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크고 작은 일로 걱정하고, 행동을 주저하고, 막연히 두려워한다.



걱정거리와 두려움이 없는 상태가 행복인데, 우리는 너무도 많은 걱정과 두려움으로 행복을 깨고 있다. 밥벌이의 불확실, 자리 보존의 불투명, 대인관계의 불안, 투자의 결과에 대한 초조함, 미래의 불확실, 몰래 벌린 일의 노출, 천벌(天罰)에 대한 두려움 등 두려움은 긴장하면서 신중하게 살도록 하는 순기능도 있지만, 두려움 중에는 활기와 생기를 죽이고, 행동을 위축시키고, 소심하게 하는 역기능 두려움이 많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못하게 하는 소심한 두려움, 상처 받는 것이 무서워 접근 엄두를 못내는 두려움, 반발과 원망이 무서워 조언도 못하는 두려움, 대인 기피와 대인 공포 등 사람에 대한 두려움, 구더기 무서워서 된장을 담지 못하는 어리석은 두려움 등 역기능 두려움은 행복의 길을 막는다.



닥치면 능히 해결할 수 있는 일을 놓고, 쓸데없는 걱정과 두려움으로 행복을 잃는다. 걱정도 습관이 되면 조건이 좋아도 걱정거리와 두려움으로 가득 찬다. 강대함과 배짱이 있다면 어느 정도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지만, 두려움을 완전 해소시키지는 못한다. 두려움의 뿌리를 자르지 못하면 소심한 마음과 행동 위축은 계속 된다. 에너지를 뺏고 정상 생활을 방해하는 두려움을 극복하여 행복지수를 키우기 위해 인간은 왜 두려움을 갖는지? 두려움의 본질과 두려움을 이기는 방법을 살펴보자.



1) 걱정과 두려움은 유전자 영향이다.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원시사냥꾼 시절부터 시작된 인간의 방어심리다. 고대의 벽화를 보면 해가 뜨는 장면이 많은데 이는 해가 계속 떠오르기를 바라는 기원이며, 물고기와 짐승 그림이 많은 것은 사냥감이 끊이지 않기를 바라는 주술이었다. 원시인은 공룡에 비해 물리적 힘도 약했고, 단순한 세상의 이치마저 모를 정도로 허약했다. 원시인은 그림을 그려서 두려움을 해소하려고 했을 정도로 심신이 약했던 것이다. 원시 사냥꾼은 무서운 짐승을 피해 밀림에서 먹이가 부족한 초원을 선택했고, 초원에서도 사나운 맹수를 먼저 보고 도망을 치기 위해 직립보행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인류의 역사는 두려움 때문에 생겼거나 두려움과 싸운 결과다. 원시인은 해와 사냥감이 사라지는 것이 두려워 주술이 발달했고, 고대 국가는 상대국의 침략이 두려워 먼저 전쟁을 일으켰고(지금도 강대국은 명분을 만들어 먼저 공격한다.), 왕조의 신하들은 동료의 모함이 두려워 먼저 모함했고, 바른 소리를 하다가 3족이 몰살당하는 화를 보면서 침묵하거나 이중적 태도를 취했고, 민초들은 말 한마디에 목이 달아나기도 하기에 yes와 no에 대해 신중해야 했다.



지금도 인간은 두려움을 갖고 있다. 지금도 인간이 카페의 창가를 선호하는 것은 자기는 감추고 바깥세상을 관찰하여 막연한 위험과 두려움에 대처하려는 본성이라고 한다. 인간의 두려움은 계속되고 있다는 해석이다. 죽음이 두려워 신앙생활을 하고, 우연한 사고로 재물을 잃는 것이 두려워 보험을 활용하고, 존재감 상실과 결핍이 두려워 모임에 참석하고 사회생활을 하며, 자유를 추구하면서도 자리를 잃는 것은 두려워 조직에서 눈으로 웃지 못하고 입으로만 형식적으로 웃는다. 인간의 두려움은 사회적 인간을 만들었다. 고통과 아픔을 오랜 기간 체험한 인류의 유전자 속에는 막연한 두려움이 잠복되어 있어 민감하고, 결정적일 때 힘이 없으면 죽었기에 평소에는 힘을 아끼려고 안일하게 대처하는 습관이 생겼고, 이웃의 아픔을 아는 체 하면 몸이 수고를 해야 하기에 외면하고, 대인관계에서 한번 밀리면 우위 회복이 어렵기에 자존심과 자기 방어 본능을 키웠다.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유전자가 있는 한, 인간의 두려움을 제거할 수는 없다.



2) 걱정과 두려움은 손해를 막으려는 방어행동이다.

이제 문명이 발달했고, 세상의 이치도 밝혀졌고, 인간의 생존을 위협했던 힘센 동물도 없는데, 인간은 여전히 두려움에 빠져있다. 최악의 상황을 이길 자신감이 없기 때문인가? 두려움은 이제 고착된 인간의 현상인가? ‘인간은 왜 지금도 두려워하는가?’ 두려움의 뿌리를 캐고 들어가 보자. 원시인은 태양이 사라져 사냥을 못하는 손실이 두려웠고, 왕조시대는 외적의 침입으로 제국을 잃는 것이 두려웠다. 현생 인류는 그 무엇의 상실 - 자리와 권위의 상실, 체면 삭감, 인격과 자존심의 상처, 물질의 손실- 로 인해서 손해를 보고 고달파지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결국 두려움의 본질은 ‘손해를 보지 않으려는 방어행동이다.’인간은 두려울수록 소심하고, 예민하고, 주저하고, 까칠한 행동을 한다. 두려움에 대한 인간 본성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주변 상황은 사냥꾼 시대처럼 여전히 불확실하고, 원시인에게 위협의 대상이었던 힘센 맹수는 힘센 인간으로 대체가 되었을 뿐이며, 지켜야 할 것들은 더 증가했기 때문이다.


3) 좀 망가지고 손해도 보면서 더 크게 성장하자.
‘나’라는 존재는 우주의 유일한 존재이며 우주의 주인이다. 우주의 주인 의식을 가지면 불안감과 피해의식, 두려움과 망설임 없이 당당하게 살 수 있다. 주인 의식이 없으면 손해 보는 것을 두려워하게 되고, 두려워하면 더 큰 손해를 보는 게 세상 이치다.이제 두려움을 줄이고 보다 차원 높은 삶의 질 향상을 위해 두려움의 뿌리를 버려야 한다. 보다 더 큰 기회를 만들기 위해 자존심이 좀 무너지는 것도 허용하고, 사람을 얻기 위해 손해도 보고, 성과가 지연 달성이 되어도 근본이 바뀌는 문제가 아니라면 한 박자 쉬었다 하고, 언젠가는 아름다운 지구 소풍을 끝내고 죽을 운명인데, 그렇게 미련을 떨고 조바심을 내지 말자. 조바심을 많이 부리고 죽었다고 황금 관을 내려주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최악의 사태가 와도 나는 능히 이길 수 있다는 여유와 자신감을 갖고 먼저 망가지면 두려워 할 일이 반으로 줄 것이다. 살면서 겪는 손해, 고통과 아픔, 죽음과 존재 소멸도 시간이 해결하지 못하는 것은 없다. 모든 문제는 두려움에서 생기지만 두려움을 극복하면 인생은 한 차원 높게 성숙한다.



4) 두려운 일이 생기면 자기를 먼저 순장(旬葬)하자.

칼이 부러진 무사가 칼이 짧은 것이 두려워 물러서면 바로 죽는다. 칼이 짧을수록 한 발 더 앞으로 나가야 두려움이 사라지고 살 수가 있다. 누구나 두려움 느끼지 않고 강대하게 살려면 자기 아집과 이기심이 조정하는 손해에 대한 두려움을 파괴해야 한다. 아집은 일시적으로 자신의 왕국을 만들지만, 결국 자신에게 갇혀 외롭게 되고, 자기를 고수하다가 두려움을 만든다. 부자와 권력가들이 두려움 속에 사는 이유다. 아집과 두려움은 수양으로 줄일 수 있지만 완전 제거는 어렵다. 아집 밑에 숨어 있는 이기심이 탈바꿈을 어렵게 하기 때문이다. 충격과 자극을 주어야 한다. 아집과 이기심이 만든 두려움을 자기 의지로 콘크리트 무덤 속에 순장시키지 않으면 자기 실체가 언젠가는 허무하게 묻힌다. 자신의 육신이 한 줌의 재로 사라지기 전에 행복한 삶을 누리려면 스스로 두려움에 빠진 자아를 죽여서 묻어야 한다. 두려움을 묻고서 새로운 삶,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용기, 한 박자 쉬면서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한다. 얄밉게 주저하는 두려움을 붙들고 있으면 남는 것은 허무한 죽음뿐이다. 죽음이 두려움을 죽이기 전에, 내가 먼저 두려움을 순장시켜서 나의 큰 행복을 찾아야 한다.



5) 진정으로 두려워 할 것은 세상의 선택을 잃는 것이다.

이제, 작은 고민과 고통, 몸의 노고와 손실을 두려워하지 말자. 손해는 새로운 기회, 새로 채우기 위한 절차로 인식하고, 몸이 좀 더 수고를 하고, 마음이 한 발 더 나가면 된다. 우리가 크게 살기 위해서, 세상의 선택을 받기 위해서, 복잡할수록 단순하게 대응하여 기회와 에너지를 얻고, 자기욕심을 내려놓고 서로 어울려 사람을 얻고, 쉽게 일을 하려는 안일함과 귀찮아하는 소극성을 버리고, 자기 방어적인 자존심을 내려놓고, 진정으로 웃으면서 화합하는 사회적 인간이 되어야 한다. 자연도 자연에 순응하는 종자를 선택하여 대를 잇게 하듯,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일은 담담하게 수용하고, 두려워 할 일(두려움으로 사람 구실을 잃고 세상의 선택을 잃는 행위)만 두려워하는 사람을 선택하여 세상을 바꾸려고 할 것이다. 

ⓒ 한경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