의 몸 상태를 떠나 미래를 이끌 유망주들이 이 기간 동안 경험을 쌓은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나마 내야 기대주 강경학이 자주 출장했지만 그 역시 40세의 권용관에게 밀려 벤치를 지키는 일이 많았다. 김 감독이 즉시전력감을 선호하는 탓에 1군에서 선수 육성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트레이드조차 유망주를 주고 즉시전력감을 받아오는 식이라는 것. 한화 선수단의 평균연령은 31세로 10개 구단 가운데 최고령이다(KT 위즈 26세 최연소).

 

  • 김 감독은 올 시즌을 앞두고 소속팀이 없어 미아가 됐던 권용관을 한화로 데려왔는데, 흥미로운 건 두 사람이 세 번째로 같은 팀에서 뛴다는 것이다(2001년 LG, 2010년 SK, 2015년 한화). 실책을 저지르는 즉시 경질성 교체를 단행하는 김 감독도 권용관에게만은 예외를 뒀는데, 하필면 권용관이 한화의 5강 탈락을 사실상 결정짓는 실책(9월 16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이후 선수 기용에 대한 논란이 커졌고 김 감독은 9월 17일 권용관을 2군으로 내렸다. 당시까지 팀이 치른 132경기 중 88%인 116경기를 소화한 뒤였다.


 

선수 기용에 대한 잡음은 경기 외적인 부분에서도 나왔다. 하주석과 김용주가 군에서 제대한 직후 1군에 등록된 것이다. 올 시즌 중 1군에 하루라도 등록된 선수는 FA 보상선수와 내년 있을 2차 드래프트 대상자가 된다. 시즌 막바지 몇 경기를 위해 자칫 이들을 다른 팀에 빼앗길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한 것이다. 물론 예외를 적용할 수 있는 보호선수 명단이란 게 존재하지만 2차 드래프트에 대해선 40명까지, FA 보상선수에 대해선 20명까지만 포함 가능하다.

반대로 이 둘을 1군에 등록하면서 조정원과 채기영은 임의탈퇴 처리 됐다. 선수단 정원 65명이 가득 찼기 때문에 2명의 자리를 비워야 했고, 마침 군대에 가야 하는 조정원과 채기영이 그 대상이 된 것이다. 67명의 선수를 65명으로 보이게 하는 편법을 쓴 셈인데 선수의 동의를 얻었다고는 하지만 문제는 임의탈퇴라는 방식이다.

임의탈퇴는 방출의 한 수단이지만 선수 징계를 위해 만들어졌다. 임의탈퇴 공시 직후 해당 선수의 자격이 정지되고, 해제 역시 원 소속 구단에서만 가능하다. 선수로서의 자격이 정지됐기 때문에 조정원과 채기영은 현역으로 군입대를 해야 하고 군보류수당(연봉 25%, 최대 1200만원)도 받을 수 없게 됐다. ‘사람을 버리지 않는 리더’의 시즌 10번째 방출이었다.

 


경기를 지켜보는 김 감독. MBC스포츠플러스 중계화면 캡처


 


올 봄 다른 글에서 야신의 품격을 보여주길 당부한 바 있다(비열하고 외로웠던 마운드, 4월 12일 사직). 바람대로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본 게 없는 것도 아니었다. ‘내일은 없다’는 각오에서 나온 무리수가 어떻게 내일을 지워버리는지, 과도한 성과주의와 리더의 아집이 어떻게 조직을 위기로 몰아넣는지를 보았다. 그리고 지금이 2015년이라는 것을, 신화는 늘 과거에 존재함을 깨달았다.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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